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탄생 이끈 최초의 근대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 19세기 서양미술사 중요한 사조도 태동케 해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년-1828년)는 한미한 시골에서 태어나 벨라스케스 이후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스페인 미술계에 커다란 변혁을 일으킨 위대한 화가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라는 어느 한 사조에 묶어 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앞으로 태어날 많은 미술사조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 19세기 서양미술사의 중요한 사조를 태동케 하고, 20세기 표현주의, 초현실주의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최초의 근대화가라 불린다.

 

01_상상과 현실 경계 넘어 내면 들여다보고 자기자신 성찰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민중 봉기대의 학살 1814년, 유화

‘옷 벗은 마하’로 종교와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고, ‘옷 입은 마하’로 사회 시스템에 조롱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로 인간 내면의 추악하고 광포한 심연을 끄집어내었다.

‘옷 벗은 마하’로 종교재판까지 받고 궁정화가라는 명예로운 지위까지 내려놓아야 했지만, 그의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전쟁의 재앙’라는 동판화 연작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공포와 참상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프랑스의 침략에 반기를 든 마드리드의 민중봉기를 그리는 등 사회에 대한 비판과 계몽은 계속되었다.

자칫 테크닉이 좋은 사실주의 화가로 머무를 수 있었을 고야를 그 시대의 우뚝 선 아이콘으로 만들고, 후대 미술가들의 예술적 지평을 넓힐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자신을 성찰하는 자세와 사회와 민중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으리라.

 

02_이탈리아 파르마회화전 2등 입상, 사라고사로 금의환향

도자기 파는 사람들 1779년, 유화

고야는 1746년 스페인 북부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로 교회의 제단화 액자나 가구에 금칠을 입히는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하급 귀족의 딸이었다. 고야는 카톨릭 수도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는데, 화가 호세 루잔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아 정식으로 미술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고야가 14세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사라고사 시로 이사했는데, 그곳 호세 루산의 아트리에에서 4년간 미술품 복제와 데생을 공부했다. 17세가 되자 왕립 아카데미의 국비 장학생이 되기 위해 1763년과 1766년 왕립 미술학회에 입회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하는 등 실패가 계속되자 고야는 1771년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러나 고야는 이탈리아의 파르마회화전에서 2등으로 입상해 고향 사라고사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당시 그려진 고야의 ‘자화상’ (1771년~1775년)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현실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별하게 재능이 뛰어나거나 환경이 받쳐주거나 하지 않는 이상 성공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계속되는 실패에도 주저앉지 않고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의지가 필요했으리라. 꽉 다문 입술과 또렷한 눈망울이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명언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03_성서에 기반 둔 작품들

성 요셉의 꿈 1770년~1772년, 유화

고야의 초기 작품에는 ‘성 요셉의 꿈’ (1770년~1772년), ‘세례’ (1771년~1775년), ‘성처녀의 출산’ (1772년 )등 성서에 기반을 둔 것들이 많다. ‘성 요셉의 꿈’은 몸을 구부린 채 잠든 요셉을 천사가 와서 어루만지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검고 어두운 배경에 요셉의 붉은 옷, 천사의 거대한 흰 날개가 어우러져 색의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그리고  ‘세례’는 지팡이를 든 세례요한의 앞에 예수가 머리숙여 세례를 받는데, 하늘에서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내려 붓듯이 삼각형의 구도로 그려져 있다. 다른 화가들이 같은 주제로 그린 작품들이 환한 대낮의 정경을 그린 데 반해, 밤을 나타내듯 어둡게 칠해져 있는 배경이 특이하다.

어둠 속에서 성령의 빛을 받아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들이 주제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성처녀의 출산’은 아기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를 세 여인이 둘러싸고 경배를 드리는 듯한 모습을 그렸다. 화면은 온통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차 있고, 흰색과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표현된 빛이 아름답다. 또한 고야는 26세인 1772년 고향 사라고사의 교회 천장화 ‘주의 이름으로 경배’를 제작하기도 했다.

1773년 친분이 있었던 왕립미술협회 회원인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을 한 고야는 처남의 도움으로 왕실에 납품하는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디자이너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태피스트리를 디자인하는데 예술적 재능을 펼쳐 아름답고 다양한 태피스트리의 패턴을 만들어내었는데, 5년간에 걸친 이 작업에서 그의 빛나는 재능은 왕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04_섬세한 디테일, 놀라운 표현력으로 서민 생활상 알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1780년, 유화

1777년작 ‘파라솔’은 리넨 캔바스에 일상생활을 그린 연작 중의 한 작품인데, 직조로 짜서 벽에 거는 형태인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을 바탕으로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카를로스4세의 별궁인 엘 파르도 궁에 걸렸다.

30대 초반에 제작된 이 그림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일상의 한 때를 묘사하고 있다. 회화적인 무게나 디테일보다는 장식적인 면이 두드러진 가벼운 작품으로 벽에 걸릴 태피스트리의 성격을 고려해 그린 것 같다.

아름다운 여인이 푸른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다. 무릎에는 검은 강아지를 올려놓고 망토 사이로 보이는 손에는 부채가 쥐어져 있다. 잔뜩 차려 입은 것 같은 여인은 주위를 돌아보며 상큼한 미소를 띠고 있다.

곁에는 한 남자가 초록색 파라솔로 햇빛을 가려주며 허리를 약간 구부린채 여인에게 그늘이 잘 닿고 있는지 보고 있다. 밖으로 나들이한 게 즐거운지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이들은 평민 계급의 젊은이들로 그 시대의 신세대 청춘 남녀이다.

여자는 마하, 남자는 마호라 불리며 당시 마드리드의 유행을 선도해, 귀족들도 그들의 행동을 따라 했다고 한다. 배경은 디테일을 생략한 채 얇게 그려져 인물들을 부각시키는 열할을 하고 있고, 왼쪽에는 어두운 성벽이 푸르른 하늘과 대조되어, 맑은 날씨아래 망중한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평화로운 한때를 잘 느끼게 해준다.

그는 로코코 양식의 이 작품을 비롯해 많은 풍속화를 그렸는데, 거의 모든 작품들이 일상의 밝고 유쾌한 한때를 그렸다. 특히 ‘도자기를 파는 사람들’ (1779년)은 유려한 필치와 섬세한 디테일의 놀라운 표현력으로 서민들의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한 작품으로 보여진다.

 

05_풍속화나 성화만큼 많은 초상화 그려

아들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1819년~1823년, 유화

고야는 34세의 젊은 나이로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1780년)는 입회를 위해 제출된 작품이다. 세로255cm, 가로154cm의 대작으로 만장일치로 고야의 가입이 승인됐을 정도로 예술성이 높은 명작이다.

검은색으로 덮인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서 나무로 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그 비율과 포즈, 데생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간구하는 예수의 절절한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해준다.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자기희생을 완벽하게 표현한 위대한 작품이다.

고야는 풍속화나 성화만큼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1786년부터 카를로스3세의 전속화가가 되어 오랜 시간 궁정화가로 지냈는데, 카를로스3세가 죽고 카를로스4세가 황위를 잇자 그와 그의 가족들,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부유하고 명예로운 궁정화가의 생활을 즐겼다.

‘카를로스4세와 그의 가족들’ (1800년~1801년)은 인물들의 뛰어난 묘사와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사실성으로 주목을 받는 작품이다. 초상화 속의 인물들은 미화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잘 차려 입고 오만과 허영에 가득 차 있는 왕실 가족의 모습은 우리에게 풍자적으로 다가오고, 구석에 큰 캔바스를 앞에 둔 화가의 모습도 보인다.

 

06_그의 화풍은 청력상실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안경 쓴 자화상 1797년~1800년, 유화

고야의 일생을 좌우한 커다란 사건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청력의 상실을 들 수 있겠다. 1792년 열병에 걸려 귀가 안 들리게 된 고야는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갔다. 그의 화풍은 청력상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교회의 횡포와 사회의 부조리, 그 속에서 억압당하고 착취 당하는 무지한 민중들을 주제로 많은 판화작품들을 남겼다.

1799년작 ‘카프리초스 (변덕)’는 애쿼틴트 기법으로 제작된 동판화집으로 카툰의 시초로 평가되는 중요한 작품집이다. 이 판화집 속 52번에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52번 그림을 보면 중앙에 얼굴을 가린 수사 복장의 거대한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위협적으로 서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여인과 자비를 구걸하는 군중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사의 팔은 나뭇가지이고 얼굴도 괴이하게 그려져 그들이 믿는 것이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맹목적인 신앙과 무지가 주는 폐해를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07_“예술작품의 본질은 작품 그 자체의 예술성에 있다”

자화상 1771년~1775년, 유화

1800년경 그려진 ‘옷 벗은 마하’는 섬세하고 유려한 터치로 여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표현한 작품인데, 대담한 포즈로 비스듬히 누워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는 여인은 당대의 멋쟁이 여인을 일컫는 마하이다. 어두운 배경 위에서 밝게 빛나는 누드가 여성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살아있는 관능을 만나는 것 같은 이 작품은 신화나 고전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여인의 누드를 그림으로 시대에 한 걸음 앞서 있는데, 이는 중요한 미술사적 기점이 되었다.

이 작품은 사실 카를로스4세 시대의 총리 고도이가 주문해 제작한 것으로, 평소에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전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적인 공간에 걸어놓고 혼자 즐기는 용도였다. 고도이는 누드작품을 좋아해 고야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점의 누드작품으로 방을 꾸며놓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표적수사로 인해 종교재판소 조사관에게 이 사실을 들킨 것이다. 음란죄와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된 고도이와 함께 고야도 작품 제작자로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꼼짝없이 감옥에 갇힐 뻔한 고야는 티치아노의 1560년대 누드작품 ‘다나에’와 벨라스케스의 1650년대 누드작품 ‘로커비 비너스’를 예로 들며, 자신이 음란한 생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는 변호를 하고서야 겨우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1805년, 같은 모델에게 옷을 입혀 같은 포즈로 ‘옷 입은 마하’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예술작품의 본질은 옷을 벗고, 입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의 예술성에 있다는 사실을 무지한 종교 재판관과 꽉 막힌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는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가 나란히 걸려 보는 이들에게 그 시대의 사회와 가치관을 풍자하는 것 같다.

 

08_프랑스군이 스페인 침공했을 때 벌인 잔학한 행위 고발

전쟁의 재앙 1810년~1814년, 동판화

1808년 스페인을 침공한 나풀레옹이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카를로스4세는 포르투갈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핑계로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 군대에 왕위를 내주고 프랑스 남부로 가족과 함께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인 호세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삼아 호세1세라 칭했다.

졸지에 나라를 잃고 외국인 왕을 섬기게 된 스페인 국민들은 분노했다. 시민들은 민병대를 조직해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웠다. 1813년까지 계속된 스페인 민병대와 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은 많은 사상자를 내었는데, 고야는 당시의 참상을 여러 작품 속에 남겼다.

1810년에서 1814년 사이 ‘전쟁과 재앙’이라는 동판화집을 만들어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벌인 잔학한 행위를 고발하였다. 팔다리라 잘려나가고 선혈이 낭자한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은 오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써놓아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표현했다.

 

09_무고한 이들의 절망 뚜렷하게 표현

카를로스4세와 그의 가족들 1800년~1801년, 유화

1814년 그려진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민중봉기대의 학살’도 그 중 하나로 고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세로 266cm, 가로 345cm의 거대한 화폭에 당시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응징하려고 나폴레옹의 군인들이 무고한 마드리드의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검은 하늘 아래 음울하게 서있는 성당을 배경으로 오른쪽에는 양민들이, 왼쪽에는 총을 겨누고 있는 프랑스군이 그려져 있다. 죽음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청년의 흰옷이 중앙에 놓여진 등불을 받아 성스럽게 빛난다. 이 등불은 핍박을 받는 자와 폭력을 행하는 자를 가르는 역할을 한다. 등

불을 사이로 군인들은 죽음을 상징하듯 딱딱한 자세로 어둡게 그려져 있고, 죽음을 마주한 시민들은 반대로 나라를 위한 희생의 숭고한 열정에 사로잡힌 듯 밝게 빛난다. 그리고 그 밝은 빛 아래 놓여진 참상은 더욱 리얼하게 드러난다. 바닥에 피를 흘리며 엎어진 사람들과 끔찍한 상황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무고한 이들의 절망이 뚜렷하게 표현된 명작이다.

 

10_사회와 종교에 대한 환멸, 현실에 대한 분노 표출

카프리초스(변덕)52번, 1799년, 동판화

1819년 마드리드 교외의 농가에 작업실을 꾸민 고야는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관조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이 작업실에 ‘귀머거리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 틀어박혀 4년에 걸쳐 벽화 14점을 완성했다. 자신의 인생과 예술을 총 집약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들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떠도는 심상의 그림자들을 끄집어내 화면에 옮겼다.

벽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후, 어둠 속에 솟아나는 형태들을 그린 이 벽화들은 후에 ‘검은 그림’으로 불렸다. 귀도 거의 멀고 환청이 들리는 중에도 노화가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른 벽화들… 화가는 차라리 그 안에서 자유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 ‘아들을 삼키는 사투르누스’는 1819년부터 1823년까지 그린 작품으로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투르누스는 고대 로마 신화 속 농경의 신으로 아들에게 왕좌를 빼앗긴다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들을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는다는 신화이다. 기괴한 모습의 사투르누스는 두 눈을 흡뜨고 아들을 움켜쥔 채 먹고 있다. 검은 배경에 머리를 산발한 채 아들을 뜯어먹고 있는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이지를 상실한 괴물처럼 보인다.

고야는 왜 이런 괴물을 그렸을까? 아마도 사회와 종교에 대한 환멸, 그가 처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폭력성, 악의 본능을 그린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내면에도 이러한 흉포한 감정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그런 자신에 대한 환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 사투르누스는 그가 반항할 수 없는 사회이고, 목이 뜯겨 죽어가고 있는 아이에 자신을 대입했을 수도 있다. 그가 어느 쪽에 자신을 대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가의 그로테스크한 내면세계를 들여다 보기에는 충분한 작품인 것 같다.

 

11_왕정 혐오하고 반항적인 자유주의자로 일생 살아

파라솔 1777년, 유화

전쟁 중 프랑스군에 잡힌 고야는 호세1세의 청으로 그의 초상화를 그리며 죽음에서 벗어났다. 혹자는 그를 매국노라고도 하지만,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무기 삼아 생명을 연장한 그가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급진적인 귀족들과 함께 친 프랑스 성향을 가졌지만, 그가 전쟁을 혐오하고 스페인 민중을 사랑한 것은 작품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카를로스4세는 무능할 뿐만 아니라 민중을 억압했기에, 고야는 왕정을 혐오하고 반항적인 자유주의자로 일생을 살았다.

1824년 고야는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하고, 1828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스페인 국민들의 고야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고, 고야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또 스페인 최대의 영화제는 ‘고야 시상식’이라 명명해 그를 기린다.

 

* 다음 호에서는 탄탄한 데생과 세련된 색상으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앵그르를 만나보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Previous article때리는 엄마, 맞는 아이
Next article분노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