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이 비치

시드니의 삶은 내가 그 바다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게 했다.

엎드리면 코 닿는 곳. 하지만 늘 스치며 지나가야 했던 곳이었다.

낭만이나 자유는 젊은이들의 소유물처럼 한없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시작한 우버 손님이 이곳을 향하지 않았다면, 난 결코 이곳에 올 일이 없었을 지도 몰랐다.

 

꿈을 꾸었다.

바다를 끼고 늘어선 파란 하늘 위로 앙증맞게 펼쳐진 인형 같은 집. 하얀색, 빨간색. 대체 저 곳엔 누가 살까?

동화 속에 홀연히 떨어진 새내기 청년에게는 모든 게 신기했다.

하늘에 떠다니는 솜구름도 그랬고, 낯선 서양인도, 날아가는 새도 그랬다.

해변을 따라 달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잡으러 쫓아오는 끝없는 파도들.

내가 숨을 할딱이며 모래밭에 누워버리자 재미가 없다는 듯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그 파도.

본다이 비치는 사랑과 낭만, 자유 그리고 추억의 산 증인 이였다.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그 바다는 한때 우리에게도 꿈과 희망이었다.

 

‘다들 어디 간 거야? 돌아와… 제발!’

40년 만에 돌아온 바다에서 난 홀로 울고 있었다.

올해 사랑하는 가족들이 또다시 줄줄이 떠나갔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하나, 둘, 셋… 호주에 살면서 7명의 식구들을 눈앞에서 보낸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렇지… 나만 남겨놓고…’

분한 마음이 치올라 바다만 바라보며 서럽게 울었다.

삶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요했던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부모도 가족도 모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

동생을 잃은 나에게 형이고 친구이고 아버지 같았던 매부. 나는 그의 말을 더 듣기보다 내 말을 더 많이 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나의 말을 몇 시간이고 앉아 들어주던 분.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코로나를 핑계로 조문도 오지 않았다.

이민생활의 화려한 삶에 비해 초라하고 쓸쓸한 장례였다.

“Dear Friends,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어제 그가 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 동안 그이의 친구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는 여러분들의 사랑을 잊지 않을 거예요….”

비통해하며 힘겹게 쓴 누나의 메시지를 아파트단지 초입에 붙이면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수평선너머 먼 바다에서 나즈막이 ‘대니 보이’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즐겨 불렀던 그 색소폰 소리가 파도에 실려 너풀너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이 음악에 색소폰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가 들어있다고 했다.

하지만 난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냥 슬픈 곡이었다. 서럽고 슬픈 곡.

 

오! 대니 보이!

당신의 숨소리 음악소리가 바람에 들려오고 있어요.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고 파란 봄이 오면 꼭 오실 거죠?

난 그때까지 여기에 앉아 있을 게요. 떠날 수가 없어요.

저 파도에서 자꾸 소리가 나요.

 

매운바람이 불었다. 뉘엿뉘엿 본다이 비치에 어둠이 내려앉고, 휘황찬란한 네온 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여기저기 낭만의 젊은이들이 동화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글 / 마이클 박 (글벗세움문학회·회장)

 

 

 

Previous article주택 구입 시 유의해야 할 점들
Next article소금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