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 내리는 황사

새벽 여섯 시쯤 되었을까?

 

창문에 쳐진 블라인드 가장자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심상치가 않다. 심상치 않은 것은 빛 자체가 아니라 컬러였다. 블라인드를 흥건히 적시면서 스며들어오는 빛은 붉은 빛이었다. 그것도 피 빛에 가까운… 하늘이 붉어지는 시간은 항상 저녁 해질 무렵이지 아침 시간이 아니지 않은가. 아침마다 시끄럽게 지저귀던 새들도 오늘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정신을 내려놓고 잔 하루 밤 사이에 바깥 세상에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만일 지구 최후가 오늘이라면 바로 이런 식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을 것 같다. 우주가 요란한 빅뱅으로 시작되었다면 종말은 침묵으로 끝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방안의 공기가 건조하고 탁했다. 열로 달구어진 전기 다리미를 밤새도록 끄지 않은 채 잠에 떨어진 그 다음 아침 날 같은 기분이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다리미 대 위에 놓인 다리미의 금속 부분에 손을 대어 보았다. 차가웠다. 다리미가 아니라면 실내가 이렇게 건조해진 탓은 밖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지구적 사건 이 원인임이 분명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면서, 잠들기 전까지 뉴스를 읽다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세상이 망했다면 분명 오늘 아침의 톱뉴스 감이리라. 그리고 나는 오늘 세상이 망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온 터였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가 난다면 이 번 종말에 대해서는 아무도 사전에 예언하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원래 종말 시나리오는 이렇다. ‘그 때와 그 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라고 분명하게 성경은 못박고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그 때와 시를 예언했고 그 모든 예언들은 다 빗나갔다. 나는 그 동안 웬만한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설교와 책을 통해서 섭렵하고 있었고, 아마도 그 시작점은 광화문 재수 시절에 접한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란 책이었던 것 같다. 노스트라다무스가 한 일은 4행시 1천 여 편을 쓴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후세의 해석자들이 나타나서 그 4행시들이 모두 미래에 일어난 대사건을 말하고 있다는 끼어 맞추기 식 해석을 했을 뿐이다. 한 마디로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원문 자체의 모호성 때문에 해석은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 그러니 세상은 1999년, 2012년 그 이후 어떤 시점에도 망할 수도 있고 안 망할 수도 있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 나의 분방한 상상력을 극한으로까지 밀고 가기에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는 책이었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시드니에서도 다미 선교회가 시드니 교계를 온통 종말론으로 시끄럽게 한 때도 그랬다. 이들의 주장하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내심 종말이 왔으면 하는 묘한 기대감 같은 것도 없지는 않았다. 종말론이란 결국 낡은 시대의 종언이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인류의 원초적 바램 아니던가?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작은 종말들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한 때,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기 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마야, 잉카, 아즈텍 문명이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이들의 종말은 각각 멕시코, 페루, 중앙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시작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구의 종말이 은하계의 새로운 시대를 불러오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종말은 필요하다.

ABC 뉴스 앱을 터치했다. 작은 스크린에는 온통 붉은 빛을 뒤집어쓴 오페라 하우스의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드니 전 지역이 황사에 덮여 있었다. 대충 기사를 훑어 본 후, 커튼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와우!! 세상은 온통 황사의 저주 하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 저주…이집트에 10 번 내려 졌던 저주들처럼 황사는 괴사스런 모습으로 시드니 하늘을 붉은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황사 현상일 뿐 종말은 아닌 듯했다. 붉은 먼지를 뒤집어 쓰기는 했지만 정원들의 나무들은 여전히 초여름을 맞이할 준비에 분주해 보였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자기 집 깊숙한 곳에서 쳐 박힌 채로, 눈 만을 반짝이고 있었다. 생명은 어느 곳에도 손상 당한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기분만은 조금 우울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축이 23.5도기울어진 우울한 지구처럼….

시계를 보았다.
아날로그 시침과 분침은 성실하게 아침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 바탕 소나기라도 시원하게 쏟아져야 될 텐데… 오늘 오후에는.

 

 

최무길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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