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으로 새해를 맞다

시드니에 사는 딸내미와 이따금 통화하는 내용이다.

“아부지, 이번 주 아부지 글 너무 좋아요.”

“그래? 근데 넌 맨날 좋다고만 하니까 정말 좋은 건지 모르겠다.”

“아니야. 여기 교민사회에서 아부지 글 진짜 인기 짱이야.”

그리곤 서로 소리 내어 웃는다.

나는 2019년 3월부터 시드니에서 매주 발행되는 대형주간지 <코리아타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딸내미는 칼럼을 읽고 제 나름대로의 느낌을 전해준다.

딸내미는 시드니 교민들의 평판이라고 하지만 그건 딸내미가 바라는 희망사항일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어쩌면 툭하면 글쓰기가 버겁다고 푸념하는 늙은 애비를 다독이려고 허풍을 떠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쓰는 글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과연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주조 (主潮)처럼 똑바로 살고 있는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주장처럼 곧은 사람인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사조 (思潮)처럼 나눔의 사람인가? 나는 어린 왕자의 가면을 둘러쓴 가증스러운 위선자는 아닌가? 나는 진실로 글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나는 글쟁이가 아니다. 쟁이라 하면 흔히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통용되지만 본래는 전문가라는 뜻이 담겨있다. 지금 내가 나에 대해 ‘글쟁이가 아니다’라는 의미는 글 쓰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때는 글쓰기를 밥벌이 수단으로 삼아보려 했지만 진작에 포기했다. 그냥 글쓰기를 좋아할 뿐이다.

나는 ‘문학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기초적인 문장구성, 문학개론 정도 외에는 전문적인 문학공부를 해보지 못했다. 그나마 문학의 형태, 글 쓰기의 본질, 이런 것들은 책을 통하고 수준 높은 문학인 지식인의 강론을 통하여 배우고 익힌 것들이다.

내가 배우고 익힌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글은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하는 사상이 농축된 표현’이다. 획일적이고 도식적인 귀걸이 목걸이 같은 장식품으로 치장하고 미사여구를 내세우는 세속적인 표현이 아니란 뜻이다.

대하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는 글 쓰는 것은 한 인간, 한 시대의 한(恨) 풀이라고 했다. ‘한’은 미래지향적이다.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글쓰기의 본질 중 하나다. 나는 이런 글쓰기의 본질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글나부랭이’를 자랑하는 얼치기는 아닌지 두렵다.

뉴질랜드 교민언론은 게재하는 글나부랭이에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는다. 민망하지만 글나부랭이에 원고료를 주면서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할 형편이나 수준이 못 된다. 원고료는 고사하고 실어주면 영광이라는 분위기다. 내가 늘 씨부렁거리는 고국의 작은 동네 같은 곳에서 우쭐대는 교민언론의 수준이겠지만, 예전에 글하나 실어주고 술 얻어 처먹는 발행인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글 쓰는 걸 고심하지 않고, 비판도 고발도 주장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무슨 글 장난하듯 넋두리 푸념을 글이라고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대로 된 언론 같으면 이게 글이냐? 글쓰기 기초이론부터 배우라고 지청구를 들어도 싼 글나부랭이를 대문짝 만하게 실어주니 내가 정말 글쟁이나 된 듯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두렵다.

교민언론에 이름이 실리고 얼굴이 나오니 대단한 글쟁이나 된 듯 허공을 헤매고 다니는 그런 얼치기가 되어 글 쓰는걸 놓지 못하고 있는 건가?

나는 글나부랭이를 쓰고 나면 수도 없이 되풀이 읽는다. 읽고 또 읽으면서 낱말 하나하나를 두드려본다. 그런 후 잡지사나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면 다시 읽지 않는다. 편집장이 파일을 보내주면 그제서야 한번 훑어본다. 또다시 읽기가 겁나고 두렵기 때문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내가 쓴 글나부랭이가 선택적 정의, 선택적 진실, 선택적 분노는 아닌지, 실력도 없고 실속도 없으면서 불필요한 허세를 부린다는 허장성세 (虛張聲勢)는 아닌지, 속은 텅 비었는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잘 꾸민다는 내허외식 (內虛外飾)은 아닌지 하는 거다.

외모가 곱다던 한때의 모습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어리석음 때문에 거울 한번 들여다볼 줄 모르는 마귀할멈의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아 두렵다. 나르시시즘에 젖은 자기도취와 자만을 보게 될 것 같아 두렵다.

새해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끊임없는 발상의 전환을 생각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주저하지 않고 손가락질하는 아이처럼 살아야겠다. 그렇게 투명하고 가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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