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시인

김규화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 문덕수 시인과 더불어 1977년 ‘시문학’을 인수해 지금까지 결호 없이 발행했다고 한다. 두 분은 아마도 처음에는 순수한 문학도의 자세로 자신들이 떠맡아 하지 않으면 폐간될 것이 뻔히 보여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원고마감, 대인관계 그리고 적자에 시달리면서 그 고뇌가 깊었음에도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아마 지나가는 바람에게조차 허튼 말을 뱉지 않았으리라. 마침내 넘지 못할 벽을 넘어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바쳐 그들의 생애는 시와 하나가 되었다. 시 전문 문예지를 도맡아 부부가 평생을 바친 그 집념 뒤에는 모국어에 대한 끝없는 헌신이 있어 가능하지 않았을까. 돌아가신 게 3월인데 2023년 2월호까지 간행되게 해두고 가신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 부부는 소중한 모국어를 지키는 불침번이었고 파수병이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모국어에 대한 끝없는 사랑, 이해 그리고 공감이 시인의 길인 것 같다. 김규화 시인과 문덕수 시인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한국 대학에 근무하는 지인 교수 한 분의 어머니가 바로 김규화 시인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수필을 쓰며 자연히 시를 곁눈질 하게 된 나에게는 그가 갑자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시인들이 북적대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얼마나 많은 시상들과 아름다운 말들 속에서 매일 헤엄쳤을까. 그가 비록 지금은 문학과 거리가 먼 의학세계에서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을지라도 그의 성품과 표현력 그리고 선별된 언어 사용은 그 동안 응축된 경험들이 빚은 산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후손인 엔드루 워즈워드 (Andrew Wordsworth)가 쓴 책 ‘Well-kept secrets: the story of William Wordsworth (그 동안 몰랐던 비밀: 윌리엄 워즈워드 이야기)’를 최근에 읽었다. 워즈워드가 평생 시를 다음과 같이 썼노라 저자는 말한다. “그의 작품은 인간이 경험하는 것을 여과시켜 언어로 표현한다. 이 언어는 모든 피상적이며 가볍고 즉흥적인 것을 걸러내면서 시를 쓰는 동안 드러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정화시킨다.” 시를 정의하는 구절 중 가장 탄탄한 문장이어서 더 이상 덧씌울 필요가 없을 성 싶다. 농사지어 수확한 깨를 볶은 뒤 압착기를 이용해 짜내면 참기름이나 들기름이 나오듯이 시는 정제와 축약의 과정을 통해 절제되고 기품 있는 언어가 시라는 옷을 입고 탄생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시는 돌부리 같은 데가 있다”고 한다. 그저 생각 없이 걷는 우리를 갑자기 툭 걸리게 하니까. 독자의 가던 길을 멈추게 하려면 시는 확실이 수필과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 기발한 생각이 떠오를 분위기가 필수다. 어떤 시인은 밤 늦은 시각에 또는 새벽에 일어나 참선을 한 후에 또는 워즈워드처럼 자연을 벗삼아 걸으면서 작업을 한다고 하지만 역시 공통분모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인 것 같다. 이주일 일정으로 아웃백 여행을 떠나면서 이른 새벽녘에 집을 나선 적이 있다. 때마침 나를 마중해 주는 커다란 달덩이를 보자 불현듯 수 만년 동안 이곳 땅에서 살았던 원주민의 삶이 보내는 은미한 떨림을 들었다. 무엇에 홀린 듯 차를 멈추고 끄적거렸다.

그는 달빛에 눈을 뜬다 물론 한기와 시장기도 거들었다/ 나는 스마트폰 알람에 눈을 뜬다 물론 늙어감과 옆자리 여편네도 거들었다// 밤 이슬로 쪼그라든 불씨에 그가 숨을 불어 넣자 불구가 된 나뭇가지들이 청아한 소리를 낸다 동시에 자고 있던 동네 원주민들과 새들이 기지개를 켠다/ 냉한 집안을 덥히려고 센트럴 히팅에 내 손이 닿자 입자가 굵은 공기 사방팔방에 흩어진다 동시에 눈을 감고 있던 아내가 기지개를 켠다// 주구장창 매일 보는 달이지만 크기와 밝음에 그의 심장이 유난스레 방망이질 한다/ 어둠을 부수기 위해 전기 스위치를 누르자 전등빛이 내 눈을 찌르며 심장이 콩알만 해진다// 중년 아줌마 엉덩이 같은 달덩이와 넓은 그의 가슴팍은 코드가 맞는다/ 고혹적인 자태로 빛을 발하는 새벽 침묵을 난 심드렁히 바라본다

아웃백의 대지는 딱딱하다. 메마르고 황량한 그곳에 흐르는 강줄기가 주는 말랑말랑한 감촉은 그래서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시상에 허기진 나에게 아웃백이 손짓을 한다.

아웃백으로의 여정은 나에게 성지순례다// 붉은 대지와 교감하면서 가면을 벗는다/ 유유히 흐르는 달링강의 속도로 걸으면서 웃옷을 벗는다// 캥거루처럼 팔짝팔짝 뛰어보기도 하고 이뮤처럼 뒤뚱뒤뚱 걸어보면서 아랫도리도 햇볕에 온전히 노출시킨다/ 알몸이 된 나를 고즈넉이 바라본다

나를 볼 때마다 뱀, 바위, 나무 그리고 하늘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스카프를 매주듯 그림자를 엮어준다. 옆에 흐르는 달링강이 매달린 그림자를 나에게서 떼어 천천히 달아난다. 멀어져 가는 그림자를 보면서 강변에 쪼그려 앉아 신과 대화를 한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박석천이고 송정아의 남편입니다/ 나는 네 이름을 묻지 않았고 부인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두 아들의 아비입니다/ 나는 네 자녀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임상연구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등산을 좋아하며 여행도 자주 다닙니다/ 나는 네 취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대화하며 스스럼없이 잘 어울립니다/ 나는 네 성격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결혼생활에 만족하며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나는 네 결혼 만족도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강의 뿐 아니라 논문도 제법 쓴다고 자부하며 학술서적도 출판했습니다/ 나는 네 자랑을 늘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

 

 

박석천 교수의 '따로 또 같이' 여행기 ① 뉴질랜드 북섬, 그 북쪽의 끝을 가다!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챨스스터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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