연락망

이마 왼쪽에 뾰루지 세 개가 생겼다. 어제 뒷마당 정리하면서 무슨 벌레에 물린 듯했다. 하루가 지나니 왼쪽 눈 위에도 똑같은 증상이 보였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붓기 시작했다. 오후에 병원에 갔다. 의사는 나를 보지마자, 싱글스(대상포진)라고 했다. 그리고 너는 코리언이지 하며 옆방에서 진료중인 한국인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나를 진찰하더니 바로 안과 의사를 만나야 한다고 여기저기 전화하여 오후 마지막 시간을 잡아주었다. 지금 대상포진이 눈가에 내려와 있기 때문에 시신경을 건들이면 실명할 수도 있다며 오늘 꼭 안과 전문 의사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서둘러 안과에 도착하여 담당 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아직까지 시신경은 괜찮다고 하며 7일간 아침저녁 하루 두 번씩 왼쪽 눈에만 두 방울씩 모르핀 성분이 포함된 특수 안약을 넣으라고 했다. 연고는 아픈 부위에 견디기 어려울 때만 바르라고 하며, 두 주간 정도 고생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파에 기대어 TV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의료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대상포진 증세가 나타나면 곧바로 닥터에게 가라는 광고였다. 그동안 이러한 광고가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없는데 지금은 자주 보였다.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내가 안과 의사에게 갔을 때, 코비드 주사를 언제 맞았는지, 어떤 종류의 주사를 맞았는지 자세히 물었었다. 아마도, 코비드 예방주사와 대상포진에 무슨 역학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일째부터 통증이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진통제인 파나돌을 복용하고 안약도 왼쪽 눈에 투입하고 이마 부위에 연고도 발랐다. 심한 통증은 3일정도 이었다. 거실의 소파에 누웠다. 소파에 누운 내 몸이 스스로 무너지며 땅 속으로 꺼지는 듯 했다. 그래서 인지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2주가 지났다. 그 동안 나를 쭉 지켜보던 아내는 갑자기 자신이 먼저 떠나게 되면 누구누구에게 꼭 연락 하라고 하면서 나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당신은 한인교회도 안 나가고 그 동안 오직 문학회 활동만 했으니 혹이나 당신이 세상 떠나면 누구에게 연락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아내는 웃을 일이 아니라고 정색한다. 주춤하던 나는 문학회 총무인 K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아내는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 한 사람 더 알려 달라고 했다. 초창기 때부터 20여년 넘게 활동한 문인의 전화번호를 추가했다. 그러면서 장례식에 참석하여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하라고도 했다.

몸 상태가 좋아진 나는 년 초부터 계획했던 고국을 방문했다. 다행스럽게도 대상포진 때문에 당초 일정이 변경되진 않았다. 도착 후, 누님과 형제들 함께 아버지 탄생 100년, 그리고 60주년 추모를 동시에 진행했다. 아버지는 만 40세가 되던 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보다 먼저 간 불효자식이라고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고향의 동네 입구에서 조금 떨어져있던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 7년이지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당시 만장을 앞세워 크게 장례를 치렀다. 그 후 3년째 되던 해, 그제야 비로소 아버지는 할아버지 바로 밑의 자리로 이장했다.

나는 아버지의 산소 앞에서 아버지를 조용히 불렀다. 아버지를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불렀다. 동생들은 너무 어렸을 때인지라 아버지의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으나, 11살의 큰아들이었던 나는 아버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나간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입대 후 첫 휴가에 군복입고 왔을 때, 결혼하고 아내를 데리고 왔을 때, 첫 딸을 안고 왔을 때, 아들을 안고 왔을 때….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그 광경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려 본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아내와 나의 아들딸과 손자 손녀들의 애석해하는 모습이 보일 것 같다. 아이들이 꼬불꼬불 그린 한글 손 편지를 낭독하고 그 편지를 내 머리맡에 놓아둘 것이다. 고국에선 몇 명이나 참석할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남동생과 제수씨가 우리 형제들을 대표하여 참석 할 것 같다. 아내의 가까운 친구들이 참석하여 아내를 위로할 것이다. 연락망을 통하여 문학회원들도 참석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가족들이 모르는, 나의 다른 모습을 그 문인들이 전해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에게 다녀온 후, 시드니 캐슬브렄 CASTLEBROOK 추모공원에 마련된 내 자리에 와보니 우리 부부의 자리 주변이 깨끗하다. 이곳 호주 장례문화는 고국과 같은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한다. 넓은 동산에 우리 부부가 묻히는 이곳엔 먼저 간 사람이 2.5미터 깊이에 들어가 누워 있고, 나중에 남은 짝이 오면 그 위에 눕히게 된다.

 

 

장석재 (수필가·문학동인캥거루 회원)

 

 

 

 

Previous article미셸 유의 미술칼럼 (56) 상징주의 회화의 선구자 오딜롱 르동
Next article한글이름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