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화가 렘브란트

네덜란드 황금기 대표하는 바로크 양식의 대가,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다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1606년-1669년)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가이다. 그는 빛과 어둠을 통해 신과 인간과 사회와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정서를 표현했다.

 

01_어둠으로 감싸인 화면 속에 대상만 강렬한 빛으로 표현

63세의 자화상, 1669년, 유화

그는 전체적으로 어둠으로 감싸인 화면 속에 오로지 대상만을 강렬한 빛으로 표현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창출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작품 속에 깊이와 입체감을 살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주제를 확연히 떠오르게 하여 ‘렘브란트의 빛’으로 불리며 렘브란트 예술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유화 600여점, 에칭 300여점, 드로잉 1000 여점을 남겼는데, 그가 젊었을 때 그린 조그만 자화상이 224억원에 팔릴 정도로 작품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그는 “그에게는 붓과 기교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묘사력과 예술성을 지닌 네덜란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바로크 양식의 대가이자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화가이다.

 

02_화가로서 밀려드는 주문에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예를

갈릴리 해 폭풍 속의 그리스도, 1633년, 유화

렘브란트는 1606년 암스텔담 근교 레이던에서 제분업을 하는 집안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보다는 그림에 재능을 나타내 일찍이 화가로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다.

역사화가 야코프 스바넨부르크 밑에서 3년간의 도제생활을 한 후 암스텔담으로 가 역시 유명한 역사화가인 페테르 라스트만 밑에서 도제생활을 하며 회화기술을 습득했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공방을 열고 많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렘브란트가 태어난 1606년은 1588년 설립된 네덜란드 공화국이 한창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이다. 무역과 상업으로 부를 쌓은 네덜란드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예술과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꽃피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와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 그들을 빛내줄 초상화를 거실에 걸기 시작했다. 렘브란트의 정교한 묘사로 인물의 특징을 살리고, 빛과 어둠의 대비로 인물의 포커스를 맞추는 화법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화가로서의 렘브란트 역시 밀려드는 주문에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03_빛과 어둠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

귀걸이를 다는 젊은 여인, 1657년, 유화

1632년 암스텔담 의사조합의 의뢰로 그려진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렘브란트가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이다. 외과의사들이 해부를 하며 수업을 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가운데에는 시신이 누워있고 툴프 박사가 한 손에 메스를 들고 갈라진 팔의 근육을 집어내 자신의 손의 움직임과 비교하며 근육의 메카니즘을 강의하고 있다. 7명의 외과의들은 모두 시체와 박사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밝은 조명을 받은 시신을 중심으로 7명의 얼굴들이 심각한 얼굴로 경청하고 있는 모습은 그 시대 집단 초상화의 정석처럼 균일한 크기와 시체의 방향으로 집중된 시선을 보여준다.

이 초상화의 주연을 맡고 있는 시신과 붉게 드러난 근육들, 설명을 하고 있는 박사의 손은 뚜렷한 명암의 대비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켜 그를 빛과 어둠의 화가라고 불리게 만든 명암의 테크닉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이 기법은 키아로스쿠로 기법으로 렘브란트 작품 곳곳에서 존재감을 뽐내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수업을 듣는 인물들 각각의 얼굴 표정은 검은 옷 위로 드러난 목을 둘러싼 흰색의 러플 위에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의 ‘야경’에서 보여지는 인물간의 자연스러운 동작의 연결이나 포즈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현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잘 그려진 17세기 초상화의 유형 안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을 찾아 그린 것 같고, 그의 뛰어난 묘사력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감동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04_아내가 고통 받는 동안 사치와 소비로 재산 탕진, 방탕한 생활

그리스도의 매장, 1639년, 유화

렘브란트는 1631년 25세가 되는 해, 사스키아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돈 많은 귀족의 자녀였던 그녀에게 빠진 그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열렬히 구애하여 1633년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다. 그녀와의 결혼으로 렘브란트는 상류사회에 진입하여 교류를 넓혔고, 많은 상류층 인사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34세의 자화상’ (1640년)에는 30대 초반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들어 성공과 부에 취한 젊은 날의 렘브란트의 모습이 담겨있다. 렘브란트는 값비싼 모자와 옷을 걸치고 난간에 기대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면을 향한 그의 눈동자는 자신감으로 반짝이고, 표정은 잔뜩 위엄을 갖춘 귀족의 그것처럼 근엄하다. 털로 장식된 옷깃이나 원단의 고급스러움을 실물처럼 자세하게 그려 그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묘사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한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행복을 구가하는 동안 사스키아는 여러 번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들을 잃어야만 하는 불행을 겪었다. 아내가 고통 받는 동안 렘브란트는 분에 맞지 않는 사치와 소비로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티투스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사스키아의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05_성서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 그려

그리스도의 승천, 1636년, 유화

바로크 시대의 거의 모든 화가가 그랬듯이 렘브란트도 성서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을 그렸다. 1628년작 ‘논쟁 중인 두 노인’은 베드로와 바울이 안티옥에서 할례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의 상반되는 견해 때문에 많은 논쟁을 하였다고 한다. 작품에서 베드로와 바울은 흑과 백으로 표현된다. 중앙에서 환하게 빛나는 백의의 노인은 바울이고, 등을 돌리고 어둠 속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는 베드로이다.

이성과 학문으로 무장한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눈을 맞추고 손가락으로 성경을 짚으며, 그가 생각하는 바를 조목조목 피력하고 있다. 반면에 베드로는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묵묵히 듣고 있지만, 성경 속에 손가락을 끼워 다음으로 논쟁에 반박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22살의 어린 나이에 이토록 두 사람의 개성과 주제를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작품이다.

또한 ‘갈릴리 해 폭풍 속의 그리스도’ (1633년)는 폭풍우 속에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오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잠자고 있는 예수를 깨운다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돛대를 붙들고 폭풍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빛을 몰아주었다. 왼쪽과 오른쪽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빛과 어둠의 대조로 역동하는 자연의 꿈틀거림이 더욱 극적으로 강조되어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듯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된다.

왼쪽에는 바닷물이 포말을 뱉으며 쳐들어 오지만 예수님이 함께 있는 오른쪽에는 고요와 평안한 느낌이 있다. 렘브란트의 신앙심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06_낮은 곳으로 임하는 인간적인 그리스도 모습 표현

논쟁 중인 두 노인, 1628년, 유화

렘브란트는 1633년부터 1649년에 걸쳐 네덜란드 총통의 주문으로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을 그렸다. 그 중 한 작품인 1634년작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아마도 렘브란트의 신앙관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주제는 루벤스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작품으로 남겼지만, 렘브란트가 다른 화가들과 다른 점은 그리스도를 영웅의 모습으로 이상화 시키지 않고 학대 받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예수의 육체적인 모습이 고통을 받은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지기를 바랐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팔 밑으로 축 늘어진 채 시신을 내리는 제자의 품에 기묘한 각도로 안겨있다.  빛은 내려지는 예수와 제자를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둠에 잠겨 가느다란 윤곽선만이 빛을 반사하고 있다.

삼각형의 구도로 높이 솟아있는 십자가와 그 밑에는 늘어선 군중들이 있다. 왼쪽 사다리 아래에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애도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보이고, 발치에는 여인들이 수의를 펼치고 있다. 비극적이고도 장엄한 장면을 영웅적인 희생의 장면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뒤로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연약한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07_그 시대, 그 곳에 있는 듯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돌아온 탕아, 1668년, 유화

1642년작 ‘야경’은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하려고 투쟁하던 네덜란드 시민 민병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민병대 건물의 대회당 벽을 장식하기 위해, 민병대 대장인 프란스 반닝 코크와 17명의 민병대원들의 주문을 받아 제작되었다.

원래 이 작품의 원제는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인데, 바니시로 마지막 코팅을 한 화면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산화하여 어둡게 변해, 후세의 사람들이 낮에 순찰하는 장면이 밤에 벌어진 장면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붙여진 이름이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당시의 일반적인 집단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시대의 집단 초상화는 사람들의 얼굴이 균일한 크기로 그려지고 시선은 한 방향을 바라보는 형식의 다소 평면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반해, 렘브란트는 인물들의 크기와 포즈, 그리고 시선의 방향이 제 각각인 구도로 그려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했다.

작품의 중앙에는 검은 옷을 입은 제2구역 민병대 대장인 프란스 반닝 코크가 베이지 색 옷을 입은 빌럼만 루이텐부르크 중위와 이야기를 하며 순찰을 돌고 있다.

그들의 왼쪽으로 민병대의 깃발을 쳐들고 있는 대원이 보이고, 주위에는 민병대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함께 하고 있는데, 그들은 서로를 보고 이야기를 하거나 각자의 일을 하는 등 모두 자연스러운 포즈로 이어져 마치 그 시대, 그 곳에 있는 듯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08_렘브란트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위대한 작품

술집의 방탕아, 1635년, 유화

또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은 듯 환하게 표현된 대장과 중위, 그들의 검은색과 옅은 베이지색의 의상은 흑백의 대조를 이루어 더욱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앞쪽의 사람들은 또렷하고 강렬한 색상으로 표현하고, 뒤로 갈수록 중간색의 음영을 약하게 처리해 삼차원의 깊이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특이한 것은 대장의 왼쪽에 보이는 소녀의 모습이다. 희게 빛나는 소녀의 모습은 주위의 어두운 색의 인물들 사이에서 마치 천사처럼 홀로 빛난다. 아마도 민병대의 상징인 깃발 아래서 민병대의 승리를 기원하는 또 다른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보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구도를 가지게 되었고, 가운데 중심 인물들에게 부어진 강렬한 빛은 군중 속의 구심점이 되어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내었다. 렘브란트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중들은 이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무지했다. 눈에 익은 구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각의 인물들의 크기나 중요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나갔다.

가장 위대한 그의 업적이 그의 인기가 하락한 요인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미술 작품으로 국보와 같이 여겨지는 이 작품은 현재 네덜란드 암스텔담 국립미술관에서 복원작업을 통해 원작과 가장 근사한 모습으로 전시되고 있다.

 

09_돌아온 아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맞아주는 아버지의 모습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1634년, 유화

1668년작 ‘돌아온 탕자’는 성서에 수록된 어느 부유한 아버지와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착실히 살아가는데 반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 그 돈을 가지고 다른 도시로 떠났다.

많은 돈을 가진 그는 돈을 물쓰듯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돈이 다 떨어지자 그 많던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홀로 남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으로 나라에 기근이 들자 점점 나락으로 떨어져 마침내 돼지우리에서 돼지 먹이를 먹으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 양식이 있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가서 용서를 빌고 일꾼으로라도 받아달라고 해야겠다”며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돌아온 아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작품의 중앙 왼편으로 아버지 앞에 꿇어앉아 그 품에 고개를 묻은 아들이 보인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아버지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의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따스한 빛은 품에 안긴 아들을 향해 마치 사랑이 흘러 넘치는 것처럼 비추고 있다. 오른쪽에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큰아들과 사람들이 배경처럼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다.

1668년은 렘브란트가 죽기 한해 전이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 아들 티투스를 잃고 슬픔에 잠겼던 그이기에 ‘돌아온 탕자’를 그리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아들이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사랑으로 그를 받아주겠는가! 아버지로서의 그의 마음이 작품 속에 녹아있는 것 같다.

 

10_앙다문 입매에는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야경, 1642년, 유화

렘브란트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100여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아주 젊은 시절부터 늙어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순간까지 수십 년의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1669년 램브란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렸던 ‘63세의 자화상’에는 인생의 고뇌와 회한뿐만 아니라 험난한 세파 속을 헤쳐 나온 체념에 가까운 평화가 깃들어 있다. 높았던 인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와 함께 많던 재산과 그가 자랑으로 삼던 저택도 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결국 사랑하던 아들 티투스마저 엄마처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인생 말년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쓸쓸하고 텅 빈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노인 렘브란트는 하얗게 센 머리 위로 낡은 모자를 쓰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초라한 코트를 걸친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처지가 불행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그렸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 속에 비치는 절망과 체념에도 불구하고, 앙다문 입매에는 스스로를 지탱하게 하는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서려있다. 아무리 마지막이 초라할지라도 그가 일생 동안 그려온 작품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것처럼….

 

* 다음은 초현실주의 화가 블라디미르 쿠쉬의 신비한 세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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