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수업을 마치고 친구랑 재잘거리며 대학 캠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보다 더 멋지게 보이는 그는 멋쩍게 서서 날 바라본다. 알맞게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에,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하얀 이와 함께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01_부부 사이의 관계는 참 이상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자석에 이끌리듯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를 만난 첫 순간, 모든 것이 멈추는 듯했고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한 사람뿐이었다.

듬직하면서도 왠지 내가 곁에 항상 있어야 할 것 같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사람… 그에게 난 그렇게 반해버렸고 우리는 마치 예정된 여정을 걸어가듯이 함께 인생길을 떠났다.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내리막길도 있었다.

“당신 정말 왜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트렁크 문을 열면 바로 나와서 도와줘야 되는 거 아냐?” 잔뜩 긴장하면서 일회용 장갑을 끼고 쇼핑을 마쳤던 터였다.

짐 한 가득 카트에 실어 트렁크를 여는 순간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남편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의 변명 같은 말대꾸에 짜증을 부리며 평소의 인내심과 배려는 어디론가 도망가버린 순간이었다.

나는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여유롭고 즐거웠던 쇼핑, 그 일상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지금에 와서 집밖을 나가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경계와 주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믿고 싶지 않은 어이없는 현실의 상황 속에서 이렇게 쉽게 내 자신이 내려지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일이다.

부부 사이의 관계는 참 이상하다. 사소한 것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이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다른 것들까지 도드라지게 나타나 상대방의 모든 것들이 불만으로 가득 차 보이게 된다.

 

02_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람 말귀는 왜 저렇게 못 알아먹지? 반응하는 속도가 너무도 느려. 노래는 왜 저렇게 부르는 거야? 박자와 가사도 못 맞추면서…’ 내가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이 한 순간 내 안에서 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하기야 마음 가는 대로 신경질을 부렸다가 기분 좋으면 곧바로 애교를 떨다가 하는 갈대같이 변덕스런 나에게 장단을 맞추느라 그도 참 혼돈스러웠을 것이다.

외국생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악조건을 앞세워 나는 그에게 참 많은 역할을 주문해왔다. 남편이자 연인, 친구, 보호자, 멘토 등등…. 그 동안 그도 나름 무던히 애를 써왔음을 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상실과 실패를 통해 비로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까이 있어준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집으로 돌아와 햇살 가득한 유리창 가에 앉으니 파란 하늘이 보인다. 바람결에 잔잔히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짙푸르다 못해 어둡게 비춰오는 저 먼 커다란 나무들.

바쁘게만 보냈던 일상이 멈춰지니 평소와는 다른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주 조그마한 작은 것들 그리고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들이 내 눈 앞에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아픔 속에서 성숙해져 가는 우리네 인생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그림 같았다.

 

03_그와 인연이 닿아 같이한 시간이 숫자로 세어보니 참 길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그 동안 미뤄왔던 헤어 컷을 해야겠다. 듬성듬성 희끄무레한 머리카락 사이로 정수리 살갗이 드러난다. 그 많던 검은 머리카락들이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남편 머리를 만지다 짠한 마음에 눈시울이 젖는다. 신혼 초부터 잘라주고 있으니 어느덧 벌써 30여년이 가고 있는 셈이다. 여태껏 그의 머리만큼은 자신 있어 하며 맞춤형 기술을 뽐내는 나를 그는 항상 칭찬해왔다.

그에게는 컷이 잘 나오고 못 나오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와 인연이 닿아 같이한 시간이 숫자로 세어보니 참 길다. 그런데 또한 그 세월들이 마치 한 순간처럼 느껴만 진다.

앞으로 운이 좋아 백세까지 살 수 있다면 같이 할 시간들 또한 찰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시공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할 수 있는 곳까지 함께 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나만의 욕심일 것이다.

이 사람을 평생 외롭지 않게,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다짐했던 잊고 있었던 그 옛 기억으로 오늘 난 다시 가슴이 설렌다.

 

 

글 / 송정아 (글벗세움 회원·Bathurst High 수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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