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시간들

우리 때는 ‘영문과는 영문도 모르고 들어가는 과’라는 다소 썰렁한 농담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 영어 좀 한다는, 정확히 표현하면 영문법 잘해서 영어점수 잘 나오는 친구들이 그야말로 ‘영문도 모르고’ 영어영문학과라는 델 들어갔고 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의 나라 말로 남의 나라 문학을 공부한다는 건… 저도 4년 내내 무기(?)로 써도 좋을 만큼 두툼한 원서 (原書)들 틈에서 허우적댔던(?) 기억이 선합니다.

한참 늦깎이로 시작했던 저의 마지막 대학시절은 욕심(?)으로 가득 차서 저는 전공 외에도 부전공과 교직까지 탐을 냈습니다. 그렇게 따낸 영어교사 자격증은 제가 기자라는 직업을 택하는 바람에 단 한번도 써먹지 못했지만 그보다도 더 큰 미련이 남았던 것은 부전공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부전공이었지만 성적은 오히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던 친구들보다 더 좋아 거의 전과목이 A플러스였고 그 학과 교수님들도 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지대했습니다. 실제로 교비장학생으로 캐나다유학 이야기까지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저의 기자직 선택으로 물거품이 돼버렸습니다.

22년 전 시드니에 오면서는 ‘자리를 잡는 대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졌습니다. 당시 호주 대학들에는 사회복지학이 없고 TAFE에만 있다고 해서 구체적인 조사까지 마쳤지만 이후 먹고 사는 문제와 게으름과 타성이 겹쳐져 결국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전에서는 봉사를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크고 작은 봉사들은 ‘남을 돕기 위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가 오히려 그들로부터 더 큰 것을 받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대학시절, 학교 근처에 있던 삼육재활원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하며 장애우들을 위한 봉사를 했지만 제가 그들에게 줬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받았습니다.

2주전 토요일, 호주한국학교에서 작은 봉사의 자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화가로서의 재능기부를 했던 사단법인 한국카툰협회 조관제 회장도 ‘선물 같은 하루’였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당신이 가진 재능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는 부탁에 몇몇 곳에 연락을 취했고 호주한국학교 상선희 교장선생이 흔쾌히 그런 자리를 마련해줬습니다.

서른 일곱 명의 손주 뻘 되는 아이들과의 만남에서 초반 긴장하던 원로만화가는 이내 아이들과 그림 그리기 삼매경에 깊숙이 빠져들었습니다. 무심코 그린 동그라미가, 네모가, 마름모가 사람의 얼굴로 변하고 가만히 서있던 사람이 땀을 흘리며 바람을 일으키며 힘차게 달리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열심히 따라 그리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신기함과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고 놀랄 만큼 대단한, 기대 이상의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한국 만화계의 대가인 조관제 회장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아이들은 물 흐르듯 녹아 들고 있었던 겁니다.

어떤 아이들은 원로만화가의 가르침에 스스로의 창작을 더하기도 했고 아이들의 열성에 할배만화가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아이들과의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아이들 사이사이를 돌며 직접 그림을 손봐주기도 했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음 수업시간까지 침범(?)할 상황이 돼서 제가 슬그머니 다가가 언질을 주고 나서야 특별수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난 후에도 몇몇 아이들은 밖에까지 따라 나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원로만화가와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열정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들과의 뜨거운 만남은 원로만화가에게는 ‘선물 같은 하루’로 기억됐고 ‘다음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좀더 많은 준비를 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도 봉사 혹은 재능기부로 시작됐던 자리가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얻어가는 소중한 자리가 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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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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