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같은 나의 동생을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나에게는 언니로 태어났어야 했던 동생이 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녀의 성향은 중년이 되어서도 멈추질 않고 있다. 인간의 본질과 인생을 파고드는 그녀의 집요함으로 심리학을 전공했고, 그녀가 습득한 지식과 주옥 같은 성찰의 수혜자들은 항상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01_딸들과는 마치 다정한 친구같이 데이트도 하면서
시시콜콜한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들 속에서 마음을 붙잡을 수 없는 회오리 바람이 불 때면 그들은 습관처럼 간절하게 그녀를 찾고 있다.
편안하고 너그러운 남편은 그녀가 부리는 성질머리와 까탈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원하던 전업주부의 길을 걸어가게 도왔다. 도서관을 제 집 드나들 듯 다니며 끊임없는 배움의 길을 즐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힙합댄스를 젊은이들 못지않게 소화하며 공연하러 다니는 것은 어쩌면 자유분방한 영혼을 지닌 그녀와 잘 어울리는 취미생활이었을 것이다. 그림을 배우겠다고 하며 서서히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술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과감히 붓을 접었다. 지루하듯 느껴지는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들을 예술로 승화한 그녀… 자녀 교육 또한 여느 엄마들과는 달랐다.
두 딸을 그 누구보다도 손쉽게 키우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아이들을 발로 키웠다는데… 그런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도 알아서 다닌다. 딸들과는 마치 다정한 친구같이 데이트도 하면서 사교육에 휩쓸려 자식들을 내돌리는 여느 엄마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02_그 힘든 시간을 안간힘을 다해 극복해내는 저력을 보였다
중년의 고비는 그녀에게 유난히도 힘든 오르막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작은 수술로 인해 상처받은 육신이 마음을 지배하고 병들게 했다. 인생의 맛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그 동안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인생에 대한 지식들로는 마음의 감기가 치유되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가장 강해 보였던 그녀가 순간 완벽히 무너진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힘든 시간을 안간힘을 다해 극복해내는 저력을 보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맞닥트린 그녀가 사력을 다해 다시 되돌아서 마주한 세상은 경이와 찬란 그 자체였다고 한다.
When the eye is unobstructed, the result is sight. When the ear is unobstructed, the result is hearing. When the nose is unobstructed, the result is smell. When the mouth is unobstructed, the result is taste. When the mind is unobstructed, the result is wisdom. When the heart is unobstructed, the result is joy and love. – Lao Tzu
(우리는 눈이 방해 받지 않을 때 본다. 귀가 방해 받지 않을 때 듣는다. 코가 방해 받지 않을 때 냄새를 맡는다. 입이 방해 받지 않을 때 맛을 본다. 마음이 방해 받지 않을 때 지혜가 있고 가슴이 방해 받지 않을 때 기쁨과 사랑이 있다. – 노자)
03_언니는 내 것이 아닌 형부 것, 부모님도 내 것이 아닌 남동생 것…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쁨과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감각처럼 자연스러운 것을….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그녀는 일상의 사소한 광경과 대수롭지 않은 자연에 매 순간 감탄을 금치 못하며 하루하루를 감사로 살아가고 있다. 언니는 내 것이 아닌 형부 것, 부모님도 내 것이 아닌 남동생 것…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는 것은 실상 정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동생과 함께 낯선 도시에서 노랗게 피어있는 민들레를 보았다. 큰 아버지 집을 찾아 가는 길목에 피어있는 꽃을 쳐다보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고 있는 나를 무심한 듯 태연히 달래주었던 동생…
학창시절 일년 남짓 부모님 곁을 떠나 둘이서 자취를 했다. 의지할 데라고는 둘 밖에 없었던 시간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어린 시절은 저 먼 기억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
04_벽에 걸려있는 그녀를 닮은 그림들을 그리움으로 바라본다
숏커트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끼고 미소년 같은 모습으로 눈이 퉁퉁 부어 찍힌 내 결혼식 사진 속의 동생 모습을 보노라면 미안함에 괜스레 마음이 짠해 온다.
녹록지 않은 타국에서의 신혼 유학생활 중 유일한 위안과 위로가 된 동생의 편지들…. 그녀의 손 편지에서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한 마음들… 그것은 아름다운 필체에 실려와 그 순간 나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메시지들을 전달해주었고 외로운 외국생활을 버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었다.
언니 같은 나의 동생을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미처 몰랐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자녀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리움에 녹아 든 아쉬움과 회한이 밀려오는 미묘한 감정과 비슷한 것 같다.
마치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멀리서 지켜보며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익숙하지 않는 느낌 같은 것… 그 느낌들이 지금 추억으로 녹아 내리고 있다. 벽에 걸려있는 그녀를 닮은 그림들을 그리움으로 바라본다.
밥 한 그릇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산다고 믿고 있는 동생의 따뜻한 밥상이 오늘 따라 많이 생각난다. 내 마음은 벌써 코로나19로 막힌 하늘 길을 뚫고 사랑하는 나의 동생을 만나러 고향 길을 달려가고 있다.
글 / 송정아 (글벗세움 회원·Bathurst High 수학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