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살면서 헤아릴 수 없이 이사를 다녔다. 머릿속이 헝클어져서 기억이 가물거릴 때 언제 그 일이 있었던가를 기억하려면 그즈음 살았던 집을 떠올리면 된다. 그래서 이사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딸들은 잦은 이사로 안타까운 이별과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로 적잖이 힘들었었나 보다. 결혼한 작은 딸은 콩알만 한 아이들을 놓고 절대 전학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다. 미안하게도 나는 옮겨 다니는 것을 즐겼다. 잦은 이사로 남들이 겪는 권태기나 갱년기도 겪지 않았다. 이사 때마다 부담스러운 짐과 마음의 군더더기를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 어떤 일로 이사하게 되든지 새로운 마음으로 가볍게 떠날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딸들에겐 배려가 없는 엄마로 남았을 것이다.

다정하고, 냉담하고, 특이하고 다소 못된 이웃 등 많은 이웃들을 만났다. 살았던 장소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고 많은 이야깃거리로 내 일기장은 가득 채워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일일이 고하지 못할 나만의 수다가 홍수처럼 넘쳐났다. 이민 생활이란 부평초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허허로움에 남편을 졸라서 이사를 간 적도 있었다. 이 집은 숲이 뒤에서 푸근하게 안아 주고 날마다 선물로 받는 고운 노을의 매력에 끌려 안주하게 되었다. 하늘을 채색한 노을에 하루하루를 얹어 물들이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 이웃에 살던 마거릿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극배우로 학생들 연극 지도교사였던 골초에 책벌레인 마거릿이 떠나셨다. 내 문제를 들고 가서 풀어 보일 수 있는 단 한 명의 인생 조언자였다. 그녀의 내면세계는 우물처럼 깊었다. 그 우물을 들여다보면 내 모습이 보였다. 우물은 결코 넘치거나 줄지 않고, 삶은 그런 거라며 나를 비추어 스스로 보게 했다. 쉽고 간단명료한 답이 언제나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괴팍함이 가시로 돋아나서 찔릴까 두려워 피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가시는 허상인데도 말이다. 함께 살던 마거릿의 딸 제인은 눈만 마주치면 엄마로부터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을 얘기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혼으로 예민했던 젊은 시절의 엄마는 술과 담배에 절어서 살며 인형 놀이나 크리스마스 장식 같은 아이들의 유희를 바보짓이라 비웃었단다. 그때마다 자기의 동심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말없이 제인의 집채만 한 등을 토닥여 주곤 했다. 어느 날 마거릿은 팔에 난 시퍼런 멍을 보이며 분노조절장애인 제인이 때렸다고 했다. 마음의 상처로 인해 치고 받는 모녀, 호주에도 드러나지 않는 이런 일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내 삶의 가장 인상적인 여인, 마거릿의 죽음을 애도하며 많은 이웃들을 추억한다.

수영장의 모터 소리가 시끄러워서 살 수 없다며 불평과 신고로 수없이 우리를 괴롭혔던 빼빼 마른 데이비드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잔디 깎을 때도 다림질로 날이 세워진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은 폴의 창백한 얼굴도, 끝없는 수다로 나를 지치게 했던 린도 떠올린다. 친척이 없는 우리 가족을 아이들 방학 때 농장 집으로 초대하여 차를 타고 달리는 방대한 젖소 목장과 우유공장에서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게 했고, 냉동고를 열어 소고기를 잔뜩 안겨 보내던 주근깨 메리 아줌마도 있다. 모진 폭풍으로 정원에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을 때 한숨 쉬며 외출하고 돌아오니 나뭇잎 하나 없이 말끔히 치워준 옆집 피터도 있다. 신부님이었던 아버지가 매력적인 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 환속한 후 자기가 태어났다고 웃으며 말하는 피터는 천사다. 닭들과 개와 꿀벌을 돌보는 성실한 옆집 존 네 대가족도 있다. 나는 주인을 닮은 부지런한 꿀벌들이 만들어준 꿀을 사 먹는 특혜를 누린다. 존의 딸 브론테는 꿀을 팔아 얻은 전액을 어린이 병원에 기부한다. 그들에게 착한 나눔을 배우며 작은 돈을 보탠다.

가지가 부러지게 달린 레몬이나 흐드러지게 핀 꽃을 이웃에 돌린 다음날엔 빵이나 초콜릿 등이 소박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문 앞에 놓여있다. 작고 예쁜 마음이 사랑스럽다. 내 마음도 그렇게 전해졌을 것 같아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동행이 되어준 많은 이웃이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보여준 만큼만 보았고 만났으며 알게 되었다. 알면 공감할 수 있는 면적이 커진다.

순간의 교류가 공감이며 소통인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동행한다.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두가 함께 걷는 아름다운 여정이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은다.

 

 

 

 

글 / 장옥희 브랜디나 (글무늬문학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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