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 아빠보다 낫다! 3만 3천여 관중들이 ‘차두리! 차두리!’를 연호하는
가운데 차두리는 연신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평소 ‘눈물이
없는 선수’로 알려진 그였지만 14년만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는 자리에서는 더 이상의 자제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차범근이 건네준 꽃다발을 받아 든 차두리는 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더 이상 울음을 참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와 아들이 몸으로 주고받았을 대화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 차두리가
태극마크를 반납했습니다. 슈틸리케 감독이 차두리를 뉴질랜드전 전반만을 뛰게 한 후 하프타임을 이용해
그의 은퇴식을 마련해줬고 ‘차두리 고마워’라고 쓰인 피켓을
든 수많은 팬들은 그렇게 차두리와 마지막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제가 한 것 이상으로 많은 분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잘 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열심히 하려고 애쓴 선수였습니다. 그걸
여러분이 조금 알아주신 것 같아 행복하게 대표팀 유니폼을 벗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1년 11월, 세네갈과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차두리는 당시 대표선수로서보다는
‘차붐’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면에서 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축구 하는 내내 아버지의 명성에 도전했습니다. 아버지보다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축구를 잘하는, 그래서 아무리 잘해도 근처에 갈 수 없는 아버지를 뒀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닮고 싶은 롤모델로 삼았던 게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선수로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고 가장 알맞게 지시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어 큰 축복이었습니다.” 차두리의 엄마도 언제부터인가 “차범근의
아내보다는 두리 엄마로 불리기를 더 바란다”고 했고 차범근도 “이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꼬마들에게 ‘내가 차두리 아빠다’라고 스스로 소개한다”고 고백한 것으로 볼 때
차두리는 비록 아버지를 뛰어넘진 못했다 할지라도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차범근은 좋겠다.” 차두리의
은퇴식을 지켜보며 제가 혼잣말처럼 되뇐 이야기에 아내가 답했습니다. “자기한테는 선영이가 있잖아.” 딸아이는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저와 함께 더 좋은 <코리아타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정식 기자생활을 해본 적이 없음에도 제법 그 일을 잘해내는 딸아이를 향해 주변사람들은 “그 피가 어디 가겠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오빠를 대신해 아빠 곁을 바짝 지키고 있는 딸아이는 입사경력 11년차가 됐고 회사업무 전반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딸아이를
향해 저는 가끔씩 호된 질책을 합니다. ‘아빠보다 나아야 한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차범근 차두리 부자처럼
‘딸아이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알맞게 지시해줄 수 있는 아빠’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차두리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대표팀을 떠났습니다. 그는 올해 11월까지
K리그에서 뛰고 현역에서 은퇴, 독일로 건너가 지도자자격증을
딸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차범근도 “두리는 나보다 훨씬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다. 지도자도 잘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선수로서는 아버지가 ‘넘사벽’이었지만 지도자로서는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해봅니다. 선수시절 벤치의 설움, 2부리그로의
강등 등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차두리로서는 이 모든 것들을 자산으로 또 한번의 도약을 이뤄낼 것입니다. 차두리의
모발폰 카톡 문패에 달린 독일어 문구가 그의 이 같은 각오를 보여줍니다. Meine beste zeit
kommt noch. 내 최고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 김태선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