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화가의 길 추구한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

검고 굵은 선과 두터운 마티에르로 이뤄진 독특한 화풍 구축

조르주 루오 (Georges–Henri Rouault, 1871년~1958년)는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 도예, 스테인드 글라스 등 여러 방면에서 아름답고 신비한 작품을 남긴 프랑스 화가이다. 그는 검고 굵은 선과 두터운 마티에르로 이루어진 독특한 화풍으로 자신의 신앙과 예술을 결합하여 신비로운 종교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01_야수주의 화가, 표현주의 화가, 종교 화가

교외의 그리스도, 1924년 유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라고 한 말은 그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드러낸 말일 것이다.

격변하는 그 시대 다른 화가들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변화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로 회화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동안 그는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여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선을 향한 종교적 시각을 표현하려 했다.

두터운 물감과 자유분방한 터치로 야수주의 화가라고 하고, 인간 내면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표현주의 화가라고도 하지만, 진정한 그의 존재감은 그 시기에 어느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 종교 화가의 길에서 드러난다.

오랜 세월의 부침 끝에 뒤안길로 사라져 가던 종교화는 그의 손길에 의해 다시금 미술사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찬란한 예술성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신을 향한 경외와 인간을 향한 사랑을 오롯이 새겨 놓는다.

 

02_낮은 곳으로 임하는 예수 정신 근본적으로 실천

그리스도의 수난, 1953년~1956년 유화

나는 오래 전 루오의 작품  ‘붉은 옷의 광대’ (1931~1939)와  ‘그리스도의 초상’ (1937년)을 접하고 느낀 전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검고 투박한 몇 개의 선들과 절제된 몇 가지의 색채 만으로 이렇게 깊은 영혼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니… 그 시절의 나는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데생으로 아름답게 표현된 것이 회화라는 좁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관념을 단번에 깨부순 것이 루오의 작품이었다.

남에게 웃음을 주는 어릿광대의 삶에 숨겨진 회한과 억눌린 삶의 무게에 지친 모습이 ‘붉은 옷의 광대’의 홀로 있는 시간, 웃음의 가면을 뚫고 나온다. 전면을 응시하는 그의 눈은 사실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

입을 반쯤 벌리고 아무 희망도 없이 잠깐의 휴식에 자신을 내맡긴 모습…  깊은 절망과 허탈함을 안고 구원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는 그의 영혼과의 만남은 내 영혼 깊숙이 각인되었고, 이 후 루오라는 화가가 추구하는 예술과 구원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초상’에서 예수는 작업복을 입은 채 불쌍한 이들을 향해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마치 붉은 옷의 광대를 위로하는 듯… 십자가나 기적의 장면이 아님에도 예수님의 큰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 각각 다른 두 작품이 위로를 필요로 하는 이와 위로를 주는 이로 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중세와 르네상스에 표현되던 웅장하고 경건한 종교화의 사실적 묘사와는 너무도 다르게, 소박하지만 영혼이 담긴 필체로 고귀한 성자들의 모습대신 매춘부와 광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를 그린 그의 작품은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예수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03_스테인드 글라스 색채와 빛에 매료, 미술 공부 결심

그리스도의 얼굴, 1937년~1938년 유화

루오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 프랑스혁명의 한복판인 1871년 파리의 후미진 골목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공이었고, 어머니는 옷 수선을 하는 재봉사로 전형적인 프랑스 하층 계급의 가정이었다.

영세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교육은 사치였고 예술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환경이었지만, 어린 루오는 10살 즈음부터 신문에 실린 석판화를 보며 미술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14세가 되자 스테인드 글라스 복원 공방에 들어가 견습공이 된 루오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채와 빛에 매료되어 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검은 색의 굵은 선이 오묘한 색채를 감싸는 형태는 그가 이 당시 배운 스테인드 글라스의 형태에 기인하는 것 같다.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에 입학한 그는 낮에는 견습공으로 밤에는 학생으로 시간을 쪼개며 피나는 노력을 하였고, 마침내 4년 후 모든 미술학도들의 로망인 에콜 드 보자르 (파리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04_어둡고 채도 낮은 색상이 검은 색과 어우러져…

그리스도의 초상, 1937년 유화

그리고 그곳에서 구스타프 모로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모로와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루오 인생의 정신적 지주가 될 정도로 친밀하고 중요한 관계가 되었다.

루오는 모로의 예술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학생이었고, 모로 역시 그를 동료 미술가로 인정해 둘은 예술적 동반자의 길을 이어갔다. 모로의 사후 1903년 많은 제자들을 제치고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의 관장이 되어 오랜 시간 미술관을 보살핀 것으로도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1898년 항상 의지하고 따랐던 스승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 그에게 방황의 시기가 찾아왔다. 스승의 화풍을 따르던 그는 몇 년 후 은둔과 방황을 마치고, 내면의 폭풍을 표출하듯 거칠고도 강렬한 터치로 사회 밑바닥 군상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2년작 ‘거울 앞의 창부’는 그러한 격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여성적인 아름다움은 보여지지 않는다. 여인의 육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생계의 수단이 될 뿐이다. 거울에 비친 여인의 짜증스러운 표정이 오늘도 먹기 위해 손님을 받아야 하는 창부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인의 유방과 음모까지 그려져 있지만 관능적인 느낌은커녕, 고단한 현실에 눌려 그저 하나의 물체처럼 느껴진다. 사방으로 난삽하게 그어진 선들은 여인의 내면처럼 어지럽고 삭막하다. 루오가 여인을 통해 나타내려던 것은 무엇일까? 여인이지만 여인의 아름다움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억눌려, 해어진 행주마냥 너덜너덜해진 한 인간의 절규가 아닐까?

모로의 교실에서 만난 마티스와 마르케는 루오와 각자의 예술관에 동감하며 친하게 되었는데, 1905년 마티스와 살롱 도톤느 전에 출품하여 야수파의 출범을 알린 루오는 그 강렬하고 깊은 색채와 많은 것이 생략된 추상적인 표현으로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루오의 작품은 마티스의 생생하고 화려한 원색과는 다르게, 어둡고 채도가 낮은 색상이 검은 색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화면이 그 특징이었다.

 

05_루오의 작품세계는 ‘미제레레’ 위한 밑바탕

늙은 왕, 1937년 유화

루오의 대표작이자 일생의 역작 ‘미제레레’는 시편 51장 3절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씀으로 제목을 삼았는데, 이는 신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이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의 미제레레 즉, 비애로 자신의 종교관을 피력한 것이다.

그는 “나는 망망대해의 미세한 먼지, 바람에 씻기는 가련한 선원, 어두운 암흑 속에서조차 성스러운 빛을 사랑하노라.”라는 말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한다.

루오의 신앙고백서이기도 한 이 판화집에서는 멸시 받는 그리스도, 불쌍한 부랑자, 버려진 자들의 고뇌가 물씬 묻어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가 피어나듯 그 안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화가의 부단한 노력과 선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드러난다.

에칭과 애쿼틴트 기법으로 장장 10여년의 세월에 걸쳐 제작된 이 작품은 총 58매의 동판화로 구성된 판화집이다. 1장부터 33장까지의 주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이고, 34장부터 58장은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참상을 다루고 있다.

평론가들이 루오의 작품세계는 ‘미제레레’를 위한 밑바탕이거나, ‘미제레레’에 색을 입힌 확장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판화집은 루오 안에 있는 기쁨과 슬픔, 고뇌, 신앙 등 모든 것을 담고 있다.

 

06_공증인 보는 앞에서 작품 315점 불태워

미제레레, 1927년 동판화

사실 ‘미제레레’는 앙부르와즈 볼라르라는 유명 화상의 후원에 의해 만들어졌다. 볼라르는 르노아르, 피카소, 세잔 등 당시를 풍미하던 화가들의 후원자로, 젊고 유망한 화가들의 그림을 사서 부유층에 파는 화상이었다.

그의 후원이 없었다면 ‘미제레레’가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겠지만 그로 인해 받은 고통도 컸다. 가난하고 힘없는 루오는 그가 아트리에를 얻어주고 작품 비용을 대는 대신, 1917년부터 시작해 이후 완성되는 모든 작품의 우선권을 볼라르가 가진다는 계약에 서명해야 했다.

그리고1939년 볼라르가 죽자 그의 상속인들은 루오의 작품을 차지하기 위해 루오를 아트리에에 못들어오게 하고, 그의 미완성 작품들을 팔아 돈을 챙기려고 한 사건이 벌어졌다. 루오는 법에 호소했지만 재판은 장장 5년간 계속되어 1944년에야 승소하게 되었다. 1917년 시작된 ‘미제레레’가 1948년에야 판화집으로 묶여 출판된 이유였다.

루오는 이미 세월이 흘러 자신의 미완성 작품들을 완성할 수 없다고 느껴 공증인이 보는 앞에서 작품 315점을 불태워버렸다. 당시 고가로 팔리던 그의 작품 시세로 보아, 돈을 마다하고 불태워버린 사건은 작품에 대한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높은지 잘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 불의와 물욕에 굽히지 않은 노화가의 기개를 보여준 전후무후한 사건이었다.

 

07_1930년대 이후 작품에선 색채의 파노라마 펼쳐

베로니카, 1945년 유화

‘교외의 그리스도’는 1924년에 제작되었는데, 루오 특유의 어둡고 중후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어둔 밤 인적이 끊어진 황량한 거리에 그리스도와 두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예수는 아이들과 더불어 걸으며, 길 잃은 아이들을 지켜주는 듯하다.

검푸른 하늘에 높이 떠있는 달빛이 스산하게 비추고,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은 불 꺼진 창들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어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루오는 이 작품에서 예수를 어둠을 헤치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로 그린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길 잃은 어린아이고 의지할 곳은 예수밖에 없다는 루오의 신앙이 느끼지는 작품이다.

1930년대 이후 루오의 작품은 전에 볼 수 없던 색채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블루 계열의 색조에서 벗어나 노랑, 빨강, 녹색, 파랑 등의 원색들이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러한 색상의 변화는 특히 1937년 작 ‘늙은 왕’과, 같은 해 제작된 ‘그리스도의 초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늙은 왕’은 화려한 붉은 옷을 입고 왕관을 쓴 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왕의 표정은 화려한 장신구에도 불구하고 근심이 가득해 보인다. 오랜 세월 왕좌를 지키기 위해 전쟁과 음모 속에서 발버둥쳤지만, 이제는 늙고 병들어 주위에 아무도 안 남은 고독한 모습으로 보인다. 권력과 부귀 영화, 환락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껍질만 남아 있는 허망함을 그린 듯하다.

 

08_성녀 베로니카에 대한 애정과 경외가 은은하게

붉은 옷의 광대, 1931년~1939년 유화

1945년 그려진 ‘베로니카’의 주인공 성녀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준 여인이다.

모든 사람이 무고한 이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퍼부을 때, 제자들이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때, 숭고한 용기로 앞으로 나아가 자비의 손길을 뻗은 여인… 그 수건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찍히는 기적이 일어나 예수님의 최초의 초상화이자 ‘베로니카의 수건’이라는 성물이 되었다.

중세에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전시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성물을 보러 순례여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베로니카의 수건’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주옥 같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작품 속의 여인은 마치 수녀 같이 십자가가 새겨진 두건을 쓰고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띠고 있다. 커다랗고 검은 눈망울은 밝은 얼굴색과 어우러져 한없이 순수한 그녀의 내면을 나타내고 있다. 루오의 트레이드 마크인 굵고 검은 선은 많이 희석되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은은한 파스텔 톤을 감싸 안고 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숭고한 자비심이 퍼져 나가는 것만 같다. 만년의 화가가 힘을 빼고 정열을 안으로 갈무리한 채 그려낸 작품에서 성녀 베로니카에 대한 애정과 경외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09_예수님의 얼굴 그린 작품들 ‘루오의 그리스도’로 표현

성안, 1929년~1939년 유화

루오는 수많은 성화를 그렸는데 그 중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작품들은 ‘루오의 그리스도’라는 말로 표현되듯 루오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성안’, ‘그리스도의 얼굴’, ‘그리스도의 수난’등 여러 작품에서 예수는 전체적으로 긴 얼굴에 둥글고 커다란 눈을 감거나, 길다란 코와 수염이 굵고 검은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고, 그 심플한 스케치 속에 예수가 가지고 있는 속성, 신적인 숭고함과 인간에 대한 자비가 은은하게 표현된다.

1956년 작 ‘그리스도의 수난’은 겟세마네동산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는 옆모습을 그린 듯한데, 녹색을 바탕으로 한 컴컴한 배경 속에서 땀 흘려 기도하는 예수의 고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잔을 받으려는 순종의 의지가 보여지는 것 같다.

또한 1938년 작 ‘그리스도의 얼굴’은 그린색과 노랑의 절묘한 하모니가 아름다운 작품으로 우툴두툴한 표면이 검은 선에서 파생된 색을 머금어 보다 입체적인 질감을 보이고, 아치처럼 둘러싼 아라베스크식 테두리가 더욱 성스러운 그리스도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한다.

반면에 1936년에 그려진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보다 또렷하고 매끄러운 질감으로 톤 다운된 빨강과 노랑, 파랑이, 형태를 이루는 검은 선에 둘러싸여 있다. 중앙의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이 아니라 땅 위에 굳건하게 서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태산과 같은 믿음을 주고 있는데, 이는 루오의 굳건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10_살아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랑 받은 예술가

십자가의 그리스도 1936년 유화

그 시대 많은 화가들이 생전에 주목을 받기 보다는 사후에 그 가치가 올라간 경우가 많았는데, 루오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25년에는 프랑스가 주는 레죵도네르 훈장을 받고, 1945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1948년에는 베니스 비엔나레, 1953년에는 미국, 도쿄에서 전시를 하는 등 피카소 마티스와 더불어 프랑스가 자랑하는 국민화가로 대우를 받았다.

1958년 그가 사망하자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그의 장례를 치러 그의 명복을 빌었다. 루오는 1908년 마르트 르 시다네르와 결혼해 4자녀를 두었는데, 그들은 엄청난 재산권을 포기하고 모든 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그 중 1000여점은 퐁피두센터에 소장되어 노화가를 기린다.

그의 저서, ‘인간과 작품’ 머리말에서 루오는 말한다. “예술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에 대해 말하지 말아달라. 나를 혁명이나 반항의 횃불처럼 그렇게 중요시하지 말라. 내가 한 일은 하찮으니까. 그것은 밤의 절규, 낙오자의 오열, 목 멘 웃음이다. 세상에서는 날마다 나보다 가치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일 때문에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평생을 신앙 안에서 살며 고통 받는 이들을 감싸 안아, 작품으로 그들에게 빛과 사랑을 베푼 노화가의 삶이 아름답다.

 

* 다음 순서에서는는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 만나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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