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회화 여명 밝힌 근·현대 서양화가 7김환기

한국의 서양화 세계화단에 알린 한국 추상화의 아버지, 한국의 피카소

김환기 (호: 수화, 1913-1974)는 한국 추상화의 아버지, 한국의 피카소라 불린다. 한국 현대미술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프랑스,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서양화를 세계화단에 알리고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끈 화가이다.

 

 

01_‘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세계최초의 전면점화 창조

김환기는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광복 이후 한국현대회화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미를 표현하고 동양적 정서를 담은 추상화를 창조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세계최초의 전면점화를 창조하고 동양의 신비와 관조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61년의 생애에 3000여점의 다작을 보여준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혁신하며 우리에게 진정한 예술인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근현대미술 경매 낙찰 1위에서 6위까지를 휩쓸 만큼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다.

 

02_진보적 미술그룹 만들어 젊은 미술가들과 교류

1913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작은 섬마을에서 깊고 넓은 푸른 바다와 별들이 수놓은 무한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의 풍부한 감성은 어릴 적 벗삼은 자연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비교적 부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중학교 때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해 1933년 도쿄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백만회 같은 진보적인 미술그룹을 만들어 젊은 미술가들과 교류하고 자유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당시 유럽의 신사조 중의 하나인 기하학적 추상에 빠져 직선, 곡선, 면의 물질적인 면을 강조한 추상화를 그렸다.

1938년 그려진 ‘론도’는 청년기 그의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목인 론도 (윤무곡)에서 보여주듯 경쾌한 음악의 리듬감을 다양한 색채를 통해 표현하고 형상을 면으로 분할하고 재조립하거나 포개진 이미지를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완성시켜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서구의 입체파나 기하학적 추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는 유영국, 이규상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조직해 그룹전을 열기도 하고 한국전쟁 중에는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겼다.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변 속에 휩쓸리면서도 예술이 중심이 되는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50년대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달, 도자기, 산, 강, 나목, 꽃, 여인 등 전통적인 소재로 한국적인 미와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03_자연스럽게 완만한 곡선이 주는 편안함과 고향의 멋 재현

특히 그는 백자 항아리를 한민족의 얼이 담긴 전통문화유산의 정수라 보고 항아리가 품은 아름다운 곡선 즉, 완벽한 원이나 타원에서 볼 수 없는 자연스럽게 완만한 곡선이 주는 편안함과 고향의 멋을 재현하려 했다.

대표적 작품으로 1954년 그려진 항아리와 시, 항아리와 매화, 달과 항아리 등이 있는데 그 중 ‘항아리와 시’는 항아리와 매화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그리고 한쪽에는 서정주의 시 ‘기도’를 배치해 그림과 시 사이의 공간으로 여백의 미를 표현한 것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서정주의 시와 김환기의 그림이 만나 이룬 절묘한 조화는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심어준다. 둥근 백자와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꽃망울이 가득한 화면, 그 뒤로 마티스의 색종이마냥 흩날리는 나뭇잎들은 동양의 전통적인 문인화와 서양화의 모더니즘을 한자리에 녹여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물하고 있다.

또한 비워야 채워지고 또 그 채워진 것을 비워내는 항아리의 속성을 철학적으로 풀이하여 화려하게 장식적인 면 뒤에 숨어있는 공허와 슬픔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 같아 우리가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와 고독 역시 항아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04_예술의 절대적 지지자이자 오늘날의 김환기 있게 한 이향안

김환기를 얘기할 때 그의 예술의 절대적 지지자이자 오늘날의 김환기를 있게 한 그의 부인 이향안을 빼놓을 수 없다.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시인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화가 구본웅의 어린 이모였던 그녀는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나온 재원이자 모던 걸이었다. 그녀는 구본웅의 친구인 이상과 만나 문학과 예술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져 폐결핵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상과 결혼을 했는데 짧았던 4개월의 신혼 후 요양 차 일본에 갔던 이상은 그녀를 두고 허망하게 죽고 만다.

이후 고독했던 7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녀는 자녀가 셋이나 있는 김환기와 사랑에 빠져 이른바 첩살이를 하게 되고 가족의 반대에 부딪치자 이름을 남편의 성을 따라 김향안으로 바꾸고 변 씨 가문과 인연을 끊고 말았으니 그녀의 사랑에 대한 저돌적인 열정은 그 시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라 할 수 있겠다.

이후 본부인과 이혼한 김환기의 정식 부인이 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김환기를 뒷바라지하고 발로 뛰며 그의 예술성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쉴새 없는 탐구심으로 자기 자신의 예술성을 개발해 본인도 전시회를 하고 수필집을 내는 등 김환기와 더불어 예술가 부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05_서양의 기하학적 추상 벗어나 가장 한국적인 미 찾으려 노력

김환기는 1956년 44세 때 홍익대학교 학장자리를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과 1년 먼저 파리로 유학을 떠난 아내 김향안의 도움으로 그의 파리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한 그는 파리에 가서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고 보여진다. “나는 동양사람이고 한국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고 해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동양사람의 그림이요, 한국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라는 그의 말은 그가 추구했던 한국적 추상화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서양의 기하학적 추상에서 벗어나 가장 한국적인 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또한 대상의 조형적인 면을 찾는데 있어 전통적인 사실화 기법을 버리고 면, 선, 색채를 이용해 조형미를 강조한 자신만의 신구상 세계를 창조하였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그는 주로 항아리, 십장생, 매화 등 한국적 소재로 청색을 주조로 해 반추상 작업을 했다. 1957년에는 푸른색 바탕에 항아리와 매화, 학, 달을 조화롭고 단순하게 배치해 동양적인 미를 나타내는 ‘항아리’와 역시 달, 새, 항아리, 십장생 등을 리듬감 있게 표현하여 “예술이라는 것은 강력한 민중의 노래”라는 그의 말처럼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음악적 요소가 돋보이는 ‘영원의 노래’를 그렸다.

 

06_형상 버리고 점과 선, 면 파고들어 독자적인 추상세계 구축

3년간의 파리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는 홍대 미술교수를 하며 학장도 역임하였지만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나레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의 두 번째 해외 생활인 뉴욕시대가 막을 열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한국에서 이루었던 모든 기반을 뒤로 하고 빈 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넓히고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열정 하나만으로 서양의 미술계를 마주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고독한 보헤미안으로 살아가는 동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쌓여만 갔으리라. 60년대 후반부터 그가 추구했던 모든 대상들은 그 고유의 형태를 잃고 분해되어 점과 선으로 압축되어 나타나기 시작했고 형상을 버리고 점과 선, 면을 파고들어 독자적인 추상세계를 이루어나갔다.

그의 이 고독한 작업은 한국인의 숨결과 정서를 담아내고 고향 가좌도의 달과 바다, 밤하늘, 서울의 산과 동네를 향한 그리움, 보고 싶은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 알알이 박혀있는 점화를 탄생시켰다.

 

07_반복되는 작은 점들 속에 그가 살아온 인생과 예술 녹아 있어

1970년 한국미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무수히 많은 작은 점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 ‘저녁에’ 중 마지막 연을 제목으로 삼으며 김환기는 이렇게 말한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 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우주에 존재하는 세일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손끝에서 다시 피어나는 위대한 작업… 묵묵히 수행하는 고행승과도 같이 그의 생명과 영혼을 갈아 하나하나 점을 찍어가는 행위,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 이룬 이 위대한 작품은 그가 지나온 인생과 예술의 총 집합체인 것 같다.

반복되는 작은 점들 속에 그가 살아온 인생과 예술이 녹아 있다. 점 하나하나와 그 점들이 이루는 거대한 삶의 리듬이 김환기의 모든 것을 품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것만 같다.

점 하나에도 여러 번 붓질을 해 물감이 스미고 번진 자욱을 드러내고 또 일일이 네모난 테두리를 둘러 그 흔적을 가둔다. 점하나 하나에 스며든 인생들, 그 소중한 인생들이 모여 이룬 거대한 화면은 우주에 펼쳐진 인연의 파노라마가 열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08_신비로운 함축성과 시적인 부드러움, 서정적이고 고요한 울림

김환기의 작품세계가 절정을 이룬 1972년 그린 ‘3-11-72 #220’은 그의 대부분의 점화들이 푸른 색조인데 비해 붉은 색조로 그려진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세로 254cm, 가로 202cm의 대형 면포를 스스로 목재를 사와 만든 틀에 입히고 상단의 조그만 삼각형부분 푸른 점묘를 제외한 화면 전체를 사선으로 장미 빛 점을 찍었다.

광목을 사용하는 캔버스와는 다른 질감과 번짐의 효과로 단순한 점이 아닌 풍부한 색감의 울림을 표현해 점 하나하나는 존재의 의미로 반짝이고 있는 것 같다.

사각의 화면 속에 연이어 그려진 점들은 같은 색이지만 또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어 미묘한 차이가 주는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이 미묘한 리듬의 변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영혼을 위로하는 우주의 울림으로 동양적 미감의 결정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함축성과 시적인 부드러움, 서정적이고 고요한 울림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홍콩에서 열린 서울 옥션 경매에서 85억 3000만원에 팔려 한국 근 현대 화가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09_남편의 작품세계 믿고 지지해준 그녀의 헌신 덕에 세계적 화가로

1970년부터 1974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가 예술혼을 불태운 전면 점화는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서게 했다. 점과 선을 그리는 반복적인 작업 속에 숨어있는 수행으로서의 의미가 정신적인 구도자세와 철학적인 관조를 바탕으로 한 동양사상을 품고 있어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김환기를 필두로 박서보, 이우환, 윤형근 등 1970년대를 풍미하던 단색 화가들이 나타났고 전면 점화를 비롯한 단색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추상화 장르로 세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내 김향안은 1976년 환기재단을 설립하고 1977년 환기 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사랑하는 남편의 예술작품을 알리는데 힘썼다.

오늘날 김환기의 작품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고 세계적인 화가가 된 것은 남편의 작품세계를 믿고 지지해준 그녀의 끊임없는 헌신 덕이리라.

그의 작품에 살아있는 삶에 대한 은유, 사물의 속성을 돋보이게 하는 여백의 미, 단순한 표현 속에 담긴 수많은 상징, 빛과 그림자, 대비되는 것과 그 부딪침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화 속에는 그의 인생과 세계관,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이 녹아있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뇌게 해준다.

 

 

* 다음 호는 서민의 삶의 애환을 그린 화가, 박수근 편입니다.

 

 

글 / 미셀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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