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2

제목그래도 행복입니다 #7792022-07-23 21:23

그래도 행복입니다

 

이러다 우리 서로 늙어서 못 알아보는 거 아니에요?” 며칠 전 이스트우드 알디(ALDI)에서 만난 여자후배가 웃으면서 건넨 이야기입니다.

 

10년 넘게 같은 시드니에,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함께 밥을 먹거나 한 경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냥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적이 몇 번 더 있기는 하지만….

 

그날도 우연한 만남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쇼핑을 마치고 계산대에 줄을 서 있는데 그 후배가 먼저 저를 알아본 겁니다.

 

우리는 25년 전 한국 여성지 <여원>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 후배는 편집디자이너, 저는 기자의 신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20대의 싱그러운 나이였고 저는 30대의 넘치는 에너지를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서로의 눈앞에는 낯 모를 중늙은이(?) 둘이 마주 서있는 겁니다.

 

언제 시드니 오면 연락해요.” 그날도 저는 그 후배와 헤어지면서 예의 그 농담을 건넸습니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 더군다나 같은 업종에서 일을 하면서도 가뭄에 콩 나듯 만나는 미안함을 대신한 이야기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저도 살짝 바람(?)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요 며칠만 잘 넘기면 방학 동안 머리를 좀 길러볼 수 있겠다싶어 버티고 있었는데 생활지도주임 선생님이 바리캉을 들고 교실을 급습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아이들의 앞머리에는 이른바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렸습니다. 겨울방학이 바로 코앞인데 정말 통탄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깎여나간 앞머리 주변을 대충 옆으로 문지르자 바리캉이 지나간 자리가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선생님이 바리캉을 깊게 대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머리 숱이 워낙 많았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제가 갖고 있는 심각한 고민 중 하나입니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무성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캠퍼스를 뛰어다녔고 안경 같은 건 아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직업을 잘못 택한 탓도 있겠습니다. 기자생활을 시작한 몇 년 뒤부터 머리카락도 조금씩 빠지고 안경도 쓰게 됐던 것 같습니다. 세월의 흐름도 있겠지만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게 참 무서운 모양입니다.

 

선천적으로 건강을 타고나서 병원과는 별로 친하지 않던 제가 이제는 의사들과도 친하게(?) 지냅니다. 몸에 아부를 하며 살아야 할 군번(?)이 돼서인지 GP선생님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필요할 때면 스페셜닥터도 만납니다.

 

옛날에는 취재 때문에 의사들과 밀접하게 지냈지만 이제는 제 몸 관리를 위해 의사들과 가깝게 지내는 겁니다.

 

그래도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살아간다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해.” 매사에 초 긍정적 마인드를 가진 아내가 머리카락 때문에 투덜대는 저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백 번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머리카락 숫자만큼 저에게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재산으로 늘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산행도, 운동도 더 열심히 해서 배도 좀더 집어넣고 머리카락 관리도 잘 해야겠습니다. 몇 년 후 그 후배를 다시 만났을 때 서로 못 알아보는 일은 없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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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 10 1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