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

시드니에서 시내버스를 타려면 정류장에 서있는 누군가는 손을 들어 운전자에게 정차신호를 보내야 한다. 이민 칠 년 만에 공공버스 운전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승객과 대화를 통해 목적지 별 요금을 받고 영수증과 거스름돈을 주는 일도 ‘코로나19’ 전까지 지속된 운전사의 중요업무인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호주서민들을 13년 가깝게 매일 만났고, 이민 전 한국에서 오래 전 잊혀졌던 이런 아날로그적 경험을 선진국 호주에서 새삼 만나며 매우 의아해하고 있었을 때였다.

멀리 버스정류장에 서있는 그가 보였다. 매일 보는 승객이지만 그날도 홀로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태워주고 싶지 않은 내 단단한 마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운전자 창문을 열고 숨을 깊게 마시며, 호흡을 멈추고 버스 문을 열었다. 그는 항상 운전석 뒤 의자에 앉았다. 버스를 가속하자 시원한 바람이 들이쳤다.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려, 최대한 참으며 멈췄던 호흡을 ‘후유~!’ 하며 뱉었다. 이건 그를 만날 때마다 행하던 루틴이었고 아무리 추운 겨울 아침에도 변함 없었다.

그를 만나기 한달 전쯤, 운전자별 운행계획서를 선정할 때였다. 시내버스 운전 일년 차라 선임자 순서로 90%의 선정이 끝날 때쯤 내 차례가 왔다. 오후 출근과 심야 퇴근, 하루에 두 번 출근과 두 번 퇴근 등 선임일수록 가장 싫어하는 10% 남은 것 중에서 고르게 될 걸로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횡재인가 했었다.

이민 육체노동자로서 꿈의 근무조건인 ‘하루 10시간 주 4일 근무, 오전 7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에 빵빵한 추가수입도 기대할 수 있는 운행계획서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떻게 내 차례까지 온 거지? 실수로 놓친 선배들이 혹시라도 볼까 두려운 마음에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누르며 조용하고 신속하게 운행계획서를 매니저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약 한달, 그를 만나는 게 반복되면서 그제야 횡재한 로스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마도 평생 샤워를 안 하는 것임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냄새가 아닌, 악취라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운전석 뒤에 자리가 없어 버스 안쪽 깊숙이 들어가 앉게 되면, 창문 없는 호주 시내버스의 문제점이 바로 나타났다.

룸미러로 슬쩍 본 차내 승객들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힘들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버스운행의 자잘한 불만은 또박또박 제기하면서도, 공공장소에서 혐오감을 유발하는 이 냄새에 대해 함구하는 손님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한국에서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손님들이 내렸거나 그를 내리게 했거나, 운전자 (버스회사, 정부)에 항의 또는 시정요구 아니면 최소한 언론에 기이한 일이라고 제보하는 등 상상을 해봤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실 차라리 군 훈련소의 최루가스실에서 눈물 콧물 흘리는 건 내용이라도 화끈했다. 한국남자들 만나면 군대생활의 무용담 거리라도 된다. 근데 이거는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지저분하고 싫었다. 더구나 몇 달이 지나면서 그가 멀리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안절부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승차하는 시간과 장소는 거의 일정하고 정확한 편이었다. 입사순서로 픽업할 수 있기에 고참 운전사들은 이 로스터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입사 초보들에겐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고 필연이었다. 그런데도 사는 게 무언지 남의 돈 먹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하며 맥없는 신세한탄까지 했었다. 버스 승객은 내가 선정해서 태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란 말은 사실이었다. 이 고약한 냄새 역시 다음 운행계획서 선정 때까지 1년 이상을 감당하면서 점차 적응되고 있었다.

15년도 지난 그를 떠올리면서 문득 나는 현재 내 주변에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궁금했다. “혹시 이 승객처럼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나?” 사실 그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너의 냄새가 너무 괴롭다. 무슨 사정인지 말해주면 당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솔직히 말을 한번 해볼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그에 대한 이 불쾌한 기억과 경험은 지금 없었을 것이다. 진솔하게 그런 상황을 이해하거나 타개해볼 마음을 내지 못한 점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나 역시 한국의 30여 년 교직을 뒤로한 근본원인이라 느껴졌던 가까운 동료들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멀리서 정 선생이 보이면 하늘같이 높은 낙하산 분들이 깜짝 놀라 재빠르게 다른 길로 돌아가던데…” 라며 속 시원한 역할에 경의를 표하는 말들을 항상 무슨 훈장쯤으로 믿고 목에 힘을 주고 살았었다.

그때는 교직 12년 차 30대 후반의 교직원노조 창설멤버였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마도 내 모습이 그분들에겐 이 승객과 다름이 없었음이리라. 만약 그 하늘같이 높은 분들이 직장의 동료 선배 및 어른 또는 상사로서 상생의 자세와 포용을 보여주었다면 16년 동안 그분들이 피해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그 덕에 IMF와 함께 뒤통수 맞고 호주 이민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지하지 못한 아시타비 (我是他非)가 생각났다. 지나온 삶의 후회는 아니고 오류에 대한 과보는 반듯이 감당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젊은 날의 어설픈 정의감과 넘치는 에너지에 매몰되어 남겼던 많은 아쉬움의 반복. 호주의 20년 이방인. 내 모습. 이렇게 마무리할 수는 없다. 연중 단 며칠에 불과하지만 우리 집 뒷마당 넓은 가을 공원을 매년 곱게 물들이며 떠나가는 단풍잎들이 황홀한 모습으로 내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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