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미술 창시, 유럽 미술계 바꿔놓은 귀스타브 쿠르베

예술가는 머리가 아닌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미술이 유럽 미술계를 지배하던 시절… 풍경화, 인물화, 자화상, 정물 등 소재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그리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추구한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년~1877년)는 ‘화가의 작업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세상의 기원’ 등의 작품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01_모더니즘 회화의 길 열고 회화의 다변화에 큰 기여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1842년, 유화

쿠르베는 “살아있는 예술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이다.” “예술가는 진실을 그리기 위해 현재시간으로 열린 시선이 필요하다. 머리가 아니라 눈으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실주의 미술을 창시하고 유럽의 미술계를 바꾸어놓았다.

신화와 종교, 귀족과 상류사회가 주인공이 되는 회화에 반기를 들고, 사회의 구석구석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표현해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그의 업적은 모더니즘 회화의 길을 열고 회화의 다변화를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다.

 

02_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 화풍, 에스파냐 화풍에 심취

겨울 사슴의 은신처, 1866년, 유화

1819년 프랑스 오르낭 시에서 태어난 쿠르베는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고향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1837년 브장송의 왕립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때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운 쿠르베는 아마도 이때 자신의 적성이 법관이 아닌 화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나 보다.

졸업 후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기로 되었던 그는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 위한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는 정식 미술아카데미 교육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미술공부를 지향해 여러 미술관을 돌며 거장의 작품들을 모사하고 탐구하였다. 특히 네델란드 여행을 다녀온 후 렘브란트의 화풍과 베네치아 화풍, 에스파냐 화풍에 심취하였다.

조용한 숲 속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에 매어 놓은 해먹 위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편안한 자세로 늘어져 잠을 자고 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미소가 맺혔다. 춤을 추듯 왼 팔은 위로 향해 놓였고 오른 팔은 해먹에 느른하게 걸쳐 있는데, 아름다운 화관으로 장식한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은 땅으로 흘러내릴 듯 하다.

아직 낭만주의의 흔적이 남아 여인은 고대 여신마냥 뽀얀 살결에 늘씬한 몸매의 이상적인 비율로 미화되어 있다. 1944년작 ‘해먹: 처녀의 꿈’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고즈넉한 숲의 풍경과 아름다운 여인의 편안한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가 누리는 온전한 휴식을 느낄 수 있다. 숲과 나무들, 인물의 정확한 데생과 아름다운 색채로 이루어진 이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은 쿠르베의 화가로서의 탄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03_그의 자화상 모으면 파란만장한 자서전 완성될 것

귀스타브 쿠르베

쿠르베는 자기애가 강해 여느 화가보다 유독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그 작품 하나하나는 각각의 스토리와 예술성을 뽐내고 있다. 1842년 작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는 낭만주의의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쿠르베는 자기자신을 우아하고 귀족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그가 계속적으로 출품하던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입선함으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최초의 작품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인 1845년에 그린 ‘절망에 빠진 남자’에서는 확연히 달라진 화법을 볼 수 있다. 작품에서 쿠르베는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표정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자신의 절망과 분노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제스츄어이다.

왼쪽 위에서 떨어지는 빛이 강한 명암을 이루어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가 그의 내면의 고통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이렇게 한 순간의 감정을 자화상으로 그려낸 이는 그 이전엔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또한 ‘부상 당한 남자’에서는 자신의 얼굴로 결투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마치 무대에서 연출을 하듯 자신의 모습을 세팅한 것 같다. 그는 상처받은 자신의 모습이 결코 초라하지 않고 그저 승부에 패배했음을 인정하는 고귀한 이의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면서 나는 심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여러 번 자화상을 그려왔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자화상을 통해 내 삶의 이야기를 써왔던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자화상들을 모으면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그려놓은 한편의 자서전이 완성될 것 같다.

 

04_땀 흘리는 민초들의 끈질기고 치열한 삶 그려

돌 깨는 사람들, 1849년, 유화

쿠르베의 사실주의 회화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19세기 당시 그가 속한 사회, 프랑스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1830년 7월 혁명 후에도 새로운 군주와 부유한 귀족층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민중들은 선거권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 불황까지 덮치자 1948년 2월 견디다 못한 민중들의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이후 사회를 휩쓴 자유와 평등의 사상은 쿠르베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그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이 인정받고 자유가 보장되며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환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849년 작 ‘돌 깨는 사람들’은 그의 사실주의 회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무거운 돌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년과 망치를 들고 돌을 깨는 늙수그레한 이의 모습은 사회의 밑바닥 노동자들의 삶을 가감 없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 발을 돌 위에 얹고 바구니의 무게를 지탱하는 소년과 한줌 풀 위에 무릎을 고정한 채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돌을 내려치는 노인은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어 드러난 소년의 옆구리와 노인의 발뒤꿈치가 애처롭다. 가난한 이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루의 양식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현실이 여기에 있다. 소년의 팔뚝에 새겨진 근육과 망치를 든 손의 힘줄이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그들의 전 재산이리라.

이 작품에서 쿠르베는 고귀한 귀족들의 모습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뒤로 하고, 가난한 이들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가로 2.6m 세로 1.6m의 커다란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단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의 노동자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땀 흘리는 민초들의 끈질기고 치열한, 삶을 향한 자세였던 것 같다.

 

05_스스로의 삶에 집착하는 인간 내면의 이기적 본성 묘사

밀 까부르는 여인들, 1854년, 유화

많은 이들의 물감이 아깝다는 식의 비난을 묵살한 채,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더욱 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렸다. 1849년에서 1850년에 걸쳐 그린 ‘오르낭의 매장’은 그의 고향에서 벌어진 장례식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가로 6.6m 세로 3.15m의 대작 속의 주인공은 망자가 아니다.

망자는 이미 땅 속에 묻혀 그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데, 화면을 메우는 것은 장례식에 참석한 각양각색의 군상들이다. 그들의 표정은 실로 다양하다. 엄숙하게 장례를 집행하는 신부와 복사들, 슬픔에 잠긴 여인들이나 고인에 대한 추모보다는 각자의 생각에 잠긴 사람들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존의 회화에서 보여지는 죽음에 대한 신성함, 고인에 대한 미화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가 일상에서 보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오르낭의 매장에 대한 역사화’라는 원제로 발표된 이 작품의 평범한 인간 군상의 집합체가 당시 성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찬 성화나 굵직굵직한 사건과 찬미해야 할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역사화와 같은 반열에 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미술계는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쿠르베가 정작 그리려고 했던 사실은 망자보다는 스스로의 삶에 집착하는 인간 내면의 이기적인 본성 그 자체일 것이고, 그것이 바로 쿠르베를 사실주의 화가로 우뚝 서게 한, 진실을 향한 그의 시선일 것이다.

 

06_경의 받는 자와 바치는 자의 차이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1854년, 유화

한낮의 시골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왼쪽에는 브뤼야스와 그의 시종이 있고 오른쪽에는 쿠르베가 있다. 아주 일상적인 한때를 포착해 그린 1854년작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는 그 사소한 일상성으로 살롱전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작품이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일상성으로 인해 사실주의의 기틀을 세우고 후대에까지 이름을 남긴 사실주의 회화의 역작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 작품의 주인공은 쿠르베 자신일 텐데, 그는 등에 화구를 메고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그림을 그리러 야외로 나가는 중인 것 같다. 그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는 브뤼야스는 뒤에서 그를 보필하고 있는 시종과 개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는 쿠르베를 후원하고 있는 부유한 상인이다.

쿠르베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상대방을 내려다 보는 자세로 인사를 하고 있다. 쿠르베가 이 작품에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라는 부제를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마도 그는 자신이 돈의 위력에 굽히지 않는 고고한 자존심을 가진 예술가로 비춰지길 원했나 보다. 또한 자신은 완벽한 비율의 키 크고 잘생긴 사람으로 표현하고, 상대방은 대조적으로 왜소한 모습으로 그려 경의를 받는 자와 바치는 자의 차이가 보인다.

또한 같은 해에 그려진 ‘밀을 까부르는 여인들’에서는 평범한 농가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체를 들고 곡식을 까부르는 여인과 그 옆에 철퍼덕 앉아 쭉정이를 골라내는 여인의 손길이 마치 우리네 농촌 풍경을 보듯 정겹다.

 

07_리얼리즘… 스스로 이름 붙이고 스스로 세계에 선포

오르낭의 매장, 1850년, 유화

1855년 제2회 파리 만국박람회에 14점의 작품을 출품했지만 그 크기와 노동자를 그린 주제를 이유로 거절 당하자, 그는 박람회장 앞에 개인 전시관을 만들고 자신의 작품 40여점을 전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화풍이 ‘리얼리즘’이라는 것을 박람회에 참여한 온 세계 사람들에게 알렸다.

보통 화가들이 자신의 성향을 나타내는 여러 점의 작품을 발표한 뒤 평론가나 다른 사람들이 그 화풍의 이름을 붙여주는데 반해 쿠르베는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 그것을 세계에 선포했다.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가 주류를 이루는 미술계를 뒤엎는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건은 오직 살롱전 입선만이 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알릴 수 있다는 화가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 이후 쿠르베의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인상파 화가들이 살롱전에서 낙선하자 따로 ‘인상파 전’을 열어 전시를 했으니 화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08_자기 자신의 평가 토대로 풍속, 사상, 풍경 그려

절망에 빠진 남자, 1845년, 유화

이 만국박람회에서 거절당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쿠르베의 작업실’일 것이다. 가로 6m 세로 3.6m의 대작인 이 작품의 원제는 ‘화가의 아틀리에, 나의 7년에 걸친 예술 생활을 요약하는 실재의 우화’이다. 기다란 원제와 걸맞는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쿠르베의 대표작이 되는 기념비적인 화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쿠르베의 아틀리에, 그 정 중앙에는 쿠르베가 앉아 있는데, 그는 옷을 벗고 서있는 모델을 뒤로 한 채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숲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시인 보들레르, 철학자 푸르동, 후원자 사바티에 부부 등 그를 지지해주는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이 포진하고 있다.

왼쪽에는 노동자, 신부,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는 하층계급의 사람들 등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구성하는 생활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좋은 옷을 입고 개를 데리고 있는 밀렵꾼이 보인다. 이 사람은 그에게 모욕감을 주었던 나폴레옹 3세의 모습을 따라 그렸다고 한다.

이는 왕과 위정자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선포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평가를 토대로 세대상의 풍속과 사상, 풍경을 그려 나가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예술관이 집약되어 있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은 작품으로 보여진다.

 

09_여성 성기는 생명 잉태하고 출산하는 위대한 기관

쿠르베의 작업실, 1855년, 유화

쿠르베는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외에도 많은 풍경화와 누드화를 그렸다. 1866년작 ‘잠’은 그가 그린 누드화가 기존에 그려진 누드화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쿠르베는 여체를 신비화 시키고 신화나 종교의 메시지를 통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 했던 다른 누드화들과는 달리 사랑을 하고 잠을 자는 기본적인 욕망에 충실한 인간으로서의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회에서 금기시되지만 그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동성애라는 코드를 다루며 쿠르베는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갈아 넣은 것같이 보인다. 공공장소에서 전시되는 작품이 아니라 개인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기에 탄생이 가능했던 작품인 것 같다. 벌거벗고 서로 엉킨 채 잠든 두 여인의 모습에서 묘한 관능미가 느껴지는데, 섬세한 필력과 부드러운 색상이 아름다운, 그의 완숙한 기교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같은 해 그려진 ‘세상의 기원’은 여성의 나체는 성스럽게 그려져야 한다는 기존의 미학을 뒤집고, 여태껏 그 누구도 그리려고 시도조차 못해본, 음모로 뒤덮인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그린 그림이다. 여인의 가슴 부분은 천으로 가려져 있고 얼굴이나 팔다리는 아예 그리지도 않은 채 오로지 여성의 성기만을 확대해 그린 이 작품은 당시 크나큰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에게 있어 여성의 성기는 은폐하고 터부시 되어야 할 부분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위대한 기관이었다.

이 작품은 쿠르베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 발상의 참신함은 후대 미술가들의 찬사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패러디하거나 행위예술의 모티브로 삼았다. 사람들은 50cm가량의 이 조그만 작품을 들여다 보려고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다. 쿠르베가 보면 실망스럽겠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성을 향한 은밀한 욕구를 감추지 못하는 것 같다.

 

10_영원한 반항아이자 혁명가

해먹 (처녀의 꿈), 1844년, 유화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공화제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그 무능함으로 인해 국정이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이 일어나자 나폴레옹 3세가 생포되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1871년 독재에 항거해 혁명을 일으킨 민중은 최초로 자치정부를 세웠는데 이것이 ‘파리코뮨’이었다. 쿠르베는 ‘파리코뮨’에 참가해 여러 가지 활동을 했지만 정부가 다시 시민들을 무력으로 항복시키며 끝나게 되었다.

이때 쿠르베는 방돔광장의 나폴레옹 1세의 동상을 파괴한 주동자로 잡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많은 벌금을 내기로 하고 풀려난 쿠르베는 고향 오르낭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혁명도 실패하고 고향을 떠나 실의에 빠진 쿠르베는 계속 작품생활을 했지만, 1877년 간질환으로 인해 58세라는 젊은 나이로 스위스에서 쓸쓸하게 임종을 맞았다.

1870년 정부가 문화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하려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이 같은 사실을 신문에 공개하기도 했던 쿠르베는 영원한 반항아이자 혁명가였다. 정치적 사회적 혁명가 이전에 사실주의 창시로 미술계에 혁명을 일으킨 쿠르베는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 사실주의자, 곧 진실의 참다운 벗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나는 내 원칙을 버리지 않고 내 예술을 위해 평생을 살고 싶다.”는 자신의 신념을 일생 동안 실천하며 살아온 위대한 예술가이다.

 

 

* 다음에는 윌리엄 터너의 소용돌이치는 색채의 폭풍우와 만나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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