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이 한국사회의 낯설지 않은 풍경이라고 한다. “혼밥을 하는 ‘혼족’의 출현은 개인화된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고독한 삶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 겪는 어려움 역시 늘고 있다. 사회적 환경과 인간관계의 변화로 다가오는 외로움이 보다 취약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혼밥은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간섭 받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으며 나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어찌 보면 타인과의 관계에 피곤한 현대인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치유의 시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혼밥, 혼술을 즐기는 ‘혼족’이 늘어나고 있다.
어느 심리학자는 땀 흘려 노동한 사람이 홀로 밥상을 마주한 순간은 육체적 허기뿐만 아니라 정신적 허기까지 채워주는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혼밥으로 대표되는 개인중심의 삶이 개인의 심리는 물론 신체적 건강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혼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혼밥을 비롯한 고독한 생활을 피할 수 없는 집단에서 신체적 정서적 위험이 발견되는 양극화가 나타난 것이다. 특히 밥벌이를 접은 꼰대들에겐 홀로 밥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고, 외로움의 시간이고, 회한의 시간이고, 고통의 시간이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에게는 자존과 뿌듯함이 충만한 혼밥일 수 있겠지만, 밥벌이의 일상에서 멀어진 사람들에겐 거부하고 싶은 혼밥일 수 있다.
나는 밥벌이를 접고 할 일이 없어진 후 수시로 아침을 혼자 챙겨 먹는다. 혼자 아침을 먹는 날은 점심은 차리기도 귀찮고, 먹고 싶은 생각도 별로이고 해서 건너뛰는 것이 다반사다.
아들 내외는 늙은 부모 먹이랴, 새끼들 뒷바라지 하랴, 쉴 틈 없는 일벌처럼 아침 일찍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이런저런 취미생활과 모임스케줄로 바쁘다. 내 어머니시대에는 늙은 남편 세끼 식사 챙겨주는 것이 후덕한 아내의 표본으로 칭송 받았다지만, 지금 그런 얘기 했다가는 황혼이혼 감이다. 지금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시대다. 젊은 여성이든 늙은 여성이든 여성은 나름대로 다 바쁘다.
모두 외출한 집안은 가벼워서 홀가분하고 한갓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허전하다. 고정식이 돼버린 김치와 국을 꺼내놓고 밥을 데우고, 유일하게 잘하는 계란프라이를 만들어 홀로 식탁 앞에 앉으면 뭔지 모를 회한이 가슴을 헤집는다. 어떤 이들은 혼밥을 하면서 여유와 안락을 느낀다는데, 나는 어떠한 편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먹는다.
운동을 끝내고 나오다가 격조했던 지인을 우연히 만났다. 라디오방송국을 운영할 때 꾸준한 광고로 방송국운영에 많은 경제적 도움을 줬던 사람이다. 서로 “이거 얼마만입니까?”라며 반갑게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언젠가부터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이름이 퍼뜩 떠오르질 않아 난처한데, 그날은 요행이 그의 이름이 금방 떠올랐다. ‘이름을 불러줘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는 점심을 함께 하자고 했다. 서로의 가족 안부를 묻던 중 내가 “괜히 저 때문에 오늘 집에서 사모님 혼자 점심 드시는 거 아닙니까?”라며 교양 있는 인사치레를 했다.
그는 “아닙니다 저는 주로 혼밥입니다. 점심은 대충 거르는데 오늘은 최 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점심이 됐습니다”라면서 허허허 웃었다. 이런 제길! 나만 혼밥인줄 알았는데 그도 나와 유사한 퇴물이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며 소란스러운 점심식사를 했다. 어느덧 옛날이 돼버린 팔팔하던 시절의 모험담과 덧없어진 세상사이야기를 하면서 재밌었다.
살아가는 세상에서 뭔가 이루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에게는 혼밥의 시간은 분명 자신에 대한 여유와 뿌듯함과 자족의 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하루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퇴물들에게는 혼밥의 시간은 외로움과 그리움과 회한의 시간일 수도 있다.
아무리 혼밥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함께 어울려 오손도손 얘기 나누면서 식사하는 모습이 사람 사는 풍경 아닐까 싶다. 가족도 같이 밥을 자주 먹어야 정든다고 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