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플로리다, 그 지명을 조용히 불러본다. 넘치는 햇살에 잘 익은 과일들이 다닥다닥 가지에 붙어있거나 바닥에 뒹구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사진에서 보았던 현지인들의 구리 빛 피부, 하얗고 부드러운 모래가 펼쳐진 해변 때문일까. 금방 짜낸 오렌지 즙이 담긴 주스 광고를 보고 침이 넘어가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한몫 했다.
그 플로리다에서 쓸쓸한 바람 한 줄이 시드니까지 불어왔다. 지구 반대편까지 불어온 아침 전화, 급하고 급했나 보다, 받자마자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등을 일으켜 머리를 묶고 커튼을 벽 쪽으로 밀었다. 창밖에는 녹색 잎사귀들이 거의 목까지 촘촘하게 차 올랐다. 우리 집 마당은 늦가을로 치닫는 플로리다와 달리 봄기운이 만연했다. 나도 저 땅 기운을 받아 오늘 하루도 물오르듯 시작해 보자며 기지개를 막 켜던 참이었다.
그때 시커먼 것이 창문 밖 나뭇가지 틈에 언뜻 보였다. 큰 새가 앉아있나 싶어 안경을 끼고 다시 보니 꺾여서 죽은 가지였다. 왜 이제야 보였을까, 툭 치면 부러 질듯 했다. 힘차게 수액을 밀어 올리는 나무들 사이에 남다른 패색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잠시 호흡을 고른 후에야 전화기를 다시 집었다.
며칠 전에 보내주었던 플로리다의 평화로운 동네 풍경사진과는 달리 그는 곧 터질 것 같은 울음주머니를 꼭 쥐고 있었다. 마디게 감아 둔 실타래가 곧 올올이 풀어질 것 같았다. 플로리다 햇빛에 꾸역꾸역 잘 건조되어 갈 것이라 믿었던 건 섣부른 내 생각일 뿐이었다.
마라톤 마의 구간이 생각났다. 42킬로 중 35킬로 지점, 고통과 절망으로 포기하고 싶다는 거기, 기대와 희망으로 다시 힘을 내어 달릴 수도 있다는 그 지점이 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했다.
나이 오십은 한 인생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 나이가 아직도 멀고 먼 이는 방심할 것이고 어느새 그 지점을 건너온 이는 거기가 아직 청춘이라며 부러워할 만한 구간이다. 마침 오늘, 우리의 대화가 그랬다. 그는 얼마나 더 버티며 살아야 하냐고 신음하듯 말을 뱉었고 막 잠에서 깨어난 나는 별소리를 다한다고 펄쩍 뛰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를 플로리다라고 불렀다.
-플로리다, 당신 나이에 나는 문학의 첫 단추를 끼웠어, 먹고사는 일에서 겨우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시의 문고리를 붙잡고 막 어리둥절해 있었을 때야.
잠시 주춤했다. 그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일찍이 남다른 성취감을 맛본 자였다. 누가 봐도 부러운 행보였다. 더구나 아낌없이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 덕에 유학 가서 박사 코스를 잘 마치고 좋은 회사에 취직이 되어 소위 말하는 엘리트코스를 걸어온 그였다. 이른 성공에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행운은 언제나 자기편인 것 같다고 내게 슬며시 고백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순탄한 길을 그대로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평소에 해보고 싶던 일이라며 직장까지 그만두고 서울 중심부에 프랜차이즈 카페를 멋지게 열었다. 역린을 건드렸을까, 오픈하고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팬데믹을 만났다. (이쯤 들으면 다 짐작을 할 것이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은 물론이고 대출금 갚는 일에 땅이 꺼지도록 허덕이더니 결국 2년 만에 손을 털고 말았다. 게다가 기대고 있던 부친마저 잃었다.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무심코 뱉었을지는 모르나 나는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아주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주변정리를 다 마치더니 서울을 떠나 플로리다로 건너갔다. 자식처럼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를 품에 안고 탈출하듯 담을 넘어 새 땅을 밟았다. 전공을 다시 붙잡고 공부하던 때 마음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따뜻한 플로리다 바늘로 꿰매겠다는 듯, 슬픔이나 우울감도 지워야겠다는 듯, 그렇게 새 둥지를 틀었다. 이제 6개월째인데, 무릎이 슬며시 풀리는 중인가.
안간힘을 쓰는 그에게 전화로 해 줄 수 있는 말은 너무나 뻔했다. 이번 마라톤에서도 기권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마의 구간을 역으로 풀면 고지가 12킬로뿐이 안 남았다는 말이 아닌가. 만만치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주저 않을 수도 없었다. 끝까지 가보자 했다. 기어이 오는 봄을 보자고 했다. 데리고 간 두 마리 식구와 함께 잘 견뎌내야만 했다.
“내게는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는 날이 있다. 그중 하루는 어제이고 또 다른 하루는 내일이다.” 언제가 그가 내게 들려준 로버트 버데트 말이다. 이번에 내가 그에게 돌려줬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데 오늘 하루를 다 쓰지 말자는 말이었다. 그는 약간 진정이 되었는지 회사에 열심히 다녀야 할 이유를 스스로 다짐했다.
-내 덕에 플로리다 한 귀퉁이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요? 그녀다운 말이라 살짝 웃었다. 당연한 말이라 했다. 꿈은 이루고 나서야 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법이다. 아직도 실패가 꿈만 같다면, 꿈속에서 뒤뚱거리는 것이라면 이 꿈을 어서 깨고 앞만 보고 달리자며 서로 격려했다. ‘기운 내라 플로리다! 유능한 열정아!’
당분간 견딜힘을 찾았다는 플로리다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도 힘을 얻었다. ‘견딜 힘’이란 참 좋은 말이었다. 멀리 떨어져 만날 수는 없지만 세끼 밥을 잘 챙겨 먹고 때때로 통화하자며 말을 마쳤다.
지도에서 플로리다를 다시 찾아봤다. 손으로 꼭꼭 눌렀다가 쓰다듬었다. ‘그가 잘 견디면 나 또한 잘 견뎌낼 것이다’. 이 한마디가 요즘 귓바퀴에 자주 맴돈다. 나를 지탱시키는 멘탈 법칙이기도 했다.
윤희경 (캥거루문학회 회원·2015년 미네르바 신인상 등단·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