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도 슬픔도 다 총량이 있다. 일생 동안 부딪치는 온갖 것들에는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총량은 다하기 전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총량불변의 법칙이다. 사람이 살면서 맞닥뜨리는 행복, 즐거움, 기쁨, 슬픔, 분노, 고통에도 총량이 있다.
어떤 상황이든, 살면서 부딪치는 것들은 총량이 다한 후에야 지나가는 거다. 불변하는 총량 때문에 견디고 버티고 살아야 하는 거다. 만약에 슬픔이나 분노나 고통에 총량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사랑도 그렇다. 죽어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지만 사랑도 총량이 있다. 한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사랑도 저무는 거다. 그렇듯이 미움도 총량이 있다. 무엇이든 총량을 다 하고 나면 그만 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꾸역꾸역 살아가는 거다.
총량이 애초에 정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행복 기쁨 사랑 같은 총량은 산더미 같고, 분노 고통 미움 같은 총량은 작은 손톱만 했으면 좋겠다.
오래 전에 한국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한 ‘김두식’ 변호사가 쓴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인권에 관련된 책이 있다. 책의 세세한 부문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랄총량의 법칙’이란 내용은 잊혀지지 않는다.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동안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정해진 총량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은 간간이 쓰다가 나중에는 늦바람이 나서 그 총량을 한꺼번에 써버리기도 한다고 했다. 어쨌든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총량을 다 쓰게 돼있다고 했다. 지랄도 총량불변이라는 거다.
지랄이란 마구 어수선하게 떠들거나 함부로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며, 변덕스럽게 행동함에 대한 욕, 잡스러운 언행이다. 다만 AI시대라며 세상가치 기준과 도덕성이 흔들리는 작금의 지랄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좌우지간, 내가 사춘기 때의 지랄이란 중고등학생 때 머리카락 길이는 1cm만 허용된다는 학칙을 무시하고 더부룩하게 길러 등교시간에 규율담당선생에게 걸려 머리통에 가위질이나 바리캉 세례를 받아 고속도로를 만드는 지랄이다.
교복치마 길이는 무릎을 덮어야 한다는데도 무릎 위 20cm 이상을 고수하기 위해 치마를 말아 올려 핀으로 고정시키는 지랄, 수시로 수업을 말아먹고 만화방으로 내빼는 지랄, 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이성친구라고 손을 움켜잡고 시내를 쏘다니는 지랄, 지들끼리 엄마 아빠를 찌질이라고 불러대는 지랄이다.
요즘 삐딱한 녀석들은 제 부모님을 뭐라고 호칭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 쌈질이나 하던 별명이 털보인 내 친구는 제 부모를 ‘껍데기’라고 부르는 지랄을 떨었다, 못된 것들 하고 어울리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호통치는 찌질이에게 내 인생 참견 말라고 눈 부라리면서 반항하는 지랄도 흔했다. 청개구리 같은 지랄이 주종을 이뤘다.
그런데 사춘기 때 지랄은 남에게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피해를 입으면 제 자신이 입는 것이지 타인에게 입히는 피해는 거의 없다. 게다가 지랄 총량을 아껴두지 않고 금세 다 써버리는 특징까지 있다. 혹시 사춘기인 자녀가 지랄을 떨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팔팔한 사춘기라 호르몬이 어쩌고저쩌고 떠들 필요 없이 그저 꾹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랄 총량은 바닥이 난다.
문제는 지랄총량을 사춘기 때 다 써버리지 못하고 나이 먹을 때까지 안고 있는 물건들이다. 사춘기 때 지랄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지만 나이 먹고 부리는 지랄은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이 먹은 물건들의 지랄이란, 자기가 아니면 세상이 바로 설 수 없다며 다 큰 자식들 사는 일에 참견하는 지랄, 혼자 잘난 줄 알고 온갖 것에 감 놔라 배 놔라 잔소리하는 지랄, 거짓말과 꼼수로 인생을 포장하면서 카멜레온처럼 조석변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지랄이다.
그런데 정말 지랄 같은 지랄은 대화와 타협과 연대와 공존이라는 사회구성의 기본정신을 무시한 채 아집에 매몰돼 상대의 주장과 의견은 들은 척도 않는 지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우월감에 빠져 주위를 온통 제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발광지랄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무섭고 섬뜩한 지랄은 지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물럭거리겠다고 카르텔을 구성해 온갖 악독한 짓거리를 멈추지 않는 힘있는 자들의 지랄이다. 공갈지랄이다.
자기가 엄청 잘난 줄 아는 헛것병에 걸려 으르렁대며 치고 받는 다툼이 그칠 날이 없는 지랄은 음흉한 유혹과 배신으로 인간관계의 신뢰를 무너뜨려 버린다. 이런 인간일수록 지랄총량이 징그럽게 크다.
그렇다면, 나의 지랄총량은 얼만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지랄총량은 이미 오래 전에 다 써버렸다고 큰소리칠 자신이 없다. 답답하게도 아직도 세상 일을 자기기준으로 판단해 짜증을 부린다. 잘난 척하고 싶어서 말이 많다. 대접받고 싶어서 엉뚱한 고집을 부려 코웃음을 산다.
지랄총량은 사춘기 때 다 써버리고 끝내는 것이 좋지만, 아무리 늦어도 노년기전까지는 다 써버려야 한다. 한데 세상 떠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꼰대가 되어서도 지랄총량이 남아있다면 누가 뭐래도 그건 분명 골치 아픈 지랄총량이다.
아무리 총량불변의 법칙이라지만, 다 쓰지 않았으면 묻어버려야 하는데, 그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수시로 지랄을 떠는 나, 그리고 그대! 이제 그만 끝내자.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