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수영을 잘 합니다. 특히 접영을 할 때는 한 마리의 돌고래가 유영을 하듯 부드럽고 예쁘면서도 파워가 넘쳐납니다. 몇 년 전 공교롭게도 양쪽 어깨를 조금씩 다친 탓에 힘이 옛날 같지 않다지만 지금도 멋지기만 합니다.
요즘도 아내가 접영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다가 아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베리 굿 (Very Good)은 기본, 엑설런트 (Excellent), 그리고 챔피언 (Champion)이라는 표현까지 아끼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기본에 충실한 아내는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 이 네 가지 모두의 영법이 아주 정확합니다. 흔한 말로 FM (Field Manuals)대로 배워 그대로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접영이 주특기인 아내는 한국에 있을 때 생활체육대회에 팀 대표로 나가 두 개의 메달을 딴 경력이 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모두 출발했음에도 스타트라인에 혼자 남아 양쪽을 두리번거리던 아내에게 그야말로 꼴찌는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던 아내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놀라움 속에 1등과 간발의 차로 은메달을 땄습니다.
이어 벌어진 계영에서는 앞의 배영 주자와 평영 주자가 워낙 늦어 이번에도 아내의 팀은 꼴찌를 예약(?)해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접영 주자로 나선 아내는 이번에도 놀라운 속도로 따라붙어 단숨에 3위로 치고 올라섰고 이어진 자유형 주자가 끝까지 순위를 지키면서 팀은 단체 동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바보야, 남들 다 출발하는데 혼자 남아서 뭘 그렇게 두리번거린 거야? 미어캣처럼….” 물안경을 고쳐 쓰는데 출발신호가 울리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놓쳤다는 아내에게 저는 그날 ‘미어캣’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내가 수영을 배운 건 시어머니로부터의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남편의 무심함이 최고점에 달했던 서른세 살 무렵이었습니다. 천생 범생이(?)였던 아내는 수영과 볼링 그리고 운전을 배우는 걸로 엄청난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구 혹은 돌파구를 찾았던 겁니다.
시드니에 와서는 먹고 살기 바쁜 탓에 한동안은 수영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하고 지냈습니다. 이후 함께 GYM을 다니면서도 저는 수영장에 함께 들어가자는 아내의 제안을 오랫동안 마다했습니다. 일곱 살 때 한강 뚝섬유원지에 갔다가 익사직전을 경험한 이후로 ‘맥주병’이 된 저로서는 딱히 수영장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GYM에서 운동하고 나서 수영장에서 걸으면 근육을 풀어주는 또 다른 운동이 된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저는 늘 흘려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갑자기 허리가 고장(?)나는 바람에 두 달쯤 전부터 GYM에서의 근력운동에 이어 수영장 걷기를 시작했는데 그 덕에 아내는 물속 걷기에 수영까지 즐기게 됐습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수영장을 누비는 아내를 보며 ‘진즉 저렇게 하도록 해줄 걸…’ 하는 후회를 느끼곤 합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내는 뭘 해도 열심히 하고 잘 합니다. 한국에서는 수영뿐만 아니라 볼링도 거의 선수 급으로 잘 쳤는데 제가 보조를 맞춰주지 못했고 시드니에 와서도 골프 또한 제가 꿈쩍을 안 하기 때문에 아내마저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래저래 말도 안 듣고 뺀질대는(?)저를 향해 아내는 여전히 착하기만 합니다. 제가 가끔 이런저런 짜증들을 툭툭 내뱉으면 “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봐”라며 저를 다독입니다. 이렇게 자기주장은 접어두고 매사를 저에게 맞춰주는 아내가 늘 대단하기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향해 ‘좋은 남편, 자상한 남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있지만 사실 저는 ‘천사 같은 아내’의 양보와 희생과 배려 덕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겁니다. 팔불출 소리를 듣겠지만 잠 못 드는 밤, 오랜만에 고맙고 미안한 아내를 향한 참회록 (懺悔錄)을 써봅니다.
**********************************************************************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