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민화가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선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미술 주도한 위대한 자연주의 화가

밀레의 ‘만종’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교과서는 물론이고 오래된 식당이나 찻집, 이발관에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 두 사람이 넓은 들판에 서서 기도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만종’이다. 너무나 명작이기에 너도나도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 결과 진품에서 풍기는 깊이 있는 예술혼을 훼손 당하고야 만 아이러니한 상황에 이른 명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년~1875년)는 ‘만종’ 외에도 ‘씨 뿌리는 사람’이나 ‘이삭줍기’ 등 농촌의 풍경과 농민의 생활상을 담은 주옥 같은 작품들로 20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01_농촌의 실상과 풍경, 농민의 삶 가감 없이 표현

그레빌의 절벽 1872년, 유화

그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물결 속에서 사실적인 묘사로 무장한 자신만의 화풍을 굳건하게 지켜낸 화가로,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미술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농촌의 실상과 풍경, 농민의 삶을 가감 없이 표현해 위대한 자연주의 화가로도 불린다.

또한 모네와 고흐를 비롯한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서양미술사에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해 프랑스 국민화가에서 더 나아가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서있다.

 

02_집안 지키는 책임감서 밀레 구원해준 사람은 할머니

나무 켜는 사람들 1852년, 유화

밀레는 1814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그뤼시라는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커다란 농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농촌생활이 의례 그렇듯 많은 식구들을 부양해야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장일로 바쁘게 지냈고 밀레는 할머니의 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할머니는 신앙심이 깊어 옆에서 보고 자란 밀레 역시 굳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갖게 된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사랑은 그의 인격을 이루는 기둥이 되었다.

어린 시절 밀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종종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밀레가 19세가 되자 셰르부르에서 활동하던 다비드의 제자 무셸에게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게 했다.

그러나 2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밀레는 동생 7명을 돌봐야 했기에 그림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가장으로서 집안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린 밀레를 구원해준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를 지극히 사랑한 할머니였다. 밀레의 재능을 아까워한 그녀는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독려하고, 밀레는 다음해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수 있었다.

 

03_여러 번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번번히 낙선의 고배

낮잠 1866년, 유화

“일생 전원 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내가 본 것을 솔직하게, 되도록 능숙하게 표현하려 할 뿐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밀레는 시골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던 평범한 시골 청년이었다. 그런 그를 위대한 화가의 길로 이끈 것은 처음 그의 재능을 발견해 미술교육을 받게 해준 아버지와 어려워진 환경 속에서도 붓을 잡게 이끌어준 할머니의 사랑이었으리라.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무명화가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번 살롱전에 출품을 했지만 번번히 낙선의 고배를 마신 밀레는, 1844년 처음으로 ‘폴린-비르지니 오노의 초상’으로 살롱전에서 입상을 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밀레가 1841년 결혼한 첫 번째 아내인 폴린 오노를 그린 작품인데, 아내를 사랑해서 작품으로 남긴 점도 있었겠지만 초상화의 주문도 받지 못하고 모델을 구하기도 어려웠던 무명화가의 사정상 자연스레 곁에 있던 아내가 모델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붉은 스카프를 쓰고 흰옷을 입은 여인이 온화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웃을듯 말듯 미묘한 입가의 표정, 남편을 바라보는 사랑스런 눈망울에 여인의 순박한 성정과 청초한 아름다움이 빛나고 있다. 비스듬히 앉아있는 여인의 흰색 블라우스는 단순한 백색을 뛰어넘어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그림자가 지는 부분까지 여러 가지 색을 섞어 변화를 주었다. 천의 질감과 입체감이 뚜렷하게 살아있어 화가로서의 밀레의 자질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게 해준다.

불행히도 작품 속의 아내는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작품 속의 그녀는 영원히 살아남아 빛나는 인생의 한때를 간직하고 있다.

 

04_초상화나 누드화에서 벗어나 자연 그리기 시작

만종 1859년, 유화

아내가 세상을 뜬 뒤 실의에 빠져있던 밀레는, 1년 뒤 두 번째 아내이자 아홉 아이들의 어머니로 평생 그의 곁을 지킬 반려자 캐터린 르메르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1949년 파리가 콜레라로 몸살을 앓자, 파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바르비종으로 이사를 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바르비종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 근처의 작은 전원 마을로 1820년대 후반부터 도시생활과 정치적 혼란에 지친 젊은 화가들이 시골풍경을 그리려 모여들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바르비종파라고 불렀다. 이들은 전원에서 안식과 평화를 찾고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예술을 표현하려 했다.

밀레도 바르비종으로 이주한 뒤 자연히 농촌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초상화나 누드화에서 벗어나 자연을 그리기 시작한 주제의 변화는 미술사에 남을 만큼 큰 의미가 있다. 그의 중요한 명작들이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05_몸 움직여 농사지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농촌일상에 주목

빨래하는 여인들 1855년, 유화

여타 바르비종 화가들이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이나 한가로운 여가를 표현할 때, 밀레는 몸을 움직여 농사를 지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농촌의 일상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의 주인공은 농민들이었다. 자연과 싸우며 거친 삶을 살며, 또 자연이 주는 수확을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할 줄 아는 진정한 인간들의 삶. 그들의 삶에서 가식이나 헛된 허영은 자리잡지 못한다. 도시가 주지 못했던 진솔한 삶의 의미가 그곳에 있었다.

1848년작 ‘키질하는 사람’은 사실상 자연주의 화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한 작품으로, 파리의 살롱전에 입상한 작품을 정부가 정식으로 구매하였다. 이 혼란한 시대에 브루주아들은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전원의 낭만을 동경하였지만, 이 작품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키질을 하는 농민의 고단한 삶이 그려져 있다. 낡은 옷을 입고 힘겹게 키질을 하는 이에게서 계속되는 노동에 지친 현실과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는 환경에 대한 체념이 묻어난다.

 

06_순수하게 노동의 가치 높게 그린 화가

빵굽는 여인 1854년, 유화

고흐가 오마쥬해 명작을 남긴 것으로 더욱 유명해진 1850년작 ‘씨 뿌리는 사람’에는 한 농부가 화면 가득 거대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성큼성큼 걸으며 오른 손으로 움켜쥔 씨앗을 휘두르듯 대지에 뿌리고 있다. 붉은 상의 안에서 뻗어나가는 팔뚝의 힘과 푸른 바지 위로 꿈틀거리는 허벅지의 근육, 추위를 막기 위해 짚으로 싸여있는 종아리와 신발. 생명줄 마냥 움켜쥔 흰색 씨앗 주머니. 자유, 평등, 박애를 나타내는 빨강, 파랑, 흰색과 그 안에서 강인하게 뻗어 나오는 힘이 마치 혁명의 기상과도 같이 보인다.

화면을 둘로 갈라 대지와 하늘로 표현하고, 농부의 존재를 그 둘이 꽉 차게 표현해 노동의 신성함을 나타내고 있다. 모자에 가려진 농부의 얼굴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자의 집중된 표정이다. 왼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씨앗 주머니는 그의 삶의 원천이리라. 오늘도 삶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농부의 발걸음 속에 용기와 근면이 묻어있는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노동의 가치를 높게 그린 화가가 있을까?

영웅도 아닌 평범한 농부를 커다란 캔바스에 거대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 혼란과 경악을 주었다. 혁명으로 혼란해진 정국 속에서 그의 작품을 보는 보수주의의 비판과 사회주의의 열광이 난무했지만, 밀레는 진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찾기 위해 이 작품 속의 농부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07_본인의 농촌생활로 얻어질 수 있었던 현장감

새잡이 1874년, 유화

그는 농부들뿐만 아니라 산에서 일하는 인부들, 숲에서 양치는 소녀, 빨래하는 아낙네들 등 전반적인 농촌생활을 그렸는데, 그 생생한 표현은 본인이 농촌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얻어질 수 없는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1852년 작 ‘나무 켜는 사람들’은 숲 속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톱으로 썰어 토막을 내고 있는 두 남자가 보인다. 짙은 숲의 음영 속에서 밝은 햇살이 뉘어있는 나무와 두 사람을 비추고 있다. 온 힘을 다해 나무를 톱질하는 남자들의 자세와 불끈거리는 근육들은 땀 흘리는 노동의 신성함을 드러내고 있다.

밀레의 작품에서 여인들은 강인함과 인내를 가지고 있다. ‘빵굽는 여인’ (1854년)에서 여인은 고된 생활로 단련된 억센 힘으로 가족에게 먹일 빵을 굽고 있다. 아름답다기 보다는 후덕한 여인의 몸집과 자신의 일에 집중해 화덕으로 반죽을 밀어 넣는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1855년 작 ‘빨래하는 여인들’을 보면 해는 지고 사위는 컴컴해지는데 하늘에 걸려있는 초승달이 무심하게 무거운 빨래를 등에 지고 서있는 여인들을 비추고 있다. 강에는 쪽배가 떠있어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하는데, 여인의 어깨에 올려진 젖은 빨래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무겁게 느껴진다.

 

08_삶의 고단함은 발 밑의 그림자처럼 그들을 옭아매고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유화

밀레의 대표작중 하나인 1857년 작 ‘이삭줍기’는 시골의 풍경을 그린 목가적인 작품으로 추수가 끝난 황금빛 벌판에서 세 여인이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뒤에는 희미하게 마을 풍경이 보이고, 커다란 나무 아래 듬성듬성 쌓아놓은 건초더미와 말을 타고 일꾼들을 보고 있는 농장주가 있다.

이 풍요롭고 한가로운 농촌의 풍경은 앞쪽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이삭을 줍고 있는 여인들로 인해, 이상적인 전원 풍경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농촌의 일상으로 바뀐다. 급격한 주제의 변화에도 자연스레 펼쳐지는 화력의 기교가 뛰어나다. 이것이 밀레 작품의 매력이자 화가가 추구하는 사실성의 표현이리라.

여인들은 모두 나이 들어 힘겨운 움직임을 하는 것 같다. 왼쪽의 여자는 등허리에 손을 올려 구부러진 허리를 지탱하고 있고, 가운데 여자는 한 손에 자신이 모은 이삭을 움켜쥔 채 계속해 이삭을 줍고 있다. 오른쪽 여인은 모은 이삭을 가지고 아픈 허리를 피려는 듯 보인다.

성경에서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나오는데, 여인들은 고대로부터 하층민이 할 수 있는 생존의 방식을 엄숙하게 수행하고 있다. 따스한 가을의 햇살이 그들의 꺾인 허리 위와 땅에 떨어진 이삭들 위로 드리워져 있지만, 삶의 고단함은 발 밑의 그림자처럼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 같다.

 

09_고흐, 살바도르 달리 등 후대 화가들에 커다란 영감 줘

이삭줍기 1857년, 유화

1859년 드디어 추수를 끝낸 가을 벌판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그 유명한 ‘만종’이 태어났다. 하늘에는 황금빛 노을이 펼쳐져 있고, 저 멀리 볏단을 쌓아놓은 들판, 그 너머로 교회의 첨탑과 마을이 흐릿하게 떠있다. 앞쪽에는 마주보고 서있는 두 사람과 곡식을 담은 수레, 세워진 갈퀴, 발치의 바구니가 있어 농부의 삶을 보여준다.

저녁 종소리가 들리자 여인은 석양의 빛을 받으며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오늘도 무사히 일을 마치고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심을 감사 드리고, 해를 등지고 선 농부도 모자를 벗어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삼종기도라고 불리는데, 하루에 세 번 종을 칠 때에 드리는 기도라고 한다. 밀레는 “만종’은 옛날에 할머니가 들에서 일하다가도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죽은 가엾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음을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다”라고 말해, 이 작품이 그의 어린 시절 추억과 몸으로 겪은 농촌생활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리고 있다. 작품에는 그가 겪었던 농촌생활이 그대로 녹아있어 평화로움과 따스함이 온 화면을 덮고 있다.

이 작품을 비롯한 많은 밀레의 작품들은 고흐나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후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고, 그들은 또 뛰어난 오마쥬 작품으로 선배화가를 추앙했다. 또한 ‘만종’에는 유명한 루머가 있는데, 여인의 발치에 놓여있는 바구니에 들어있는 것이 아이의 시신이고 사회적인 물의를 염려한 밀레가 후에 감자로 바꿔 그렸다는 설이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갑론을박에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유명세로 인한 수난은 끝나지 않아 1932년 한 정신이상자가 미술관에 걸려있는 이 작품을 칼로 찢어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원상태로 복원해 오르세미술관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지만 가슴이 섬찟해지는 사건이다.

 

10_젊은 화가들이 의지하고 조언 구할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

폴린-비르지니 오노의 초상 1844년, 유화

밀레가 1872년에 그린 ‘그레빌의 절벽’은 노년의 화가의 탁월한 필력을 보여주는 풍경화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이 풍경화의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해 어떤 메시지를 주는데 치중한 반면, 이 작품은 순수하게 풍경 그 자체를 주제로 하고 있다.

황금빛과 보라빛이 묵직한 채도로 하늘을 덮은 구름을 표현하고, 그 아래 녹색 이끼 낀 바위투성이 해변에 거친 바위들을 어루만지는 하얀 포말들과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하늘과 바다와 해변이라는 단순한 주제로 이루어진 이 순수한 풍경화는 그 자체로 장엄하고 아름답다.

밀레의 마지막 작품 ‘새잡이’ (1874년)는 밤중에 숲에 떼지어 앉아있는 야생 비둘기를 횃불로 잡는 광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숲 속 나뭇가지마다 빼곡히 앉아있는 새들을 횃불을 들이대 놀래키고, 날아오르는 새들을 곤봉을 휘둘러 잡고 있다.

횃불을 나무에 들이대고 곤봉을 휘두르며 펄쩍펄쩍 뛰는 남자의 뒷모습, 위쪽을 바라보며 곤봉을 휘두르는 이의 얼굴 표정, 땅바닥에 엎드려 떨어진 새들을 줍고 있는 사람들. 이들 모두의 격렬하고 부산스런 모습이 포즈 하나하나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다소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이 장면은 당시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새를 잡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노화가가 묘사하는 빛과 어둠의 표현이다. 마치 인상파의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자유로운 붓 터치에 힘과 속도가 더해져, 어둠 속에 숨어있는 빛을 끄집어 내는 것 같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운 듯 밀레의 완숙한 붓 놀림과 완벽한 빛과 색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도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밀레는 젊은 화가들이 모든 문제에서 의지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라고 밀레를 칭송했다. 거짓없이 진솔한 화법으로 자신의 내면과 노동의 가치를 표현한 밀레. 생전에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까지 받으며 프랑스 국민화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1975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위대한 발자취는 아직까지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 다음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일본 판화의 대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만나보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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