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기자나 PD 모집공고가 나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지원하는 족족 낙방이었다. 신춘문예는 대학생활 내내 도전했다. 그것도 딱 한번 예선 통과했고 계속 탈락이었다.
대학을 졸업했다. 희망의 졸업이 아니라 암담한 졸업이었다. 졸업하고도 기자와 PD에 도전했지만 여전한 낙방이었다. 나는 모든 것에서 부족한 나를 몰랐다. 나는 내가 대단한 줄 알았다.
결혼 전인 둘째 형님이 나 먼저 결혼할 것을 권유했다. 무직인 나에게 결혼하라는 것에 당황했다. 후에 알았지만 나를 그대로 놔두면 조직폭력배들과 어울릴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주머니 속에 먼지만 가득한 나를 기꺼이 따라왔다. 온갖 것이 부족한 단칸 셋방살이인데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녀 앞에서 떳떳하고 싶었다. 간장에 밥 비벼 먹으며 입사시험공부를 했다. 내겐 과분하고 벅찬 기자나 PD직을 내려놓고 일반회사로 눈을 돌렸다.
일반회사 시험문제는 기자시험에서 마주한 문제보다 쉬웠다. 그동안 기자직에 낙방할 때마다 찾아보고 익혀둔 문제도 큰 도움이 됐다. 운이 좋은 건지 수없이 낙방한 보답인지 수석으로 합격했다.
회사생활을 기획실로 발령받아 시작했다. 회사의 어젠다를 창출하고 기획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업무를 배웠다. 기안하는 절차와 평가하는 방법을 익혔다. 급여도 그만하면 만족했다. 회사생활이 즐거웠다. 비록 특근이 밥 먹듯 잦았지만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뿌듯했다.
첫아들이 태어났다. 둘째인 딸이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회사동료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딸아이를 인큐베이터에서 살려냈다. 퇴원시킨 날, 꿈틀대는 생명을 품에 안고 하늘을 우러러 나는 나의 아이들을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눕지 않고 날아야 했다. 살림살이는 단칸 셋방살이를 벗어나질 못했지만 조금 더 아끼고 모으면 삶이 나아질 것 같았다.
딸아이 돌 지나고 얼마 후, 그동안 힘들게 모은 몇 푼의 돈과 회사의 저렴한 이자 대출을 받아 방 두 칸 13평짜리 개봉동아파트를 매입했다. 비록 13평에 불과한 작은 아파트였지만 나는 흡족했다. 셋방살이가 아니었다. 작지만 나의 왕궁이었다. 작은 냉장고도 샀다. 냉장고에 음료수도 넣었다. 황홀했다.
기획실에 근무한지 4년이 지났다. 어느 날 결재서류를 찾으러 영업담당 상무실에 들어갔다. 상무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최 주임, 기획파트에만 있으면 시야가 좁아질 수 있어. 영업파트도 경험해봐야 좋을 거야.” 나는 “예, 상무님, 언제든 기회 주시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대답한지 보름도 안돼 나는 송도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흡사 전쟁터 같은 영업파트에서 힘든 5년여를 버텼다. 다시 본사 영업기획부로 발령받기까지 나는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배웠다.
회사생활 10년이 흐른 어느 날 나에게 현대해상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자기들이 찾는 기획파트와 영업파트를 모두 거친 과장급 안테나에 내가 걸려들었다고 했다. 점포관리부 과장으로 스카우트 돼 현대의 삼각배지를 달았다.
점포관리부 과장으로 재직한지 3년만에 차장으로 승진하면서 포항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포항지점장으로 재직 중일 때 아내는 장인이 남겨준 억대의 유산을 받았다.
아내는 받은 유산으로 서대문구 홍은동에 자리한 34평형 미성아파트를 내 이름으로 매입했다. 원당 23평아파트에 살던 우리에게는 대궐 못지않았다. 원당아파트를 팔아 회사대출금을 갚고 아내에게 승용차 소나타를 선물했다. 모든 어려움이 끝나고 눈부시고 찬란한 날들만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포항지점장을 시작으로 전주지점장을 거쳐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신설된 초대 서울강동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흔한 말로 내가 그렇게 승승장구해서 회사 중역이 될 것임을 스스로 믿었다.
그러나 인생은 한치 앞을 모르는 거였다. 나는 오만했다. 어느 날, 믿었던 측근의 제보로 업무추진비를 적정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감사를 받았다. 3개월 정직을 귀띔 받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옷을 벗었다.
하루 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아침이면 아파트 뒷산에 올라 바위등성이에 걸터앉아 출근하는 차량들은 내려다 보면서 방황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다녔지만 나에게 맡겨줄 마땅한 일자리는 없었다. 둘째 형과 셋째 형은 도와줄 테니 사업을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20여년을 직장생활만 한 나는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다 형들에게 손 내밀기도 부담스러웠다.
시드니에 사는 처제가 호주로 이민을 권유했다. 이민은 현실도피라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많은 고민 끝에 호주로 이민을 결심했다. 이민대행업소 여직원이 체크하더니 호주가 요구하는 이민점수가 모자란다고 했다. 호주는 이과 졸업한 사람에게는 점수를 주지만 문과 졸업한 사람에게는 점수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호주 이민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나에게 여직원이 그랬다. “뉴질랜드로 가세요. 거기에서 3년 살면 호주 갈 수 있어요.” 그러면서 뉴질랜드는 문과 졸업생도 점수를 준다고 했다. 내 점수는 뉴질랜드 이민점수에는 맞았다. 한 여직원이 내 인생을 바꿨다.
뉴질랜드 이민을 결정하고 어머니에게 해외지점으로 발령 받았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어머니는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다. 내 두 손을 붙잡고 “다 안다. 가서 새끼들 데리고 잘 살아라”며 눈물을 훔쳤다. 나는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울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