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기적 발상과 천재적 예술성으로 현대미술 흐름 자체 바꿔놔

피카소, 마티스와 더불어 현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불리며 그를 빼놓고는 현대미술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술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년~1968년)은 획기적인 발상과 천재적인 예술성으로 회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현대미술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현대미술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은 위대한 화가이다.

 

01_설치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 도입

L.H.O.O.Q. 1919년

개념미술의 창시자이자 현대미술의 신화로 남은 그는 레디 메이드 (기성품)를 미술의 세계에 편입시키고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설치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는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초적 물음을 던지는 그의 작품은 기존의 미술이라는 기본적인 관념을 뒤집어엎고 미술의 창조에 대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레디 메이드라는 개념을 창시해 평범한 일상용품도 예술가가 선택해 의미를 부여하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 그는 미술이 단순한 시각의 영역에서 해방되어 정신과 영혼을 포괄하는 우주적 개념을 표현하기를 원했고, 이러한 개념미술은 20세기 미술을 이끌어가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02_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교류, 미술 안목 넓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1912년

1887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블랭빌에서 태어난 뒤샹은 공증인인 아버지 밑에서 6남매중 세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이 유복한 집안의 유전자는 예술면에서도 특출나 그의 두 형도 조각가와 화가였다.

이러한 예술적 소양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라난 뒤샹 역시 어릴 때부터 미술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19세에 파리로 와 아카데미 줄리앙에 다녔고, 신문 삽화와 포스터를 그리던 뒤샹은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미술의 안목을 넓혀갔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보고 이해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그림을 그려봤다”고 말한 것처럼, 호기심 많고 탐구적인 그는 인상주의부터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입체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법을 화면에 실험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발전해나갔다.

 

03_입체파와 미래주의 혼합으로 역동성 표현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발가벗겨진 신부조차도, 또는 커다란 유리 1915~1923년

1912년 제작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No.2’는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의 연속동작을 한 화면에 집어넣어 입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 신기술인 움직이는 사진 즉, 활동사진을 회화에 응용한 작품으로 영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릿지의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의 사진연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기하학적 선들이 춤추는 듯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여인의 형태보다는 덩어리와 선들이 주는 운동감을 느낄 수 있다. 모든 대상을 기계화하여 형태를 해체하고 분석해 그 안에 존재하는 운동감과 속도감을 표현하는 미래주의적 시각으로 표현돼 입체파와 미래주의의 혼합으로 움직임의 역동성을 나타낸 걸작이다.

이 파격적인 작품은 1912년 파리 앙데팡당전에 출품되었지만 당시 처음으로 입체파가 선보인 이 전시회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소위 주류가 아닌 초짜 예술가에 대한 텃세로 받아들인 뒤샹은 1913년 미국 최초의 국제 근대미술전 ‘아모리 쇼’에 이 작품과 같은 해 제작된 ‘처녀에서 신부로 이르는 길’ 등 작품 4점을 출품해 큰 호응을 받고 입체파 화가로서 입지를 단단히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들 이후 뒤샹은 입체파에서 벗어나 설치미술이란 개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04_개별성과 예술성으로 존재가치 변화시켜

봄 속의 젊은 남녀 1911년

20세기에 이르러 격변하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문물들은 사람들의 일상을 흔들고 정신마저도 물질문명에 사로잡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제작된 기계문명의 산물들은 점차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기에 뒤샹은 이러한 기계적 산물들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을 타파하고 가장 인간적인 특성인 개별성과 예술성으로 그들의 존재가치를 변화시켜 버린다.

1913년에 제작된 ‘자전거 바퀴’는 그가 기성품 즉, 레디 메이드 제품을 예술작품으로 활용한 최초의 시도로 자전거 바퀴와 의자라는 아무 개연성 없는 두 개의 사물을 결합시켜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창출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떤 사물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자리에서 만나 우리에게 기이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화법을 사용했지만, 초현실주의보다는 최초로 레디 메이드라는 개념을 보여준 작품으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뒤샹은 이 작품에서 물체의 운동력을 미술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물리적으로 운동하는 키네틱 아트 (kinetic art, 작품 자체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포함하는 예술작품)와 팝 아트 (pop art, 대중문화적 시각이미지를 이용한 예술작품) 등 후대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기초가 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1914년 ‘표준정지 장치의 회로’에서는 미터법 표준에 대한 저항으로 무작위적으로 실들을 3번씩 떨어뜨리고 재배치하는 방법으로 예술가에 의해 초래된 우연성의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과학과 수학에 기반을 두고 면밀히 계산하여 예술에 응용한 뒤샹의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05_레디 메이드와 개념미술의 정수 표현

샘 1917년

‘샘’은 1917년 제작된 레디 메이드 작품이다. 미술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디에도 그림을 그린 흔적은 없고 소변기 하나만이 덩그라니 놓여있는, 참으로 보는 사람을 경악케 한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적 작품이자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가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기로 제작된 소변기에 R.Mutt라는 서명을 함으로써 이 기성품 소변기는 개별성을 획득하게 된다. 인간이 각기 자신의 개성을 갖듯 이 소변기 역시 다른 기성품 소변기와는 구별되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르셀 뒤샹이라는 화가가 어떤 한 소변기를 택해 사인을 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생겨난 가치라는, 사물의 존재이유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이 작품은 뉴욕 그랜드센트럴팰리스에서 열린 미국독립작가협회 (앙데팡당)전에 제출되었는데, 애초에 참가비를 내면 누구나 작품을 낼 수 있는 앙데팡당전의 시스템상 그의 소변기는 제출될 수는 있었지만 전시장에 전시될 수는 없었다.

워낙 획기적이고 타인의 상상을 불허하는 이 요상한 작품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해 전시장에 전시하기에는 수많은 논란이 예상되었기에, 전시회측은 “원래 자리에서는 유용한 물건이었을지언정, 그 자리는 미술 전시회가 될 수 없으며 미술작품이라는 정의에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샘’의 전시를 불허했다. 뒤샹은 이를 억압으로 인지하고 협회를 탈퇴함으로 자신의 항의를 표명했다.

전시를 할 수 없었던 이 작품은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해 다다 전문잡지 <더 블라인드 맨>에 실렸다. 그는 이 잡지에 자신의 작품을 옹호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 “Mutt씨가 ‘샘’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흔한 물품 하나를 구입해 새로운 제목과 관점을 부여했고 그것이 원래 지니고 있던 기능적 의미를 상실시키는 장소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 오브제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낸 것입니다”라고 썼다. 이 말이야말로 레디 메이드와 개념미술의 정수를 표현하는 작가의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06_받아들이기 힘든 조합으로 새로운 예술세계 개척

에로즈 셀라비 1920년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1960년대에 일어나 세계를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의 잉태를 느낄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이 내포하고 있는 이성중심주의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기존구조의 해체와 탈 중심적인 다원적 사고, 탈 이성적 사고가 주축을 이루는 개념 즉, 합리적인 이성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체를 부인하고, 이성 자체가 불완전함으로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론이다.

뒤샹은 기존의 예술형태를 해체하고,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합으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개척해나갔는데, 이는 실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조차도, 또는 커다란 유리’라는 긴 이름의 이 작품은 1915년에서 1923년까지 이름처럼 긴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두 개의 유리 패널 사이에 유채, 니스, 납호일 리드선으로 구성되고 세월이 쌓아준 먼지마저도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 신부는 윗부분에 엑스선에 투사한 뼈 혹은 깃발이나 구름처럼 묘사되었고, 아래쪽에는 기계화된 9명의 남자들이 유니폼을 입은 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신부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은 복잡한 회로를 통해 옆에 있는 쵸코렛 분쇄기에 연결되어 있다.

그가 알고 있는 연금술의 지식을 반영해 만든 이 작품에서, 에로틱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은 화학시간 실험실에서 느끼는 차가움과 제목이 주는 괴리감이다. 수학과 과학으로 표현되는 에로티즘이라니… 8년에 걸쳐 그가 고뇌하고 계산해낸 결과물인 실험적인 작품이 놀랍다.

뒤샹은 이 작품에서 프랑스 실험주의 작가 레이몽 루설이 역설한 모더니즘에 대한 난해한 설명과 이해 받지 못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말을 했지만, 이 작품이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건 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획기적인 설치작업이라 보여진다. 오늘날 현대의 설치미술 분야가 당당히 온갖 권위 있는 비엔나레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데는 뒤샹의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07_반예술적, 탈 권위적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석

자전거 바퀴 1913년

뒤샹의 1919년작 ‘L.H.O.O.Q.’는 우리 모두 수염 난 모나리자라고 알고 있는 작품이다. 반예술적, 탈 권위적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석이라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명성에 비해 아주 작은 엽서만한 크기로, 실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엽서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연필로 그려놓은 작품이다.

기존의 위대한 작품에 대한 도전이자 요즘 유행하고 있는 패러디의 원조라 볼 수 있는데, 피카비아, 만 레이와 더불어 다다이즘의 선두에 선 뒤샹의 반예술적 경향이 잘 드러난다.

제목의 암호와도 같은 ‘L.H.O.O.Q.’라는 알파벳은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불어로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는 뜻이 되는데, 사실은 성적으로 흥분되어 있다는 프랑스의 은어이다.

이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언어의 유희는 뒤샹의 작업의도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다. 그는 미술이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서만 끝나는 것을 뛰어넘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방식을 통해 미술을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1920년 작 ‘회전원판’은 삼각대 위에 고정된 원판에 그려진 선들로 이루어진, 미술작품이라기 보다는 광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실험을 위한 도구와도 같은 느낌이다.

또한 그는 1926년 ‘현기증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6분이 넘도록 계속 돌아가는 회전원들을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나는, 시각적 경험이 주는 영향이라는 과학과 예술을 접합시켜 만든 옵아트 (optical art, 광학미술)의 원조이다.

 

08_스스로를 젠더 개념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자아 창출

체스두는 사람들 1911년

1920년 뉴욕에서 파리로 돌아온 뒤샹은 젠더 즉, 성이라는 관념에서도 자유로워지기를 원해 스스로에게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자아를 만들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뒤샹이 여성 분장을 하고 만 레이가 사진을 찍어 발표함으로 이 캐릭터를 창조하고, 에로즈 셀라비란 이름의 여성 화가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여성형 자아는 뒤샹의 성적 취향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젠더라는 개념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자아를 만든 것이다. 화가 스스로가 모델이 되고 작품이 된 것이다.

에로즈 셀라비란 이름도 로즈에 R을 두번 넣어 장미와 에로스의 이중적 의미를 갖게 했고, 셀라비 역시 불어로 ‘C’est la vie (이것이 인생이다)’와 발음이 같다.

뒤샹은 이런 이중적 의미의 사용을 즐겨 했는데, 이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 어떤 한 사물에도 보이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표현해 고정된 관념 자체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09_말년에 만난 알렉시나와 행복한 말년을…

표준정지 장치의 회로 1914년

바람처럼 이슈를 몰고 다니며 미술계를 휩쓸던 뒤샹은 1923년 돌연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의 혁신적인 시도를 거부하는 미술계에 높은 벽에 부딪혀 실망감에 빠진 그가 자신의 안으로 깊이 침잠한 것이 아닐까?

혹은 그의 은둔자적 성향이 스스로를 숨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세간의 끈덕진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체스를 두면서 유유자적 은둔생활을 즐겨 표면적으로는 미술계를 떠난 것처럼 보였다.

이 은둔생활 후 그는 해프닝처럼 6개월만에 끝난 첫 결혼 이후 오랜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1955년 67세 나이에 알렉시나라는 여인을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사실 그는 차갑고 이성적인 성격으로 여인들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했는데, 이는 청각장애자였던 어머니에게서 받은 침착함, 무관심으로 인한 상처로 스스로가 보호기제처럼 택한 방식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그의 이러한 태도에 매력을 느끼고 다가왔지만, 그는 자신이 독신생활에 더 어울리는 성격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여러 여자들과 가벼운 만남만 가졌었다. 그러나 말년에 만난 알렉시나는 조각을 전공해 미술에 대한 이해도 깊고, 체스라는 공통의 취미를 가진 그에게 꼭 맞는 여인으로 뒤샹은 그녀와 함께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10_음지에서 떠돌던 성의 세계 적나라하게

회전 원판, 정밀광학 1920년

오랜 은둔생활 동안 은밀하게 준비해온 그의 마지막 작품은 ‘에탕 도네’ (1946년~1966년)이다. 그의 사후 발견된 이 작품에서 ‘에탕 도네’라는 뜻은 ‘주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신이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그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에로티시즘으로 본 것 같다.

나무로 만든 거대한 문이 있고 그 문에는 사람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 두 개 뚫어져 있다. 안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개스램프를 들고 숲 속에 누워있는데, 여인과 숲, 개스램프는 3차원의 오브제로 만들어졌고 멀리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운 폭포사진을 투사한 것마냥 비현실적인데,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상의 세계를 문구멍을 통해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은밀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 일종의 관음증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에로티시즘을 밝은 불빛 앞으로 끄집어내 공공장소에 전시함으로 여태껏 숨겨져 음지에서 떠돌던 성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11_자신의 삶조차 예술로 만든 업적은 위대함 그 자체

마르셀 뒤샹

“그림을 그린 것, 삶을 이해하는 요인으로 삶의 방식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을 한 것, 살아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형태의 예술작품들을 창조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는 뒤샹은 자신의 삶조차 예술로 만들며 1968년 81세의 나이로 고향과 가까운 프랑스 뇌이쉬르센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술창조와 미에 대한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깨부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개념을 바꾸려 했던 그의 노력은 많은 논란을 뛰어넘어 현대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미술을 캔바스 밖으로 끄집어 내고,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무너뜨린 그의 행보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킨 공과 그의 이념을 따르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도로 그 뒤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삶조차 예술로 만든 뒤샹의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다음 호에서는 기계적 입체주의 화가 페르낭 레제와 만나보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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