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머무는 방

시카고 동생 집에 도착했다. 첫아이 결혼식이니 무조건 와야 된다는 동생의 으름장에 나와 남편은 호주에서 먼 길을 온 것이다. 동생은 내가 미처 가방을 풀기도 전에 먼저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손을 잡고 이층으로 안내했다.  나는 멀미가 나고 어지러워서 계단을 잡고 겨우 따라갔다. 동생은 계단 옆 방으로 들어가면서 이 방 이름이 ‘마음의 방’이라고 했다. 한국 사극 드라마에서 본 듯한 방 같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이른 햇살로 방은 차분하면서도 우아함이 느껴졌다.

방을 둘러보았다. 입구 맞은 편 벽에 ‘가화만사성’ 이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국회 별관에서 서예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아버지의 힘있는 필체가 보이니 정겹게 다가왔다. 벽에는 수를 놓아 만든 여섯 쪽 병풍이 둘러 있고 그 앞에는 공단으로 만든 전통 보료와 방석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료 위에는 곱게 접어 놓은 색동 이불이 보이고, 주물이 잔뜩 붙어 있는 반닫이도 보였다. 그 위에 나무를 깎아 만든 원앙 한 쌍과 한지로 만든 고풍스러운 등이 놓여 있었다. 사방탁자 위에 있는 청자 도자기는 청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칠 남매의 막내로 자라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기만 했던 동생은,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취업 이민이 되어서 미국으로 왔다. 혼자서 생활해야 하고, 눈만 뜨면 영어를 써야 하는 삶의 변화 속에 마음 끓이는 일이 많았다. 몇 달이 지나니 밥이 안 넘어 갈 정도로 지독한 향수병에 걸렸다. 돌아갈 수도 없어서 엄마가 챙겨준 이불을 덮고 울며 잤다. 어린 아이가 인형을 안고 다니듯이 그 이불을 안고 덮고 살면서 그리움을 달랬다. 누구나 살면서 외로움을 경험 하지만 타국 땅에서 혼자 살면서 겪는 동생의 외로움은 강도가 달랐을 것이다. ‘인간의 외로움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넘어야 할 파도 같은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일가 친척 하나도 없는 이국 땅에서 맨땅에 헤딩하면서도 그 파도를 잘 넘어온 동생이 인생의 선배 같았다.

동생은 고국의 향취가 나는 방을 갖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큰 집으로 이사한 동생은 따로 방을 하나 마련했다. 아버지 방에 있던 비슷한 보료를 사고, 안방 웃 목에 놓여 있던 엄마의 반닫이를 생각하면서 익숙한 것부터 구입했다. 아버지의 서예 작품으로 액자도 만들었다. 때때로 일터에서 힘이 빠지고 지칠 때 색동 이불을 덮고 보료위에 누우면 마음이 정리되고 편안해졌다. 요즘은 쉽게 결정하지 못할 일이 있을 때도 이 방에 온다고 했다.

결혼식 다음날, 마음의 방에서 폐백을 드렸다. 양가 가족과 친척들과 동네 이웃들이 모였다. 연세가 많은 시고모가 폐백음식을 해오시고 자청해서 수모(폐백을 진행하는 사람)가 되셨다.  폐백은 며느리가 시부모님과 그 가족에게 새 식구가 된 것을 인사로서 신고하는, 한국 전통 의식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보태었다. 신랑은 사모관대를, 신부는 원삼과 족두리를 썼다. 시중드는 모든 이들도 고운 한복을 입었다. 전통 혼례복을 입은 신랑 신부는 아름답고 화려했다. 미국인들은 열렬하게 환호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동생이 사준 한복을 입은 신부 어머니는 앉을 때 마다 치마를 번쩍 들어서 폭소가 터졌다.  절하는 연습을 했던 신부였지만 옆에서 부축해도 뒤로 넘어 지려고 해서 다들 웃으면서 재미있어 했다. 마지막에 신랑이 무거운 엄마를 업고 쩔쩔매며 방을 한 바퀴 돌 때에는 모두들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폐백을 끝내고 난 후, 동생은 와인과 폐백 음식을 제공하면서 마음의 방에 진열된 것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들은 매우 신기해하고 흥미롭다고 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돌아 가는 하객들에게 전통 혼례복을 입은 신랑 신부의 목각 인형을 선물했다. 한국에서 특별히 주문하여 공수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선물을 들어 올리며 “아름답다, 환상적이다”라면서 감사했다.

폐백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정성을 들인 동생이 대견했다. 동생은 외모가 화려하고 사고가 서양식에 가깝다. 한국인의 끈끈한 정보다는 절도와 선이 분명하다. 그런 동생이 한국 전통방을 꾸미고 전통 폐백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노란 머리로 염색한 동생이지만 한국의 얼이 내면 가득한 그녀는 역시 한국여자이다.

마음의 방에서 차를 마시며 동생이 말했다. “내가 떠나고, 다음 세대 또 그 다음세대가 할머니의 고향을 기억해 줄까?” 며느리도 미국인이고, 딸의 남자친구도 미국 사람이니, 동생은 생각이 많아 진 것 같다.  후손들이 자신들의 뿌리에 한국인 할머니가 있었음을 기억하길 원했다. 한국을 기억할 수 있는 뭔가를 후손들에게 남기도 싶다고 했다. 언니는 어떠냐 고 물었다. 형편이 비슷한 언니의 생각이 궁금한가 보다. 동생처럼 후손을 생각하는 구체적인 생각은 안 해 봤지만, 호주에 사는 나 에게도 숙제인 것은 틀림없다.

내가 살고 있는 호주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이다. 많은 민족과 더불어 살아 갈 후손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 주는 일은 소중한 일이다. 나는 손주들에게 한글을 배우게 하고, 고유 명절에 한복을 입혀서 세배하는 전통문화를 가르치고, 고국의 역사 탐방에도 적극 참여시키도록 한다. 우리 가정에서 이민 1세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전통과 문화가 없는 민족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사고가 고향을 떠난 유대인들의 뿌리였다고 한다.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 줄 수 있을까 더 고민 해야겠다.

동생은 가구도 더 사고 소품들을 더 들여와서 그 방을 한국 전통방으로 꾸미겠다고 한다. 친구들과 모여 차를 나누며 담소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손주들에게 할머니 나라의 문화를 보여주기도 하고, 일거 양득이라면서 행복하게 웃는다. 행복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생각이 머물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했다.

동생이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멋쟁이 할머니의 유산이 한민족의 뿌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글 / 이정순 (글무늬문학사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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