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주의’ 미술의 새로운 개념 창시한 카지미르 말레비치

자연을 모방해서도, 자연에서 기인한 아이디어 표현해서도 안 된다”

아마도 하얀 도화지에 검은 사각형을 그려놓고 이것이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작품을 그린 화가가 있고 그 작품의 가치가 1조원에 달한다면 모든 사람이 놀라움에 입을 딱 벌릴 것이다.

 

01_“철저히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검은 사각형 1915년, 유화

그 화가는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을 그려 ‘절대주의’라는 미술의 새로운 개념을 창시한 러시아의 카지미르 말레비치 (Kas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년-1935년)이다. “자연을 모방해서도 안 되고 자연에서 기인한 아이디어를 표현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철저히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현대 추상화의 시작을 연 예술가이다.

말레비치는 화가이자 이론가로 예술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지하게 하고 추상회화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까지 끌어올려 순수추상화가 발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간 회화의 중심을 이루었던 개념인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회화 자체를 부정한다는 인식을 줄 정도로 쇼킹한 주장이었지만, 현실과 회화를 분리해 형태의 압축된 본질을 추구하는 그의 순수한 추상세계는 미술계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단 하나의 검은 사각형을 그림으로 현대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말레비치, 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이자 미니멀리즘의 효시인 그는 현대 주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화가이다.

 

02_피카소와 브라크가 주축 된 입체주의에 심취

검은 십자가 1915년, 유화

1878년 러시아 키예프에서 태어난 말레비치는 어린 시절 접한 전시회에서 감명을 받아 어린 손으로 여기저기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가 사다 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95년부터 1896년까지 고향의 미술학교에서 드로잉을 공부했고, 1904년 모스크바에 와서 모스크바 미술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해 1910년까지 미술을 배웠는데, 이 시기에 화가 페도르 레그베르크의 스튜디오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그림을 배웠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와 야수주의에 심취했지만, 당시 파리의 미술계에 큰 지진을 일으킨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축이 된 입체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시기 그의 작품은 정교한 입체주의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1912년작 ‘칼 가는 사람’은 기계적이고 기하학적 도형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어우러져 역동하는 힘을 내뿜고 있다. 수 많은 큐브 (입방체: 동서남북, 위, 아래의 육면체)들과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들로 구성된 화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제작된 ‘눈 온 뒤 물길어 가는 여인들’에서도 삼각형과 사각형 원통형의 단면들은 모두 그라데이션된 색으로 표현되어 자체의 입체감을 뽐낸다. 눈 덮인 나무와 길조차도 각각의 입체적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눈으로 뒤덮인 한 겨울 마을의 모습이 살아있고 물통을 들고 가는 원통형의 여인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일상적인 풍경이 입체주의의 시각으로 재 탄생되어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03_대상의 묘사, 한계 못 벗어나 입체주의에 한계

농부의 머리 1929년, 유화

말레비치는 러시아의 입체파운동을 주도하며 점점 러시아의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체주의가 대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획기적인 시각으로 미술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할지라도 대상의 묘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는 점차로 입체주의의 한계를 느꼈다.

1914년작 ‘모스크바의 영국인’은 입체주의에서 벗어나 절대주의로 가는 과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러시아를 관광하러 온 영국인의 시각을 그린 특이한 작품이다. 화면에는 물고기, 커피잔, 양초, 열쇠, 화살표, 사다리, 칼등 서로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물체들이 나열되어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알파벳이 군데군데 섞여있다. 중앙의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신사의 얼굴은 물고기에 반쯤 가리워졌는데, 드러난 한쪽 눈은 존재감이 강렬해 화면의 모든 사물들이 그가 보는 시각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이국의 풍경이 담긴 스크랩북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마치 시골에서 온 사람이 도시의 정경을 접했을 때의 느낌이나 서양인이 동양의 한 도시에서 접하고 받아들이는 시점처럼 아웃사이더의 시각이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의 왜곡같이도 보여진다.

 

04_현실과 형태와의 연결고리 끊어냄으로써…

모스크바의 영국인 1914년, 유화

1913년 말레비치는 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을 넘어선 승리’에서 무대 배경과 배우들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기하학적 문양과 화려한 색상으로 마치 입체주의 작품을 옮겨놓은 듯한 디자인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배우들은 모두 입체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형의 일부처럼 보였다.

이 공연을 계기로 말레비치는 “예술은 현실 속 대상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자신의 주장에 확신을 가지고, 형태의 본질에 대한 심층적 고찰에 들어갔다.

말레비치는 형태가 가지는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 어떠한 논리와 이성이 시사하는 방향도 거부한 채 오로지 순수한 느낌 그 자체를 표현하려 했다. 현실과 형태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냄으로써 오로지 형태 자체의 존재에만 몰입한다는 ‘절대주의’의 태동이었다.

 

05_현실과 회화의 분리… 그가 주창한 ‘절대주의’ 요체

미래주의 0.10 전시회 사진 1915년

말레비치는 1915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와 ‘쉬프레마티즘 (절대주의) 선언’을 발표했는데 “절대주의에 의해 나는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상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한다”라고 선언 첫머리에 주장하며 이는 ‘상징도 기하학도 아닌 내면의 질서에 의해 스스로 형성되고 구성된, 자연을 초월한 순수한 감각’이자 순수한 감성의 극점으로서의 추상이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그는 현실에 실재하는 형태와 작품 안에 그려지는 형태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을 무너뜨려 그림 안의 형태가 현실적 의미를 담지 않고 독자적인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계속해서 현실적 묘사를 제거해 나가면서 그의 그림은 더욱 단순해져 갔다. 불필요한 묘사들이 사라진 형태는 삼각과 사각, 원, 직선의 기하학적 기본도형으로 압축되었다.

그의 작품 속의 형태는 현실세계에서 만날 수 없는 직선과 사각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그림이 현실의 모방이라는 차원을 떠나 그림 안에서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 완벽한 추상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하는 그의 이념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형태에서 벗어나 오로지 작품 안에서만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켰고, 이러한 현실과 회화의 분리는 그가 주창한 ‘절대주의’의 요체이다.

 

06_아무나 그릴 수 있는 이 작품 같지도 않은 작품이…

붉은 타원 위의 검은 십자가 1920년, 유화

그는 절대주의의 기본요소인 도형과 색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였다. 도형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가 사각형이고, 모든 색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무 색도 내보내지 않는 검정색이 가장 본질적인 색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사각형’의 등장이었다. 그는 검은 사각형은 전체와 무라는 반대 개념을 그 안에 품고 있는 궁극의 형태라고 확신했다.

1915년 페트로글라드에서 열린 ‘미래주의 회화 0.10전’에 출품한 ‘검은 사각형’은 전시 당시 많은 사람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첫 번째 논란은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 하나를 그려놓은 게 무슨 그림이냐, 여기에 어떤 예술성이 있느냐 하는 논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작품이 걸린 위치 선정이었다.

아무나 그릴 수 있는 이 작품 같지도 않은 작품이 러시아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두 벽 사이의 코너 꼭대기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 장소는 러시아 정교회나 카톨릭의 성인 아이콘을 걸어두는 장소로 러시아 국민이라면 모두 성스럽게 여기는 장소였다.

 

07_‘흰색 위의 흰색 사각형’은 절대주의 종결이자 완성

빨강 사각형 1915년, 유화

그러나 말레비치는 후에 “지금까지 어떤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그림이다. 그동안 미술은 사물의 아름다움을 묘사했지만, 나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 대신 새로운 형태의 세계를 찾아서 새로운 감정으로 새로운 광장으로 나가고 싶었다”고 말하며, 검은 사각형은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비재현적 예술의 순수한 결정 그 자체이며, 그곳에 걸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검은 사각형’이 새로운 시작의 성물이 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로서 모든 것이 이 검정 사각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싶었던 것 같다.

1919년작 ‘흰색 위의 흰색 사각형’은 그의 절대주의 이론의 완성을 이룬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사각의 화면 속에 더 이상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사각형은 이제 흰색으로 덮여 그 존재감을 상실한다.

형태와 색이 모두 무로 돌아가는 완벽한 추상의 세계… 이곳에 존재하는 흰 사각형은 영원과 진실에 대한 순수한 추구를 상징하고 있다. ‘검은 사각형’이 절대주의의 시작이라면 ‘흰색 위의 흰색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종결이자 완성이었다.

 

08_러시아 전위적인 예술 꽃피우게 한 선구자

자화상 1933년, 유화

추상화조차 추상해버린 그의 시도는 기존 회화의 개념을 뛰어넘어, 진부하고도 낡은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정통예술의 오랜 세월 정체되어 온 흐름을 깨부수는 혁명적인 쾌거였다.

러시아의 급진적인 젊은 화가들은 ‘절대주의’를 구시대의 유습을 타파하는 혁명적인 운동으로 받아들였고, 말레비치는 러시아의 전위적인 예술을 꽃피우게 한 선구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검은 사각형’ 외에도 자신의 이념이 담긴 ‘절대주의 구성’시리즈 수십 점과 검은 사각형과 빨강 사각형(1915년), 평면의 용해(1917년), 신비한 절대주의 (붉은 타원 위의 검은 십자가 / 1920년) 등 수도 없이 많은 작품을 그렸다.

1915년작 ‘빨간 사각형’은 붉은 광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러시아의 농민 여성이 하얀 들판에 서있는 모습을 이차원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붉은색은 러시아 정교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러시아 농민에 대한 사랑을 압축시켜 추상화시킨 작품으로 보인다.

그의 농민에 대한 사랑은 그가 절대주의 작품을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된 이후에도 농부의 머리(1929년), 들판의 젊은 여인들(1932년), 쇠스랑을 든 여자(1932년) 등 여러 작품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09_‘반체제’라는 딱지 붙은 채로 전시되는 수모 겪기도

절대주의 구성 1915년, 유화

1923년 그의 저서 <비대상적 세계>가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현대미술에 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학이론은1924년 집권한 스탈린에 의해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매도되었다.

1926년 독일에 머물다 돌아온 말레비치는 문화정책을 변경한 정부에 의해 모든 공직에서 추방 당했다. 1930년 고향 키예프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나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다.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힌 말레비치는 국제 스파이혐의로 체포되어 2개월이나 감옥에 가기도 했는데, 서방국가의 언론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석방되었다. 소비에트 혁명15주년 기념전시회에는 그의 작품에 반체제라는 딱지가 붙은 채로 전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경직된 사회 체재가 한 천재의 예술혼을 말살하려는 악의적인 사건이었다.

샤갈이나 칸딘스키가 프랑스나 독일로 망명할 때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지 않은 그에게는 가혹한 처사였다. 러시아가 그들 전위적인 예술가들을 포용했다면 지금쯤 현대 문화계에서 러시아는 미국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말레비치는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와 같은 위치에서 조국을 빛낼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10_‘검은 사각형’은 말레비치의 상징이 되었다

칼 가는 사람 1912년, 유화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사실주의 회화만이 정당한 예술로 인정받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혁신적인 미학을 부르짖는 말레비치가 설 자리는 없었다. 이후에는 순수회화에서의 자신의 신념을 숨긴 채 제도, 직물 디자인, 벽지 디자인 등 실용미술계에서 활동을 했다.

1933년 그려진 ‘자화상’은 스탈린 치하에서 손과 발이 묶인 채 정신적 자유를 박탈당한 스스로의 모습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의 모습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현대미술의 정점을 향하며 끝없이 올라가던 그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덜미를 잡혀 끌어내려진 그 곳에서 벽지나 원단의 디자인으로 예술에 대한 갈망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깊은 눈초리와 꽉 다문 입술에서 묵묵히 저항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진다. 작품의 오른쪽 밑부분에는 검은 사각형으로 자신의 싸인을 대신해 굽히지 않는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말레비치는1935년 레닌그라드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에 임박해 그는 자신의 관을 직접 디자인해 검은 사각형과 검은 원을 그려 넣었다.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무언의 항거였다.

‘검은 사각형’은 말레비치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운구차에도 초상화 대신 이 작품이 걸리고 조문객 역시 검은 사각형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한 시대의 위대한 발자취를 기렸다. 비록 스탈린에 의해 사라져야만 했던 비운의 절대주의는 많은 예술가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았다. 1980년대 다시 되살아난 절대주의는 20세기 현대 회화의 아이콘이 되었고, 미니멀 회화와 개념 회화의 모태가 되었다.

이제 그가 떠난 지 90여년이 흐른 현재, 한때 배척 받던 그의 작품들은 국보급 문화재로 관리되고, 러시아 국립미술관인 예카테린부르크미술관을 비롯한 주요 미술관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현대미술과 디자인,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의 족적은 21세기 현재에도 수많은 화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 다음에는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의 환상의 세계로 가보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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