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앞마당 화단에 몇 달째 3미터가 넘는 기다란 목을 늘어뜨리며 장하게 피던 용설란꽃이 다 지고, 마른 대만 남아 매달려 있다.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꽃을 피우던 몸통은 사그라지고 밑동엔 어느새 새로 나온 잎들로 둘러싸여 새살림을 꾸리느라 분주하다. 수명을 다한 꽃은 이제 제거할 때가 왔다. 이미 딱딱히 굳어버린 잎과 꽃대를 떼어내려 실랑이를 하다가 그만 주저앉았다. 꽃대를 자르려던 일은 잠시 미루고 화단 한 귀퉁이에 심었던 더덕이 싹이 나왔나 둘러본다. 몇 해째 어렵게 씨를 구해 심어도 싹이 나올 만하면 새가 와서 쪼아 먹는지 보이지 않는다. 공들이는 것은 소식이 없고 반기지 않는 잡초만 늘 먼저 얼굴을 내민다. 반기지 않아도 기를 쓰고 나오는 잡초들의 끈기가 대단하다. 화단의 잡초를 뽑아내고 나니 잔돌이 깔린 마당에 눈길이 닿았다.

 

마당의 돌 틈 사이에도 잡초가 삐죽삐죽 올라와 있다. 뽑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새 한가득하다. 노란 꽃을 피우는 민들레와 이름 모를 풀들이다. 이제 모습을 드러내는 뾰족한 풀잎은 어쩐지 눈에 익다. 이 작은 풀잎은 대체 뭘까 하며 살펴보니 대문 옆에 서 있는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이 발아한 새싹이다. 나무는 가을이면 마른 잎과 함께 씨를 품은 주머니를 가득 달고 있다가 바람이 불 적마다 마른 잎과 함께 씨주머니를 마당에 가득 떨군다. 그 씨앗들이 돌 틈에 박혀 있다가 싹을 돋는다. 뽑아내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언젠가 우리 집은 울창한 숲이 될지도 모른다.

호미를 꺼내어 마당에 앉아 풀을 뽑는다. 땅에 바짝 달라붙어 잎을 내미는 민들레는 손으로 쉽사리 뽑히지 않는다. 호미로 힘껏 흙을 들추고 나면 그제야 뿌리가 뽑힌다. 제초제를 뿌리면 수월하다지만, 손으로 뽑아낼지언정 독약을 부어 생명을 으스러지게 하는 것은 왠지 망설이게 된다. 화단과 겨우 한 뼘의 경계인데 약을 뿌린다는 것도 꺼림칙하고 살아내려고 저리 악착스럽게 버티는 것을 보면 선뜻 할 수가 없다.

 

땡볕에 잡초들과 씨름하느라 한나절을 보냈더니 시장기가 돈다. 화단 한 귀퉁이에 심은 상추가 제법 잎들이 촘촘해지고 윤기가 흐른다. 넌출 대는 잎들을 뜯어내니 한 움큼이다. 흐르는 물에 씻어내어 물기를 털어 소쿠리에 담는다. 상추를 손으로 대충 뜯어서 대접에 담고 고추장 한 숟가락 넣고 밥과 함께 비벼 늦은 점심을 먹는다.

오후 넘어가는 햇살이 창을 통해 길게 들어와 비친다. 따가운 햇볕에 몸을 맡기고 잠시 멍하니 밖을 본다. 세상 밖은 바쁘게 돌아가도 정지된 듯 고요하다.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내가 사는 곳이 한국인지 호주인지 느낌이 없다. 언제부턴가 계절이 가고 오는 것에도 무심하다.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는 것도 이젠 시들해졌다. 특별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는 무심한 일상이다.

 

올해는 나이 앞자리 숫자도 바뀌었다. 숫자로 보면 나도 이제 끝자락으로 가는 나이에 와 있다. 이만큼 살면서 얼마나 열정을 다 했는가 되돌아보면 자신이 없다. 사력을 다하는 용설란의 열정도 민들레의 끈기도 내게는 없다. 어쩌다 보니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나서 여기에 와있다. 매사에 늘 한발 물러서 있고 적극적으로 다가선 적이 없다. 그저 두루뭉술이었다.

마음속에만 두고 꺼내지 않았던 생각들은 늘 잡풀처럼 뒤엉켜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아서 짐작해주길 원했다. 그러다 보면 늘 내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결국은 상처로 남았다. 속에 담아두고 말하지 않는 것은 서로 간의 배려가 아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장이 꺾일까 봐 미리 단정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대로 또 어물어물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드러내어 부딪쳐야 상대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 반응이 내게 부정적이라도 그것이 나의 참모습이다. 드러내어 부딪치고, 다시 드러내어 부딪치는 과정에서 내 속의 견고한 아집도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마음의 잡풀도 거두고 나면 남은 시간은 좀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담장나무 푸른 잎이 너울대는 사이로 흰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간다. 겨울은 진즉에 떠나고 봄도 어느새 끝물이다. 용설란 마른꽃대는 이제 말끔하게 베어내야겠다.

 

 

김미경 (수필동인 캥거루 회원·수필집: 배틀한 맛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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