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성준에게

 

옛 길을 따라 걸었지

먼, 그 길

어떤 단풍으로든 물들었을

 

템플 스테이를 지나

당나귀 울음소리* 들리는 나무 아래

붉게 붉게 떨어지는

사랑 이야기

 

어쩌다 이는 시드니 바람

엮을 때마다

밥이나 먹자는 말로 비껴 갔지만

싫은 건 붉은 가슴이라고

선뜻 말한들,

 

팔각정 저 아래

눈에 푹푹 밟힐 때*

다시 보자고 하면 좀 어때

에스프레소 잔처럼 미지근하게

바람 불어 올 날만 평생 기다리겠지

 

인사동 사무실을 나올 때부터

떨어지고

또 떨어지던

 

그 사람 가는 길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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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으앙으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오막살이.

 

백 석 (1912-1996): 시인. 본명 기행. 평북 정주 출생. 오산중학교 졸업 후 조선일보 장학생에 뽑혀 도쿄 아오야마학원대학에서 영문학 공부. 조선일보에 ‘정주성’, 신천지에 ‘적막강산’ 시 발표. 시집 ‘사슴’과 동화집 ‘집게네 네 형제’, 번역집 ‘테스’ ‘고요한 돈 강’ ‘이사코프스키 시선집’이 있음.

 

김인옥 (시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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