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둥이’와 ‘억척녀’ 사이

대학교 2학년 시절, 저보다 다섯 살 어린 그녀를 만나면 늘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항상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초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그녀만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삶에 있어 웃음보다는 짜증과 불만이 더 많았던 늦깎이 대학생에게 문득 다가온 그녀는 분명 천사의 미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무한 미소와 초 긍정적 사고방식은 저의 삶을 참 많이 변화시켜놨습니다. 함께 살아오면서 더더욱….

스물 한 살의 어린 나이에 저한테 미치기(?) 시작해 급기야 ‘홀 시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극한(?)집안에 들어오게 됐지만 ‘순둥이’ 그녀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남자성격의 시어머니가 내뿜는 필요 이상의 이유 없는 며느리 구박(?)에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은 그녀였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실패로 남겨준 집 한 채 값의 유산(?)을 다 갚고 우리는 거짓말처럼 결혼 4년 만에 우리 집을 장만했습니다. 물론, 서울이 아닌 부천에 새로 지은 방 두 개를 가진 열아홉 평짜리 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에게는 고대광실 못지 않은 고맙고 소중한 집이었습니다.

“자기야, 이 집 말이야. 처음으로 우리 힘으로 산 집이니까 이 집 명의, 엄마이름으로 해드리는 게 어때?” 아파트 계약을 하던 날, 아내는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아내는 망설임 없이 안방을 시어머니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부천중동신도시 서른 두 평짜리 아파트로 옮겨갈 때까지 4년 남짓을 작은 방에서 지냈습니다. “우리가 작은 방 쓰니까 자기랑 더 가깝게 붙어 있을 수 있어서 난 더 좋은 걸?” 순둥이인지 바보인지….

아파트 자치회장?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스물 아홉 살밖에 안된 어리디 어린, 게다가 순하고 물러터진 그녀가 그걸 맡았다고 했습니다. 새로 지은 우리 아파트가 2년이 되면서 크고 작은 하자보수를 시행해야 하는 시점에서 아파트 주민들이 용케도 그녀의 숨겨진 투사(?)기질을 찾아내 반강제로 떠맡겼던 모양입니다. “아니요, 사장님. 여기에 적혀있는 내용들 하나도 빼지 마시고 전부 다해주세요.” 아내의 짧고도 강한 한마디에 아파트건설회사 사장부부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는 주민들이 요구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빠진 것 없이 완벽하게 보수공사가 이뤄졌습니다.

다시 2년 후, 새로운 자치회장이 뽑혔고 그 집에 소파며 장롱이며 TV 그리고 냉장고 등 새 가구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승용차도 큼직한 걸로 바뀌는 모습이 목격됐습니다. 그렇게 남들이 다 받아주는 일반적인(?) 관행을 아내는 애써 뿌리치고 ‘원칙대로의 하자보수’를 관철했던 겁니다.

자치회장 시절, 순둥이 아내의 억척녀 모습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우리 아파트 맞은편 공터에 각종 건축자재들을 쌓아 보관하는 대형야적장이 슬그머니 들어섰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은 집값 떨어진다며 아우성이었지만 그녀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그곳에서 놀다가 다치면 큰일이라며 두 팔을 걷어 부쳤습니다. 그런 자리면 예외 없이 나타나는 용역깡패들에 맞서 여러 차례의 싸움 끝에 아파트 아줌마들은 당당히 그들을 내쫓는데 성공했습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중량급 장어는 끌어올리기도 힘들지만 통에 넣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몸부림을 치다가 줄이 끊어지며 탈출을 시도하는 녀석들도 있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아내가 손으로 덥석 잡아 통 속으로 잽싸게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징그럽다고 몸서리를 칩니다. 이전에 몇 차례 그렇게 놓친 녀석들이 있고 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겁니다. 요즘, 아내가 순둥이인지 억척녀인지 헷갈리는 대목입니다.

“바보… 축하는 무슨… 오늘이 공식적으로 자기 신세망친 날인 줄도 모르고…” 헛헛한 저의 얘기에 아내는 특유의 미소를 짓습니다. 지난 수요일이 아내의 서른 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억척녀 기질을 숨기고 있는 순둥이와 큰 감사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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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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