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생의 천재 에드가 드가

움직이는 여인이 빚어내는 선의 궤적들… 데생 통해 분석, 연구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에 앉아 발레 슈즈를 신는 소녀, 커다란 홀에서 하얀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배우는 소녀들, 무대에서 멋진 춤을 추는 발레리나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드가의 작품들은 19세기 파리의 아름다운 정경으로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을 선사한다. 조그만 파스텔화 하나에도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그의 작품들은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01_대부분의 작품들, 여성 다뤄

14세의 어린 무용수, 1881년, 조각

빛과 선의 아름다운 조화로 움직이는 인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한 그의 화풍은 춤추는 여인의 아름다운 곡선과 경마장 말들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1834년~1917년)는 이 움직임의 미학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데생을 했고, 그의 데생은 그 자체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어 사람들은 그를 데생의 천재로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의 드가의 작품은 여성을 다룬다. 드가는 여성을 혐오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일생을 보냈지만, 인체의 운동감이 주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차가운 관찰자의 눈으로 움직이는 여인이 빚어내는 선의 궤적을 수많은 데생을 통해 분석하고 연구했다.

탄탄한 데생과 인상파의 빛과 색채의 표현을 배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화가.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나를 무희들의 화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희란 내게 아름다운 옷을 그리고 움직임들을 살려내는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02_어머니의 불륜으로 평생 여성혐오자라는 굴레를…

경마장에서, 1880년, 유화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숨진 진정한 파리지앵, 에드가 드가의 집안은 프랑스 상류층 부르주아 계급으로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로 이어져 내려온 금융가의 집안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부심이 넘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그의 나이 12세, 한참 민감한 나이에 부딪친 어머니의 불륜이라는 사건은 그에게 평생 여성혐오자라는 굴레를 씌워 버렸다.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안고 불행한 삶을 살던 그에게 그림이란 하나의 돌파구였으리라. 대를 이어 법학과 금융을 공부해야 했던 드가는 방향을 틀어 1855년 파리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신고전주의 대가인 앵그르의 제자 구이 라모드의 화실에서 고전주의 화법을 배웠다.

데생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그의 데생 실력은 이때 다진 기초가 그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19세기 화가들의 요람이 된 루브르박물관에서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표현의 스킬을 발전시켜 나갔다.

1855년 작 ‘스무 살의 자화상’은 이러한 배움을 충실히 이행한 작품으로, 어두운 바탕에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그려진 인물은 전통적인 신고전주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 평범할 수 있는 사실적 초상화에서 변화를 주는 것은 인물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상처받은 영혼의 그림자이다.

옆을 바라보는 시선과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표정 속에 내면 속의 불안과 세상을 향한 불만이 공존하는 복잡한 내적 갈등이 잘 표현되어, 이 어린 화가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비롯해 일생에 걸쳐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드가는 그 자신조차도 제삼자의 날카로운 관찰로 분석해, 나이에 따른 외모의 변화뿐만 아니라 내면의 소리까지 담아내고 있다.

 

03_그의 성격은 한마디로 성실과 인내

꽃바구니를 든 무용수, 1878년, 유화

1856년 이탈리아로 떠난 드가는 3년간 그곳에 체류하며 박물관, 미술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연구했다. 그의 성격은 한마디로 성실과 인내인 것 같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작해서 이탈리아의 거장들까지 수많은 드로잉과 모사를 통해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 닦았으니 말이다. 특히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 만테냐, 홀바인, 푸생, 보티첼리등의 작품들의 연구는 그가 초상화 작업을 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1859년 작 ‘벨렐리 가족’은 드가의 초기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교한 데생과 안정적인 구도로 이루어진 신고전주의 화풍의 그림이다. 그의 고모 부부와 어린 딸들을 그린 이 작품에서 왼쪽에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어머니와 두 딸이 삼각형 구도로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안락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는 남편이 있다. 남편은 뒤로 돈 채 의자의 뒷부분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도라 그들은 마치 단절되어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버지를 여읜 여인의 창백한 얼굴과 아이들의 무심한 표정에는 슬픔이나 기쁨 등의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고, 남편의 시선에도 가족을 향한 애정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우울하고도 적막한 가족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에서 그의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시각이 느껴진다.

 

04_인상파 화가보다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 선호

뉴올리언스 목화 거래소, 1873년, 유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드가는 많은 작품을 그리며 살롱전에도 계속 출품을 하면서 미술 활동을 계속했다. 이 시기에 마네를 만나 서로 예술적 토론도 하면서 친해져 모네, 피사로도 알게 되었고, 일본 판화의 동양적 미술 표현방식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시야를 넓혀 신고전주의와 역사화가로서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표현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1867년작 ‘젊은 여인의 초상’은 그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그의 초상화 작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마치 살아있는 듯 표현된 피부와 눈, 입매에서 들어나는 여인의 모습에는 젊음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순수한 성품까지 드러나 있어 가히 초상화의 최고봉이라 볼 수 있겠다.

드가는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국민군 포병대에 입대해 나라를 지켰다. 전쟁은 그에게 많은 경험을 주었고, 그는 역사보다는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현실에 주의를 돌려 주위의 생활 모습을 그리게 되었다.

1872년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뉴올리언스에 간 드가는 미국 산업의 역동적인 발전과 신생 국가가 내뿜는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1873년작 ‘뉴올리언스 목화 거래소’는 이러한 그의 감상과 신문물을 향한 호기심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그가 움직이는 인체의 한 순간을 포착해 영구히 보존하려는 노력은 사진기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는 것 같다. 마치 스냅 숏으로 목화 거래가 이루어지는 사무실의 한 때를 찍어 놓은 듯한 이 작품에서는 거래소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몰두하며 자유롭게 어우러져, 금세라도 그림 속의 사람들이 움직일 것 같고 부산스러운 소음도 들리는 듯 하다.

초창기 인상파의 결성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드가는 1874년부터 대부분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하였고, 이는 그가 인상파 화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가 야외에서 빛이 있는 동안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작업의 특성상 정교하지 못한 데생이 주를 이루는 점을 간과하지 않고 정확한 자신의 데생 위에 인상파의 자유로운 붓터치를 접목시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인상파 화가로 불리는 것보다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05_발레리나 주제로 여인의 곡선 표현

다림질하는 두 여인, 1884년, 유화

1871년 이후 발레리나를 주제로 여인의 곡선을 표현하기 시작한 드가는 발레라는 매개를 통해 움직이는 인간의 몸이 표출하는 아름다움을 화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1871년에서 1874년 사이 그려진 ‘발레 클라스’는 한마디로 데생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은 홀 안에 많은 무용수들과 교수가 있는 이 작품에서 인물 하나하나는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살아있는 생명력을 뽐낸다. 많은 인물들이 서로 다른 포즈로 섞여있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드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예술에서는 같은 대상을 열 번, 백 번 반복해서 그리는 것이 기본이다. 어떤 동작도 우연인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피아노 위에 올라 앉아 지루한 듯 고개를 빼고 있는 소녀, 심각한 얼굴로 부채를 들고 선생님 말씀을 경청하는 소녀의 뒷모습,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스텝을 밟는 아이들과 끼리끼리 뭉쳐 연습을 하는 아이들, 뒤에 앉아 팔짱을 끼고 친구와 소근거리는 아이 등 그들 모두는 각기 다른 포즈로 가운데 지팡이를 짚고 우뚝 서있는 선생님을 향하고 있는 안정된 구도이다. 발 모양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다른 학생들의 모습은 각기 개성을 가지고 전체에 녹아 들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연상시킨다.

 

06_부드러운 색상으로 표현된 빛과 그림자의 조화

드가 자화상, 1855년, 유화

또한 1874년 작 ‘무대 위의 두 발레리나’에서는 온통 그린색으로 뒤덮인 무대 위에서 두 소녀가 춤추고 있다. 마치 숲 속의 요정과도 같은 두 소녀의 몸짓이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를 연출한다. 오른 쪽으로 두 팔을 뻗고 양 발을 곧추세운 무희는 곧바로 다른 동작으로 이어갈 듯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인상파적인 화법으로 거칠게 그려진 배경과 바닥의 직선들이 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나풀거리는 두 무희의 동작은 살아있는 듯해서 금새라도 앞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다.

‘카페 콩세트 (개의 노래)’ (1875~1877)를 보면 화려하게 차려 입은 퉁퉁한 여가수가 강아지 앞발처럼 손을 내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공원의 수풀 위로 드문드문 떠오른 가스등이 여러 개의 달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가운데, 환한 무대의 조명 아래 서있는 여인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는다.

거친 터치로 그려진 자유로운 포즈의 군상들은 별다른 디테일 없이도 자연스럽게 군중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부드러운 색상으로 표현된 빛과 그림자의 조화 속에서 파리의 정취가 입체감 있게 다가온다.

 

07_신고전주의의 탄탄한 데생과 인상주의의 자유분방한 터치

무대 위의 두 발레리나, 1874년, 유화

무대에서 보이는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동작들은 아쉽게도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지만, 드가는 그 사라져가는 순간을 붙잡아 캔버스라는 공간에 영구히 보존해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창조했다.

1878년 작 ‘꽃바구니를 든 무용수’는 신고전주의의 탄탄한 데생과 인상주의의 자유분방한 터치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40줄에 접어든 드가의 원숙한 기교와 역량, 대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양 팔을 뻗고 한 발을 든 무희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묘사되어, 여체의 곡선이 가지는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된다. 배경의 무대장치는 간결하고 대담한 터치로 그려졌고, 공연을 끝내고 무대 뒤편에서 휴식을 취하는 무용수들은 흐릿하게 그려져, 섬세하게 표현된 무대 앞 쪽의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그가 그린 발레리나를 보고 있노라면, 아름다운 음악과 환상적인 발레 공연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그려진 작품에서,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갈채 속에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환희에 차있는 발레리나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08_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조예 깊어

발레 클라스, 1874년, 유화

드가는 수많은 작품에서 발레하는 무희들을 그렸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그린 것은 몇 안되고 스테이지의 뒷모습이나 발레를 배우는 학생들의 모습, 발레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사적인 모습들을 많이 그렸다. 그는 무대 위의 찬란한 영광보다는 어린 무희들의 실제 생활을 즐겨 그려, 고단한 그들의 현실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드가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조예가 깊어 춤추는 여체의 모습을 조각으로도 여러 점 제작했다. 1881년의 조각 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는 밀랍으로 만든 작품으로 이 작품은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보여주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조각을 누드로 제작하고 그 위에 천으로 된 발레복을 입혔다는 점이다.

머리카락과 발레 슈즈도 따로 제작해 붙이고 그 위를 밀랍으로 처리한 획기적인 방식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을 이해 못해 여러 말이 많았지만 실로 선구자적인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작품은 후에 청동으로 주조되어 총28점이 세계의 미술관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09_‘파스텔의 화가’라는 별명도

벨렐리 가족, 1859년, 유화

1880년대 드가는 발레리나뿐만 아니라 목욕하는 여인, 매춘부, 세탁부등 사회 하층계급의 여인들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그릴 대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낸다. 그 대상은 어떤 고귀하고 아름다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것은 한 여인이 될 수도, 꽃이나 말이 될 수도 있다. 그에게 있어 이 모두는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 피사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의 주인공은 여인이나 말이 아니라 순간 그 자체로 보여진다.

‘경마장에서’ (1877~1880) 역시 주인공은 말이나 기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담은 순간의 포착이다. 푸르른 풀밭 위에 달리는 경주마와 길들이는 기수들, 그 옆을 지나가는 마차 안의 여인이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느껴진다.

1884년에 그린 ‘다림질하는 두 여인’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순간의 포착은 자연스레 우리를 세탁장으로 인도한다. 등장하는 퉁퉁한 모습의 두 여인은 고된 노동에 찌들어 피곤한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어둠침침한 실내에서 하품을 하는 여인과 힘들여 다림질을 하는 여인의 한 때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젊은 날의 드가는 유채로 그림을 그렸지만, 이후 파스텔의 매력에 빠진 그는 파스텔을 즐겨 사용해 파스텔의 화가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그는 파스텔로 제작된 여인의 누드인 ‘머리 빗는 누드’와 ‘목욕통 속의 여인’ 등 여러 점을 그렸는데, 그 중 ‘목욕통 속의 여인’은 1886년 제8회 인상파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조그만 목욕통 안에 서서 수건으로 목욕통 바닥을 닦는 듯한 포즈의 여인에게서 전통적인 여인의 누드가 가지는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은 안 보인다. 오직 인체의 운동감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듯 근육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평범한 여인의 일상만이 느껴진다.

 

10_시력상실 후엔 밀랍조각으로 예술에 대한 갈망 달래

카페 콩세트 (개의 노래), 1877년, 유화

만년의 드가는 지병이던 눈 건강이 악화되어 햇빛을 보면 고통을 느껴 집안에서도 커튼을 치고 생활할 정도로 시력이 약화되었다. 1897년 그린 ‘푸른 무희들’은 그가 완전히 시력을 잃기 얼마 전에 그린 작품으로 50년이 넘는 화가로서의 경험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 넣은 듯 빗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붓터치와 환상적인 색의 조화, 춤추는 무희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표현한 선 등 완숙한 기교로 우리를 완벽한 미의 세계로 초대한다.

1907년부터 완전히 시력을 잃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그는 회화대신 밀랍으로 조각을 하는 것으로 예술에 대한 갈망을 달랬다.

드가는 평생 결혼도 안 했고 모델이나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당시 화가들이 문란한 성생활을 하고 여성을 노리개로 삼은 것보다는 차라리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받은 그가 더 깨끗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그저 자존심 강하고 괴팍한 성격 탓에 과격한 말도 했지만 그는 적어도 여자를 인간 그 자체로 대했고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외롭게 은둔생활을 하며 대중과 미술계에 거리를 둔 드가는 1917년 83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랜 세월 오로지 예술만을 위해 살다 삶을 마감한 그가 주문한 묘비명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간단명료하다.

“드가는 드로잉을 참으로 사랑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묻어나는 코멘트가 아닌가!

 

* 다음 호에서는 심오한 영혼의 울림을 표현한 종교적 색채의 화가 조르주 루오와 만나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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