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사람들

회자정리 (會者定離)라 했다. 우리네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각기 다른 수많은 사연과 인연으로 서로에 얽혀지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거다. 살면서 얽혀지는 만남에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고통스러운 만남이 있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축복의 만남이 있다. 하지만 어떤 만남이든 헤어짐이 있고 그것이 삶이다.

박목월 시인은 향토성이 강한 서정을 담담하고 소박하게 담아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중년이 되었을 때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췄다. 가정과 명예,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박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겨울 옷을 내밀고 서울로 올라왔다.

박목월과 여인은 부인의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들의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했다. 헤어지기 전날 밤 박목월은 서러운 마음을 시에 담아 사랑하는 여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시가 ‘이별의 노래’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 만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한낮이 기울며는 밤이 오듯이 /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진주는 조개류의 몸 안에서 모래에 씻기는 아픔과 고통을 견뎌내고 영롱한 빛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박목월 시인과 아내와 여인의 만남과 헤어짐은 고통과 아픔을 이겨낸 진주처럼, 세월이 흘러도 가슴 저리도록 사랑 받는 찬란한 시를 남긴 것이다. ‘이별의 노래’는 아름다운 만남과 헤어짐의 눈부신 결정체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면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보고픈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고픈 사람이 생각날 때면 바닷가로 나가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앉아있곤 했다.

고국의 명절 한가위나 설날이 되면 더욱더 그리웠다. 눈을 감으면 고국 산천의 풍경들이 펼쳐졌다. 아지랑이 피어 오르고 사방이 초록색으로 단장된 봄날의 풍경,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달궈진 바닷가 모래사장을 달리는 벌거벗은 하동들의 풍경, 붉고 노란 나뭇잎들로 들과 산이 치장하고 떨어진 낙엽 밟는 소리 정겨운 가을의 풍경, 산촌에 눈이 쌓여 세상이 온통 하얀 치마폭에 감싸여 있는 포근한 겨울의 풍경은 만나지 못하는 설움으로 다가왔다.

그 풍경에 오버랩 되는 나의 사람들. 누님, 형님, 조카, 친척, 지인, 선후배들의 모습은 만날 수 없는 아픔으로 육신을 흔들었다. 보고픈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설움에 고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면서 밤잠을 깨우고 돌아눕기도 했다. 헤어짐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사는 것에 쫓기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움은 달 밝은 밤 희미한 나뭇잎 그림자처럼 옅어졌다. 못 견딜 것처럼 보고 싶던 얼굴들이 눈앞에서 썰물처럼 밀려가면서 아스라해졌다. 헤어짐의 고통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아물어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보고 싶고 애달프던 감정도 만나지 못하는 세월에 푸른빛을 잃고 낙엽처럼 메마르고 바스러진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볼 수 없어 잊혀져 간다는 건 쓸쓸하지만 그것이 삶이다. 그리움에 아프고 고통스럽던 사람도 세월의 흐름에 희미해진다는 것은 덧없는 세상 바람처럼 스치며 살라는 속삭임인지도 모른다.

나는 세월을 제법 먹었다. 헌데도 여전히 나의 가슴 속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가슴 아프도록 그립고 못 견딜 만큼은 아니지만 항용 만나고 싶다. 먼 길 떠난 내 어머니, 형님들, 조카들이 만나고 싶다. 시드니에 사는 딸 내외, 대학생활 때문에 멀리 떨어져있는 큰손녀도 만나고 싶다. 세월 속에 닳아진 터벅거리는 삶이지만 아직도 헤어짐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사랑했던 여인이든, 피붙이든, 가슴 깊이 묻어둔 사람이든, 만나지 못해 가슴이 아플지라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푸르른 삶이다. 언젠가는 잊혀질지라도 가슴 저 깊은 곳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눈부신 세상인가.

오늘 밤에는 나도 시인처럼 촛불을 밝혀두고 가슴 속에 묻혀있는 나의 사람들을 홀로 만나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Previous article엄마도 영어 공부 할 거야! 154강 나는 너에 의해서 사랑받았다
Next article지금, 이 순간이 나의 가장 젊은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