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하고 나하고

2004년, 일본인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졸혼을 권함>이라는 책에서 유래한 졸혼 (卒婚)은 ‘결혼을 졸업하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입니다. 부부가 이혼은 하지 않고 혼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혼의 의무에서는 벗어나지만 부부관계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이혼이나 별거와는 차별화가 이뤄집니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도 파고들기 시작한 그 졸혼이 탤런트 백일섭 씨(80)에게는 커다란 사달이 됐습니다. 2015년, 부인에게 일방적으로 졸혼을 선언한 그는 그로 인해 딸 지은 씨로부터 7년 넘게 절연을 당한 채 살아왔습니다.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는 푸근한 남편, 다정한 아버지로 등장하던 그는 실제로는 폭력적인 남편, 늘 술에 취해 들어와 화만 내는 무서운 아빠였다고 합니다. 그랬던 아빠가 일방적으로, 그것도 엄마가 암 투병 중인 상황에서 졸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가버렸으니 딸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겠습니다.

그랬던 백일섭 씨가 TV조선에서 한국시간으로 매주 수요일 밤 10시에 방송하고 있는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딸과 7년여만에 극적인 화해를 이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의 만남을 철저히 거부 했던 지은 씨가 회를 거듭하며 강하게 뿌리쳤던 아빠의 손을 다시 잡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 같은 화해에는 백일섭 씨의 사위 김수찬 씨의 노력과 세 손주 시연, 필로, 시아의 역할이 컸습니다. 수찬 씨는 한달 반쯤 전 장인과 단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저는, 아버님 졸혼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라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졸혼을 하려 했다면 충분한 대화를 통해 앙금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 했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이 일방적인 통보로 이뤄진 것이 문제였다며 날 선 비판을 거리낌 없이 했던 겁니다.

이후 아빠와 딸을 화해시키려는 수찬 씨의 꾸준한 노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존재 자체로만도 엄청난 효과를 가져오는 세 손주들도 할아버지의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7년여만에 어렵사리 만들어진 자리에서 어색하기만 했던 부녀관계는 그렇게 조금씩 진전을 보여 이제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식사도 함께 하며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7년여만에 딸의 집에 초대를 받은 백일섭 씨는 처음에는 딸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던 도중 슬그머니(?) 딸 지은 씨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고 지은 씨도 자연스레 아빠의 손이 닿을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는 모습은 그야말로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그간 부인 이야기만 나오면 차가운 반응을 보였던 백일섭 씨는 딸과 단둘이 마주한 자리에서 “네 엄마에게 결론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처음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정히 길을 걸었고 지은 씨가 자연스럽게 아빠에게 팔짱을 끼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날 딸은 아빠의 45년 단골 옷 가게에 들러 아빠에게 어울릴만한 멋진 옷들을 몇 벌 선물했고 아빠와의 데이트가 끝난 뒤에는 아빠의 단골 부대찌개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자리를 가졌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사위 수찬 씨의 온 마음을 담은 사전준비가 있었습니다.

밝게 웃고 떠드는 세 손주들을 바라보는 백일섭 씨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꿀이 뚝뚝 떨어졌고 아이들 챙기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지은 씨의 그릇에 부대찌개를 수북이 올려주며 “너도 좀 먹어라” 하는 무심한 듯 정이 넘치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이쯤 해서 다시 한번 TV조선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어떤 채널을 봐도 답답하고 화가 나다가도 미스터트롯, 국민가수, 미스트롯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는데 이번에 ‘아빠하고 나하고’를 보면서 또 한번 그런 기분을 느꼈습니다. 조만간 평생을 원수(?)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백일섭 씨의 부인까지 포함된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웃음이 넘치는 행복한 자리가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멋진 사위 수찬 씨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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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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