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대표화가 에곤 실레

인간의 밑바닥 깊숙이 숨어있는 욕망 길어 올려 선과 색으로 표현

크림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는 인간의 밑바닥 깊숙이 숨어있는 욕망을 길어 올려 선과 색으로 표현하는 화가이다. 그는 원초적인 관능과 죽음에 대한 적나라한 공포가 휘몰아치는 화면으로 우리를 압도하고 빼어난 데생 실력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색감으로 우리를 또 다른 차원, 실레만의 세계로 인도한다.

 

01_예술 통해 자신 속에 억눌려 있던 초자아 표현하려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리 수채화, 1913년

“예술가를 제한하는 것은 범죄다. 그것은 태어나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라고 말한 실레는 예술을 통해 자신 속에 억눌려 있던 또 다른 자아, 초자아를 표현하려 했다.

내면의 끝없는 고독과 싸우며 뒤틀린 욕망을 예술로 승화시켜 짧고도 치열했던 자신의 인생을 산화했던 천재화가 실레는 28세라는 나이로 요절했으나 그가 남긴 열정의 산물인 작품의 수는 실로 어마어마해 유화 300여점, 수채화와 데생 2000여점에 이른다.

그는 예술가가 사랑한 화가로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고 그를 주제로 한 영화, 에세이, 소설, 무용극들이 제작되었다.

 

02_“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린다”

게르트의 초상 유화, 1909년

에곤 실레 하면 우리는 뒤틀린 형태의 자화상이나 왜곡되고 데폼된 누드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관능적인 누드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의 누드는 다른 화가들이 추구하는 누드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꺾인 포즈,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 아름답다기엔 너무나 그로테스크한 살과 근육의 묘사 등. 가장 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그 안에는 인체에 대한 탐구와 인간 자체를 표현하려는 의지가 보여진다.

혹자는 그의 작품을 성도착이나 포르노적인 것으로 매도하려고 하지만 “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린다”라는 그의 말처럼 인체의 묘사를 통해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표현하는 그의 예술혼은 표현주의의 대표화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표현주의란 독일을 중심으로 1905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미술사조로 미술의 기본 목적을 감정과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두고 있고, 그것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구도나 구성의 균형 및 전통적인 아름다움의 정의를 과감히 무시하는 흐름이다.

빛의 역할을 탐구하는 인상파나 형태의 해체와 재구성을 표현하는 입체파 등 다른 이들이 사물을 표현하는 외적인 양식에 집중할 때 그 혼자 날것의 감성을 회화로 직접 옮겨놓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독창적이 아닐 수 없다.

 

03_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 대신 증오와 원망이…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변의 튤린이란 조그만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도시 기차역의 역장을 지냈고, 누나와 여동생이 있었는데 누나는 아버지로 인한 선천성 매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실레는 소심하고 숫기가 없는 조용한 성품으로 공부도 잘 못하였고, 그림 외에는 별다른 특기가 없는 아이였으나, 미술에 대한 재능은 뛰어났다. 실레가 하도 그림만 그리자 완고하고 고지식한 그의 아버지는 그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이 사건은 실레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가져다 주었다.

실레는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 게르트를 사랑했는데, 외롭고 내성적인 아이의 세계에서 온전히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기편이 되어주는 정신적인 친구로 여겼던 것 같다.

그의 게르타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대단해서 16세에 그녀와 함께 하룻동안 가출을 한다거나 동생의 누드를 그리는 등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게르트는 그의 첫 번째 뮤즈라 할 수 있겠다.

실레가 15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죽음을 대하는 어머니의 무덤덤한 태도에 크게 실망을 해 어머니와 사이가 소원해졌다.

그러한 감정은 그가 그린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어머니의 죽음 1  (1910년)’이나 ‘눈먼 어머니 (1914년)’ 등 그 안에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삶과 죽음의 철학적인 고찰 안에 사랑 대신 증오와 원망이 자리잡고 있다.

 

04_크림트는 실레의 천재적인 재능에 아낌없는 찬사와 후원을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유화, 1912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삼촌에게 키워진 실레는 1906년, 당시 명문으로 알려진 빈 국립예술아카데미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도 두 번이나 떨어진 이 좋은 학교에서 그의 자유롭고 반항적인 영혼은 적응하지 못했고, 1909년 보수적인 교수진과 답답한 정규교육을 뒤로 하고 자퇴를 한 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하였다.

1907년 17세의 소년 실레에게 자신이 평소 존경하던 크림트에게 자신의 드로잉을 보여줄 기회가 왔다. 당시 최고의 정점에 서있던 크림트와의 만남은 실레의 인생과 예술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크림트는 실레의 천재적인 재능에 아낌없는 찬사와 후원을 보냈다. 크림트는 실레를 28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화가로 대했다. 서로의 그림을 교환하고 실레의 그림을 사주기도 한 크림트는 서로의 신뢰와 애정으로 실레의 명실상부한 멘토가 되었다.

그는 여러모로 실레가 화단에서 우뚝 설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분리파의 비엔나 워크숍에 소개하고, 여러 전시회에 출품할 수 있도록 도왔다.

 

05_크림트의 영향 많이 받고 실레의 작품 전환점 돼

빨래가 널린 집 유화, 1914년

자연스레 실레는 크림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작품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년시절 그렸던 뛰어난 색감과 데생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서정적인 화풍 속에 아르누보의 장식성이 자리잡고, 그 둘의 융화는 실레의 작품을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1909년 작품 ‘게르트의 초상’이나 1908년과 1909년 사이 그려진 ‘체크무늬 옷을 입은 여인’에서 크림트의 영향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동생 게르트를 모델로 한 두 작품 중 ‘게르트의 초상’은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성과 황금색에 가까운 브라운의 매치로 여인을 표현하고 있는데 배경의 흰 여백과 인물을 이루는 색들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그리고 ‘체크무늬 옷을 입은 소녀’에서 보여지는 여인의 얼굴 표정과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손의 묘사에서 실레가 인체를 다루는 선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보여준다. 크림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크림트의 작품이 주는 장식성보다는 실레의 개성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다.

 

06_자신의 나체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큰 도구

어머니의 죽음1 유화, 1910년

1910년이 지나며 실레는 좀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표현주의적 화법으로 자신만의 유니크한 스타일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실레의 회화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수많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10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의 독특한 자화상은 자신의 내면을 항해하며 진정한 자아, 숨겨진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볼 수 있겠다.

실레는 거울을 사랑해 어디를 가나 전신거울을 가지고 다니며 거울 앞에서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연구할 정도의 자아도취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1912년의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에서 우리는 거만한 시선으로 비껴보는 자기애가 듬뿍 들어간 예술가의 도도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거친 붓질로 표현된 검은 옷과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된 본인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흰 바탕의 붉은 꽈리는 선명하고도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화면을 이루고 있다.

실레에게 있어 자신의 나체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큰 도구였던 것 같다. 평소의 수줍은 모습과는 다르게 자화상 속의 실레는 당당하고 자유롭게 온갖 포즈를 취한다.

1910년 ‘자화상’에서 가냘픈 그의 육체는 과장과 왜곡을 통해 기괴할 정도의 생명력을 가진다. 우리 눈에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그의 화법은, 자신의 모습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 구석구석 숨어있는 욕망과 공포, 고통과 희열을 표현하려고 한 흔적이라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그의 화법은 자화상뿐만 아니라 인물이나 풍경을 막론하고 대상 전체에 적용되어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실레만의 독특한 화풍을 이루어 내었다.

 

07_17세 발리와 21세 청년 실레… 실레 예술 만개한 시기

에곤 실레

1911년 크림트는 자신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을 실레에게 소개해주었다. 당시 17세였던 발리와 21세 청년 실레는 서로에게 자석처럼 끌리고 발리는 실레의 연인이자 뮤즈가 되었다. 그녀는 실레가 원하는 파격적인 포즈를 거리낌없이 취했고, 실레는 그녀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실레의 뮤즈가 된 발리는 헌신적으로 실레를 보필해 온갖 살림과 뒤치닥거리를 하며 그의 손발이 되었다. 이 정열적인 시기는 실레의 예술이 만개한 시기로 주옥 같은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발리를 모델로 한 수많은 작품들 중 1913년 그린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리’는 유려하고도 과감한 선으로 여체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복잡한 비엔나를 떠나 그들의 숨통을 틔게 할 어머니의 고향 크루마우에 살러 갔으나, 동거하는 이 커플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과 어린 소녀들을 누드모델로 쓰는 것에 기함을 한 동네사람들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비엔나 근처 노이렝바흐에 저렴한 스튜디오를 얻어 둥지를 튼 실레는 여기에서도 역시 주민들의 신고로 미성년자 유혹과 포르노 제작이라는 죄목으로 1912년 구속되었는데, 경찰들은 그의 그림들을 수백 장 압수하고 한 장은 재판정에서 촛불로 태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2001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에곤 실레의 작품을 소장한 레오폴드미술관이 이 자리에 세워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예술성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사건은 실레의 영혼에 큰 상처를 주었고, 이후 그는 자신을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1912년 작품 ‘은둔자들’에는 이러한 그의 정신상태가 잘 나타나있다. 수도승처럼 검은 옷을 입은 실레와 클림트가 한 몸처럼 그려졌는데,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흡뜨고 있는 실레를 크림트가 뒤에서 따뜻하게 안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실레가 얼마나 크림트를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08_‘수직시점’ 사용해 그린 실레만의 독특한 표현법

은둔자들 유화, 1912년

실레의 인물화와 자화상 외에도 그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개성으로 똘똘 뭉친 풍경화들이다. 실레는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작은 도시 크루마우와 그 옆으로 흐르는 몰다우 강의 풍경을 좋아해 여러 점의 풍경화를 남겼다. 이곳은 어머니의 고향으로 어릴 때부터 여러 번 가기도 했고 발리와의 추억도 있는, 그의 영혼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

실레의 풍경화는 원근법을 무시한 채 마치 집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같이 그렸는데, 이는 ‘수직시점’을 사용해 그린 실레만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도시 4 (몰다우 강의 크루마우, 1914년)’과 ‘작은 도시 5 (크루마우의 크레센트, 1915년)’ 그리고 ‘소도시 2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의 풍경, 1912~1913년)’ 등 많은 풍경화들은 실레만의 개성을 나타내고 있고, 성과 죽음에 집착하는 실레의 또 다른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빨래가 널린 집 (1914년)’은 화면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거친 직선들과 차분한 색들로 이루어진 배경 속에 다양한 색상으로 쌓여진 집들, 그 앞에 널린 알록달록한 빨래들이 조화를 이뤄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같이 보여진다. 불안과 고통 속에 허덕이는 인생 속, 유일한 휴식처인 어머니의 고향에서 심적인 안정을 찾고 오염된 욕망을 씻어 순수한 영혼을 되찾는 것 같다.

 

09_‘죽음과 여인’은 실레와 발리의 이별 그린 작품

자화상 수채화, 1910년

1915년에 그린 ‘죽음과 여인’은 실레와 발리의 이별을 그린 작품으로 4년간의 헌신을 뒤로 한 채 떠나려는 실레와 그를 부둥켜 안고 있는 발리를 그린 작품이다. 발리와 4년간의 동거생활 후 좀더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던 실레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자라난 조신한 여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모델의 위치는 거리의 여인과 다를 바 없어 실레는 발리를 연인이나 뮤즈로서는 원했지만 자신의 아내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이기적인 선택이었고, 실레는 결혼과 연애를 따로 생각했는지 결혼해서도 만날 수 있다고 발리를 설득했지만, 치가 떨리는 배신감에 발리는 실레의 곁을 떠났다. 그녀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간호사로 종군하던 중 스물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야전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에디트는 실레의 관능과 죽음이 넘나드는 예술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대신에 그녀는 실레에게 안정과 온화함을 선물했다. 그녀와 결혼 후 그린 1917년의 ‘포옹’은 실레의 부드러워진 화풍을 드러낸다. 그곳에는 고통과 일그러진 쾌락 대신에 편안하고 안온한 따스함이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대상의 고독과 단절을 나타내던 배경의 텅빈 여백은 부드러운 칼라의 움직임으로 채워졌다. 사랑과 충만이 가득한 작품으로 보여진다.

 

10_마지막 대작 ‘가족’으로 자신의 진정한 사랑 표현

죽음과 여인 유화, 1915년

1918년, 실레의 생애 마지막 해는 실로 스펙타클해 희비가 엇갈리고 그의 모든 희망을 앗아간 해이다. 화가로서의 큰 명성을 얻었지만 경외했던 우상이자 사랑했던 멘토 크림트가 2월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고 만다.

슬픔 속에서도 크림트의 후계자가 되어 화단에서의 영향력도 높아지고, 안정적인 결혼생활로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그는 에디트와 화목한 가정생활을 꿈꾸며 마지막 대작 ‘가족’으로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표현했다.

그 해 10월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 독감은 그의 인생과 사랑과 예술을 종말로 이끌었다. 임신 6개월로 사랑하는 아이와 만날 날을 고대하던 이 부부에게 잔인한 병마가 찾아오고, 먼저 에디트와 아이를 덮쳤다. 세상을 잃은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이, 마지막 부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던 실레 역시 3일만에 병마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렇게 스러진 천재적인 예술의 혼은, 그가 세상에 있던 짧은 세월 동안 관능과 공포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많은 작품들 속에 녹아있어,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보게 한다.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영전에 이 시를 바친다.

 

뚜렷한 불꽃이

-폴 발레리

 

뚜렷한 불꽃이 내 안에 깃들어, 나는 차갑게 살펴본다

온통 불 밝혀진 맹렬한 생명을….

 

빛과 뒤섞인 생명의 우아한 행위는

오직 잠자면서 만 사랑할 수 있을 뿐.

 

나의 나날은 밤에 와서 나에게 눈길을 돌려주며,

불행한 밤의 첫 시간이 지난 뒤,

 

불행마저 암흑 속에 흩어져 있을 때,

다시 와서 나를 살리고 나에게 눈을 준다.

 

나날의 기쁨이 터질지라도, 나를 깨우는 메아리는

내 육체의 기슭에 죽은 이만을 되 던졌을 따름이니,

 

나의 야릇한 웃음은 내 귀에 메어단다

 

빈 소라고동에 바다의 중얼거림이 매달리듯,

의혹을… 지극히 불가사의의 물가에서,

 

내가 있는지, 있었는지, 잠자는지 아니면 깨어 있는지?

 

 

* 다음 호에서는 추상화가 파울 클레의 환상적인 색의 향연으로 초대합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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