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힘없고 앙상한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 어머님의 사랑은 가이없어라.’ 이보다 더 절절히 어머님 사랑을 표현한 글이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화내고 짜증내고 구박했다. “왜, 고집이시냐? 왜, 못 알아 들으시냐? 왜, 바로 걷지 못하시냐?” 아니나 다를까 “너도 내 나이 돼봐라. 이놈아!” 하셨다. 묘한 건, 화내시는 힘을 붙들고 “아직은 살아 계시네…” 했는데 요즘은 이마저도 점점 흐려지는 느낌에 마음이 낯설고 슬프다.

 

01_때만 되면 적지 않은 거금(?) 내놓으시길 좋아하셨다

가족 중 누군가 한국을 가거나 생일, 추석, 설, 제사… 때만 되면 적지 않은 거금(?)을 내놓으시길 좋아하셨다. 딸은 끝까지 거절하고 살벌한 싸움과 감정낭비까지 한 후 결국 어머님이 패하여 속상해하는 편이셨고 아들은 잘 받아주니 더욱 신나 하셨다.

이 모두가 펜션수당 모아서 주신 것이다. 친구분들과 가끔 가시는 식당에서는 10불 전후를 넘지 않는 음식을 드셨다. 비싼 건 절대 안 드신다. 그런데 당신 장례비만 해도 벌써 세 번이나 주셨다. 물가 인상이 됐으니 더 들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어머니 모습이다 / 평생을 고달픔 속에 있었다. 어머니 모습이었다 / 아스팔트 길 위에 빗방울이 작은 원을 만들며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 뺨을 스치는 비바람과 습기가 시원하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어머니의 지금 모습이다.

첫 만남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땐가? 종로1가 화신백화점 입구에 서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날은 점점 어두워져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을 낼 때쯤 어디선가 갑자기 어머니가 나타나셨다. 환한 미소를 보이셨다.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의 만남이었다.

어머니인 것을 알아본 것으로 미루어 분명 이전에도 만났다는 것인데 아쉽게도 기억이 없다는 게 지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리고 걸어서 남대문 지하도 만두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신 생각이 난다.

 

02_8남매의 장녀, 홀로 돈 벌어 매월 송금하는 가장이셨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까지도 나는 물만두를 정말 좋아한다. 사실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년 내내 가출을 밥 먹듯이 했다. 외할머니와 삼촌들을 힘들게 하며 이리 (익산)역을 시작으로 서울로 광주로…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다. 딱 하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두 남매를 맡긴 친정 집 8남매의 장녀, 홀로 돈을 벌어 매월 송금하는 가장이셨다.

두 번째 만남은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신촌역이 바라보이는 삼거리에서 국밥집을 하는 어머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지금도 국밥집 천정의 그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모자가 잠을 자던 모습이 진한 음식냄새와 함께 코와 눈에 뚜렷이 남아있다. 54년 전 일이다.

꿈결같은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식당 돈 통에서 돈을 꺼내 만화가게에서 세계챔피언 TV중계… 등을 즐기다가 난생처음 어머니로부터 싸대기를 맞고 번갯불이 번쩍했기 때문이다.

엄마한테 쫓겨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식당 옆 목재소에서 호마이카상을 만들다 마포의 프레스공장에서 K대학교 호랑이 마크를 찍던 생각이 난다.

안국동의 금은세공 공장에서 일년 넘게 일하면서 종로2가 인사동 부잣집 마루를 물걸레질하는 알바도 했다. “아, 부잣집 종들이 이런 거구나…” 했다. 한 순간 어머니 홀로 감내하셨을 고생과 아픔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03_어머니는 두 가정의 가장으로, 먹고 사는 것에 최우선 두느라

그러다 하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한 나는 중졸 2년만에 야간고교에 진학했다. 신문배달과 가판, 서울시 시영버스 서무계 사환, 화장품 외판원 등을 하며 언젠가는 대학에 진학할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 소원인 공부하는 책상을 고3이 되어서야 마련했다. 이 책상은 야간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6년 이상 집에서 가장 좋은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 동생은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다. 내가 고교 3학년 때였다. 어머님께서 마포 도화동에 세탁소를 차리면서 낮에 전등을 켜지 않아도 훤한 큰방이 생겼다. 동생이 살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좁은 뒷골목길 벽을 경계로 한 마루에 책상을 놓을 공간도 있었다.

동생은 중학교까지 항상 전교 1, 2등을 하는 문학소녀였지만 울면서 명문 S여상에 진학해 겨우(?) 졸업한 후 은행근무 중 야간대학을 3년 반 만에 조기 졸업한 수재였다.

문학활동을 하며 시집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호주교민에게 시집을 가 어머니처럼 남매를 낳았다. 그리고 매제에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한 맺힌 자식교육 최우선주의 전업주부로서 고생 끝에 나름 성공한 남매를 훌륭히 길러냈다.

조카 남매는 최고의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두 녀석 모두 3개 언어와 1개 악기를 다루며 각자의 활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제서야 동생은 호주기업체나 정부부처 등에서 계약직 일을 시작한지 2년이 돼가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두 가정의 가장으로서 먹고 사는 것에 최우선을 두느라 자식공부에 소홀한 점에 대해 한스러워 하시며 오랫동안 우리 남매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틈틈이 표현하셨다.

 

04_하얀 허물 벗어버리듯 당신의 모든 걸 아낌없이 자식들에게

그래선지 항상 뭔가를 해주기 위해 바쁘셨다. 내가 결혼한 후 1년 즈음부터 미국 막내이모 집에서 조카들을 돌 봐주며 4년 이상을 시장일로 돈을 모아 오신 후 신림동에 집을 지으셨다.

호주 딸 집으로 한국 당신 (아들) 집으로 왔다 갔다 방황(?)하시다 드디어 IMF때 넘어진 아들을 당신 곁에 오게 하는 기회(?)를 잡으셨다. 그리고 당신 집을 판 일부로 집과 새 차를 살 수 있게 해주셨다.

지금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의 최소 60% 이상은 어머니 지분이다. 어머니가 사시던 아파트는 6년 전에 동생이름으로 해놓고 동생 집에 계신지가 2년이 다돼간다. 이제 월 2회의 펜션수당이 전 재산이 된 당신 계획대로 시드니에 있는 한국양로원에 가겠다고 주장(?)하고 계신다. 나는 최소한 동생 집에 계신 만큼은 내 집의 어머니 방에 계시면서 천천히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편 복은 처음부터 없었다. 홀로 낳으시고 키워주셨다. 지금도 자나 깨나 “뭐 도와줄 거 없나?” 하신다

하얀 허물을 벗어버리듯 당신의 모든 것을 한 개도 남기지 않고 아낌없이 자식들에게 베푸셨다. 이제 굽어진 허리와 앙상한 뼈마디로 근근이 버티고 계신, 그럼에도 아직은 총명함을 잃지 않으신 당당한 어머니.

 

05_“아범, 돈도 없을 텐데 주말 내 구순 기념 외식비에 보태…”

그 지극하고 단단한 사랑에 대해 초라하고 빈약한 내 최소한의 형식적 효심(?)만을 슬그머니 내보이며 동생부부 눈치도 봐가면서 서성이고 있다. 가끔 집에 오실 때 하루 이틀 또는 1-2주 사용하는 어머님의 허전한 빈방에 아내의 평온함과 내 게으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조선시대 같으면 멍석말이 감이다. 그러면서 매일 한번씩 수화기 저편에서 넘어오는 어머님의 힘없는 하얀 목소리에 죄스러워 하면서도 가끔은 밝고 명료한 말씀에 기대어 한숨을 돌리고 있다.

나는 어머님께 말씀 드린다. “두 가족의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 쓰느라 아들과 딸의 공부에 소홀히 한 것은 저희들에게 한스럽고 미안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남매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꼭 해내고 마는 지금의 삶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뭔가를 더 해주려 애쓰지 마시고 당당히 “날, 잘 모셔라!” 큰소리로 요구하시고 “날 삐치게 하면 내 집 다시 내놓으라고 할 거야!”라고 하세요.

그런데 오늘 또 어머님께서 부르셨다. “아범, 돈도 없을 텐데 주말 내 구순 기념 외식비에 보태…” 하며 50불 지전 몇 장을 손에 힘있게 쥐어 주셨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없고 앙상한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버스 운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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