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서 떨어진 사과

마당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사과꽃과 이파리들이 아름다운 봄날처럼 환희의 향기를 내뿜고 있다. 저 꽃 뒤에 때를 기다리며 숨어있을 탐스런 사과 열매들. 마치 나의 현실은 힘들지만 잘 이겨내라고 삶의 기쁨을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언제인지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잠이 막 깬 비몽사몽 상태에서 부모님 방문을 여니 사과 향이 배어 나왔다. 두 분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사이 좋게 사과를 나누던 모습은 나의 뇌리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깊이 새겨져 있다.

‘사과는 나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오래된 독일 속담이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오면서 이렇게 자주 공감하게 될 줄이야. 나는 7학년부터 12학년까지, 한국에 비교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면서 다채로운 나비의 날갯짓을 하는 호주 십대들과 생활하고 있다.

별자리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자라온 환경과 다양한 경험들을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아마 나의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배우는 모든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찰하고 흡수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들과 매일 접하면서 느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집에서 목격한 행동과 관점을 모방해 학교에서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부모는 자녀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나침반을 형성하는데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들짝 놀랄 정도로 거친 욕설과 말들을 쏟아내는 학생에게 몇 번의 경고 후에도 반성의 여지를 보이지 않으면 체벌의 일종인 디텐션 (detention)을 준다. 이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규칙을 어기거나 바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경우 수업 후에 남아서 반성하는 처분이다.

디텐션 와중에 어떤 학생은 이런 종류의 말들은 아무것도 아닌 보통 수준인데 뭐가 대수냐며 웃어 넘기려 한다. 오히려 훈육하려는 선생이 순진해서 우습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학생도 있다. 때로는 눈앞에서 잘못된 행동을 뻔히 하면서도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아주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생떼를 쓰는 학생들도 본다.

머리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야 하는 선생들의 고충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생 등 뒤에서 비열한 행동까지 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들을 감지하면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묵고 해야만 하는 상황들도 많다. 해가 거듭할수록 주의력 결핍과 잠재적 과잉행동장애로 진단받는 학생들이 늘어만 간다.

코비드19 이후로 부쩍 거칠어지고 불량해진 학생들 사이로 특별히 내 눈에 들어온 한 학생이 있었다. 어린 데이빗을 처음 본 순간 해리포터의 주인공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동그란 모양의 안경을 쓰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망울로 배움에 항상 진지했다. 가볍게 흐트러져 있는 머리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좋은 샴푸향이 났으며 그의 말투는 어눌하다 느낄 정도로 느리고 친절했다.

이해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선생에게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의 매너와 작은 제스처는 품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선생을 존경하고 있는 태도가 따뜻하여 그를 가르치면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가 자라온 환경이 지금 아이 성품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았다.

동유럽에서 호주로 이민 와 한 직장에서 성실히 근무하는 엄마와 엔지니어링 전공 아빠 밑에서 충실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난 아이였다. 교실에 들어오면서 혹은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빠져 나가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감사와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는 진흙 속에 활짝 핀 연꽃처럼 나에게 위안과 웃음을 준 최고의 학생이었다.

반면 정 반대되는 아이도 있다. 각종 중독에 빠진 부모 아래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생활하고 있는 아이다. 비록 자신의 집안 환경이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곳일지라도 학교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에게는 학교가 더 안전한 곳이고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항상 무겁고 진중하게만 보이던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어두워 보인다. 가끔씩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서 작은 희망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는 때때로 사과는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다른 방향으로 굴러갈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준다. 우리가 상속 받은 특성이 우리 운명을 규정하는가, 아니면 의식적인 노력과 환경적 영향을 통해 우리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가?

데이빗과 이 아이는 내게 이런 질문들을 매일 던지고 있다. 가족 내의 부정적인 행동패턴을 깨는 중요성과 세대간에 이런 패턴이 계속 이어져 내려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면 부모들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하지도 또한 지나치게 모자라지도 않은 거의 평준화된 도시 속에서 많은 해를 보내오고 있다. 평화로운 환경에 비해 그와 정반대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어떤 날엔 유난히 울컥 속상하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나를 길러 주신 부모님 생각과 사과향이 몹시 그립다. 자식들을 낳아 바른길로 인도해 주었던 세상에 빛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사과꽃 향기로 은은하게 피어 오른다.

“신혼 초 이웃집에 놀러 갔을 때 부모가 되어 가지고 자식들에게 얼마나 험한 말을 해대는지 이건 정말 아니다 싶더라고. 그냥 그때 난 본능적으로 느끼고 배운 것 같아. 그래서 엄마는 너희들을 키우면서 어렸을 때부터 항상 용기를 북돋아주려는 말만 하고 칭찬 많이 하려고 애썼지….”

부모설명서도 없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엄마는 우리를 이렇게 잘 키울 수 있었냐고 묻는 말에 팔순이 넘은 엄마의 답변이다. 어린 우리를 키우며 행복했던 때가 마치 엊그제 같다면서….

사과꽃처럼 맑은 엄마.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만의 향기를 담고 강렬한 감동의 음악처럼 저 멀리서 들려온다. 엄마의 사랑이 오롯이 나를 감싸 안는다. 난 또다시 그 몇 마디에 인생에서 질풍노도를 지나고 있는 타국의 십대들을 맞닥뜨리고 가르칠 힘과 용기를 얻는다.

 

 

글 / 송정아

 

 

 

 

Previous article우리 동네에서는 어떤 행사가? 스트라 카운슬 Strathfield Christmas Carols 2023
Next article기다림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