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풍경화의 선구자 존 컨스터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성, 독자적 시선으로 묘사, 생명력 풍부한 작품 남겨

존 컨스터블 (John Constable 1776년-1837년)은 윌리엄 터너와 함께 근대 풍경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영국이 낳은 위대한 풍경화가이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독자적인 시선으로 묘사해 기존의 풍경화와는 달리 생명력이 풍부한 작품들을 남겼다.

 

01_야외에서 직접 자연과 대면해 작업한 최초의 화가

건초 수레 1821년, 유화

항상 현장에 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 고요한 호수와 우거진 숲 그리고 그 속에서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를 화폭에 담아내었다.

그 안에는 화가가 느낀 감정이 그대로 살아 숨쉬어 가히 낭만주의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평생 자신이 자라난 시골의 풍경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내 마침내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풍경화가로 우뚝 섰다.

컨스터블은 영국을 사랑하고 영국의 풍광을 세계에 알린 화가였지만 살아 생전 고국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예술의 본고장인 파리의 화단에서 그의 진가를 알아보아 해외에서 먼저 이름을 떨쳤다.

그는 인상파 이전에 야외에서 직접 자연과 대면해 작업을 한 최초의 화가였고, 그의 화풍은 들라크루아를 비롯해 인상파와 바르비종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02_거장들 화풍 답습 벗어나 야외로 나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곡물밭 1826년, 유화

컨스터블은 1776년 영국 동부 서포크의 이스트 버골트라는 시골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집안은 제분소를 경영하고 곡물을 거래하는 부유한 지주 집안이었다.

이 지역은 영국의 전형적인 시골마을로 오두막, 농장, 방앗간들이 오솔길을 따라 드문드문 서있고, 넓은 평야와 울창한 수목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극명한 온도 차이로 다양한 날씨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주변환경은 후에 그의 예술혼을 일깨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업을 잇기를 원했지만, 어릴 때부터 미술에 심취했던 컨스터블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컨스터블은 22세에 런던으로 가 왕립아카데미에 입학해 티치아노, 루벤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수년간 그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탐구하였지만, 그의 창작욕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거장들의 화풍을 답습하는 데서 벗어나 야외로 나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관찰한 경험에 의한 순수한 자연 그 자체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매년 여름 서포크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자란 마을의 초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자연과 직접 대면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 그에 따른 분위기의 흐름을 관찰해 화폭에 옮겼다.

1802년작 ‘숲’은 스토리가 아닌 자연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숲이 살아 숨쉰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생생하게 그려졌다. 붉은 흙과 진한 녹색의 나무들은 그 대조되는 색으로 더욱 강력하게 존재감을 드러내, 숨을 들여 마시면 나무가 뿜어내는 충만한 생명력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03_영국사람들에게 그의 풍경화는 외면 당해

숲 1802년, 유화

그가 태어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대부분 고전주의 미술의 역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풍경화의 위치는 인물화, 정물화의 뒤에 존재했다. 당시의 풍경화는 실제의 풍경이라기 보다는 정형화된 패턴에 의한 관습적인 화풍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대두로 변화하는 미술계의 중심에 윌리엄 터너와 존 컨스터블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전주의의 딱딱한 형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직관이나 감성에 의지한 자유로운 화풍으로 자연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표현했다는 점에선 유사하지만, 터너의 자유분방한 화법과 격동적인 감정 표현에 비해 컨스터블의 그것은 조용하고 안온한 감정의 표현이란 점에서 서로 동과 정의 대치를 이룬다.

컨스터블은 그가 사랑했던 고향 서포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내면의 감성을 담아 표현해내었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따스한 시선으로 화폭에 옮긴 그의 풍경화에는 진정성 있는 영국의 풍경이 담겨 있다. 그러나 관습에 의해 그려진 풍경에 익숙해진 영국사람들에게 그의 풍경화는 외면을 받았다.

아직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는 그들은 새로운 보석을 알아보지 못했다. 영국인들이 윌리엄 터너나 존 컨스터블의 위대한 낭만주의 걸작들을 좀더 일찍 알아보았다면 유럽 미술의 메카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04_1816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행복한 한 해

위븐호 공원, 에섹스 1816년, 유화

1816년은 컨스터블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행복한 한 해였던 것 같다. 첫째는 그의 영원한 연인이자 아내가 될 마리아 비크넬과 7년간이나 이어온 비밀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컨스터블은 그녀의 외할아버지 집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청초한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엄격하고 유서 깊은 가문으로, 12살이나 차이 나는 나이 많은 화가의 사랑은 용납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구애에 마리아도 그에게 마음을 열고 가족들 몰래 사랑을 키워가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 7년이란 세월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길고 괴로운 여정이었지만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그의 후원자의 주문을 받아 ‘위븐호 공원, 에섹스’라는 작품을 완성시킨 것이다. 현재 미국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한가로운 전원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 차있는 작품으로, 마치 사진으로 보는 것 같이 세밀하게 묘사된 디테일이 살아있는 명작이다.

반짝이는 햇살이 비추는 넓은 초원이 보이고, 호수에는 나무들 그림자 사이로 반사된 구름이 아른거린다. 잔잔한 수면 위에선 백조들이 노닌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의 울창한 숲,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가득하고 들판에선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다. 이 모든 것은 한데 어우러져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선물하고 있다.

 

05_‘흰색 말’로 로얄아카데미 회원 선출

입스위치 근교 오르웰의 선박 1809년, 유화

컨스터블의 대표작은 거의 모두 그의 결혼 후에 제작되었다. 30대의 대부분을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갈망으로 보낸 그는 부모를 잃은 슬픔과 작품에서 인정받지 못한 괴로움을 모두 뒤로 하고, 안정된 결혼생활에서 다시금 창작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1819년작 ‘흰색 말’은 그의 예술활동에 터닝 포인트가 되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항상 오가며 보아왔던 친숙한 스투어 강의 수로를 건너는 거룻배에 실려가는 흰 말을 그린 이 작품은 워낙 6피트에 달하는 대작이라, 그가 런던에서 머무는 동안 고향에 내려가 틈틈이 스케치를 해 런던의 화실에서 완성을 하였다.

작품의 중앙 부분에는 스투어 강변의 늪지에 조성된 오래된 마을의 정경이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 울창한 나무 밑에는 거룻배에 탄 하얀 말이 보이고, 중앙에는 농가들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감 있는 풍경과 잔잔한 수면 아래 움막과 나무들의 그림자가 반사되고 있다.

오른쪽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소와 물을 마시는 개가 보인다. 1.8미터에 달하는 긴 화면 전체에 담긴 농촌의 정취가 따스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로얄전시회에 출품을 해 좋은 반응을 얻고 이로 인해 로얄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 되었다.

 

06_야외에서 작업한 최초의 화가

초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1831년, 유화

아마도 컨스터블은 야외에서 작업을 한 최초의 화가였을 것이다. 다른 화가들이 야외에서 간단한 스케치를 하고 모든 작업을 자신의 아뜰리에에서 한 반면, 그는 연필이나 수채화 스케치뿐만 아니라 직접 유화물감으로 스케치를 하였다.

때로는 완성된 사이즈와 똑같은 사이즈의 스케치를 야외에서 해 현장감을 살렸다. 대작의 경우에는 부분부분을 나누어 그리고 화실에서 이어 붙여, 실제 완성작과 똑같은 사이즈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가 현장에서 느낀 것과 똑같은 감정을 화면에 담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1819년 여름부터 햄스테드에 머물며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 특히 하늘과 구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컨스터블은 “하늘은 자연에 있는 빛의 근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말하며, 시간과 계절, 날씨에 따라 변화하는 구름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구름의 모양이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기상학을 연구하고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 구름을 분석하고, 구름을 주제로 한 연작을 그렸다. 그 중 하나인 ‘폭풍우 치는 석양’ (1821년-1822년)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의 해질녘을 표현한 그림으로 하늘에서 거친 바람을 타고 뭉게뭉게 퍼져나가는 검은 구름과 멀리 보이는 흰구름 사이로 노을 빛이 새어 나오는 장관을 거침없는 붓 놀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07_프랑스 화단서 인정 받고 단숨에 유명인사로

콘휠드의 오두막 1817년, 유화

전형적인 영국의 시골풍경을 그린 1821년작 ‘건초 수레’는 그 생생하고 세밀한 묘사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작품의 왼쪽에는 커다란 나무들과 붉은 지붕의 하얀 농가가 보인다. 자세히 보면 농가의 낡은 벽에는 벗겨진 회벽 사이로 벽돌이 보이고 집 앞에는 구불대는 꽃나무가 서있다. 쓰러져가는 울타리와 집 앞의 나루터에서 빨래를 하는 소녀, 강변을 어슬렁거리는 개 등 디테일이 너무도 섬세해 우리가 그 현장에 있는 것만 같다.

농가의 바로 앞 스투어 강 위에는 물에 발 부분이 잠긴 말들과 건초 수레가 있다. 수레에 탄 아버지와 아들이 보이고, 저 멀리 농부들은 열심히 건초를 묶고 있다. 한낮의 일상은 그들을 둘러싼 아름다운 나무들과 들판 저너머로 보이는 숲, 그리고 푸른 하늘에 떠있는 하얀 뭉게구름과 어우러져 완벽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낸다.

특히 작품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면적의 하늘과 구름은 너무도 리얼해 구름의 화가라 불리는 컨스터블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들라크루아가 이 작품의 하늘색을 보고 감명을 받아 자신의 작품 ‘키오스 섬의 학살’의 색을 수정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이 작품은 1821년 아카데미전시회에 출품하였지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 작품을 알아본 프랑스인이 그림을 사서 1824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을 하였다. 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컨스터블은 예술의 본고장인 프랑스 화단에서 인정을 받고 무명화가에서 단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08_녹색 가장 잘 쓰는 화가

폭풍우 치는 석양 1822년, 유화

1826년에 그려진 ‘곡물밭’은 녹색을 가장 잘 쓰는 화가로 알려진 컨스터블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울창한 수목들 사이로 난 오솔길에 양치기 개가 양떼를 몰고 간다. 양치기 소년은 길 옆의 샘물에 엎드려 물을 마시고 있다. 저 멀리 곡물 밭에서 농부들이 쟁기를 들고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들판의 밝고 시원한 색상이 좌우의 어두운 색상의 나무들과 대조되어 시선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보다 선명한 느낌을 자아낸다.

왼쪽의 수직으로 뻗어나간 나무들과 그보다 키가 작은 오른쪽의 나무들은 오솔길을 감싸 일종의 터널 효과를 만든다. 강물과 밭 사이의 대각선은 우리의 눈을 탁 트인 들판으로 인도하고, 시선을 올리면 구름으로 가득 찬 광대한 하늘이 보인다. 이러한 대각선의 구도는 풍경의 원근감을 확실하게 하여 입체감을 보여주어 우리로 하여금 탐스런 잎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의 오솔길에 서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09_솔즈베리대성당 아름다움에 매료, 여러 점의 작품을

하얀 말 1819년, 유화

영국 남서부 솔즈베리에 위치한 솔즈베리대성당은 123미터의 높은 첨탑으로 유명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컨스터블은 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러 점의 작품들을 남겼다. 1825년작 ‘주교의 정원에서 본 솔즈베리대성당’은 이 성당의 주교인 존 피셔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

작품의 양쪽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녹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무성한 잎에 싸여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아름다운 흰색 대성당이 보인다. 중앙에 자리잡은 성당의 뾰족한 첨탑은 구름이 떠도는 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다. 밑부분에는 나무들 그림자 사이로 한가로운 일상의 정경이 펼쳐진다. 종교적인 성스러움과 일상의 평화로움이 합쳐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1931년작 ‘초원에서 본 솔즈베리대성당’은 깊은 절망감 속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대작이다. 작품의 왼쪽 아래에는 강을 건너는 말들과 마차가 서있고, 그 뒤로 푸른 잎이 울창한 거목이 서있는데, 조금 떨어진 작품 중앙 쪽으로 솔즈베리대성당이 보인다. 강은 멀리까지 뻗어 들판과 숲에 연결되고, 구름으로 뒤덮인 넓은 하늘 위에 무지개가 떠있다.

왼쪽 하늘에서 시작해 솔즈베리대성당 위를 거쳐 건너편 숲에 이르는 둥근 아치 형태의 무지개는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에 무지개가 걸쳐짐으로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10_“해외에서 부자 되느니 영국에서 가난한 자가 되겠다”

햄스티드의 브랜치 힐 연못 1819년, 유화

화가는 3년 전에 아내 마리아를 잃고 커다란 상실감에 빠졌다. 7자녀를 낳으며 항상 허약했던 아내가 이른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식들과 홀로 남겨진 그의 아픔과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초원에서 본 솔즈베리대성당’은 긴 세월의 고통 끝에 운명과 화해하게 된 그의 마음이 담긴 작품인 것 같다.

왼쪽과 아랫쪽으로 보여지는 풍경은 고통을 머금은 그의 심경 같이 장중한 미를 띄우고 있지만, 무지개 위로 보이는 오른쪽 하늘은 용서와 화해, 미래의 희망이라는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컨스터블 평생의 화력을 쏟아 부은 듯 완벽한 구도와 세심한 디테일의 묘사로 우리의 마음을 웅장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큰 악습은 진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인 예술적 기교이다”라는 말대로 그는 인위적인 기교를 뛰어넘어 오로지 눈에 보이는 자연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 자연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컨스터블은 영국에서는 평생 작품을 20점 밖에 팔지 못했지만, 파리에서는 몇 년 사이에 많은 작품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는 파리에서 국제적으로 작품을 프로모트 하려는 러브 콜을 “나는 해외에서 부자가 되느니, 영국에서 가난한 자가 되겠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고향과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드러나는 행보이다. 그는 1837년 61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런던에서 사망해 평생 사랑했던 아내의 곁에 묻혔다.

 

* 다음에는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거장 프랑수아 부셰의 우아하고도 관능적인 작품들과 만나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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