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백 개론

단비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비에 ‘달다’는 말을 붙였을까. 오랜만에 내리는 비로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편다. 풀 죽어있던 수국이 당당해지고, 바싹 엎드려있던 잔디가 제 빛깔을 찾아 움찔거린다. 시절을 따라 내리는 비가 반가워 아침부터 요란하게 창문을 열어 재낀다. 내륙의 땅에도 지금쯤 단비가 내렸을까. 붉은 땅을 다녀왔다. 호주 내륙, 아웃백이라 부르는 곳. 시드니에서 800여 킬로 서북쪽에 자리한 보크*를 거쳐 라이트닝 리지를 돌면서 나는 그 곳에서 생명들이 살기 위해 버티는 모습을 보았다. 아웃백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으로 지평선이 펼쳐졌다. 360도 지평선을 가진 광활한 땅, 지구의 한 모퉁이이자 중심에는 구름 한 점 머물 곳이 없었다. 간혹 바람과 바람이 마디게 뭉쳐 땅을 훑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그나마 있던 물기마저 거두어 갔다. 바람이 지나는 길은 요란해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더 큰 바람 떼를 만나면 가던 길 멈추고 대지의 여신께 몸을 맡길 것이다. 그럼 땅은 단비를 품을 수 있겠지. 바람, 그것은 마른 대지에서 본 첫 번째 생명이었다. 물기 없는 땅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흙들은 고운 밀가루처럼 풀어졌다. 서로 뭉쳐 균열을 만든 곳은 그나마 물이 닿아 생명을 품었던 곳이다. 갈라진 틈새에 핀 들꽃이 반가워 만져보는데 바스라질 듯 건조하다. 이 생명은 이 땅에서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까. 간혹 만나는 붉은 땅에는 마른 풀 조차 보이질 않는다.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길을 따라 유채꽃이 만발하다. 누군가 일부러 심어 놓은 것처럼 길 가장자리에 가로수처럼 피어 노란빛을 뿜어내고 있다. 한 뼘 거리에서는 죽은 풀들이 땅 빛을 바꾸고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제 빛깔을 찾아 핀 것인지 의아해 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답을 찾는다. 길 위에 씌운 아스팔트 덕분에 증발 되지 못한 수분을 따라 버틴 생명인 것이다. 운이 좋은 것인지 생명력이 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황량한 벌판에서 만개한 이 생명체는 분명히 제 빛보다 더 곱게 빛났다.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는데 아득히 멀리 아스팔트 길 끝으로 물이 어른거린다. 앞서 가는 차가 은빛 수면 위를 가르고 멀어진다. 그런데 어른거리는 물은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같이 달려가고 있다. 그 옆으로 나무들이 안개에 싸인 듯 낯선 풍경이 시야에 잡힌다. 강 같기도 하고 호수 같기도 한 풍경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계속 거리를 유지하며 나타나는 신기루, 눈으로 직접 체험한 신기루는 아름답고 기이했다. 목적지라 여기던 지점에 도달하지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만큼 거리에서 다시 손짓하는 다음 목적지, 그걸 붙잡고 다시 달려야 하는 절망과 희망의 교집합이 거기 있었다. 환형이지만 이 또한 척박한 땅에서 버티는 생명이라 하고 싶다. 이따금씩 들판에 양 떼가 지나가고 이뮤 떼, 염소 떼가 지나간다. 먹을 것을 찾아 일제히 주둥이를 땅에 박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보면 양과 땅이 얼른 구별이 가지 않는다. 누런 털을 먹어서인가 털조차 누렇게 뜬 생명들 뒤로 시드니 근교 초원을 가져다 배경으로 붙여보지만 너무 멀다. 동물에게도 흙 수저가 적용되는 아이러니가 거기에 있었다. 끝이 없을 줄 알았던 땅 빛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드문드문 초록이 섞인 회색빛이 돈다.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이다. 원주민들은 생명의 땅을 회색 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붉은 땅은 죄의 땅이거나 신비의 땅이 된 것이리라. 마지막 날, 라이트닝 리지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 버스 한대가 카라반 팍으로 들어오고 있다. 불빛이 아련한 버스 안은 선 굵은 남정네들이 한 가득이다. 버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 그들의 떼 창에 버스가 흔들거린다.

버스가 멈추자마자 어둠이 깔리는 모래 땅 위로 맥주병을 든 남자들이 한 무더기 쏟아져 내린다. 근처 목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일용직 노동자들로 인해 조용하던 카라반 팍이 장날처럼 왁자해 진다. 몇 몇은 바삐 숙소로 들어가더니 알몸에 수건 하나씩만 걸치고 공동 샤워실로 달려가고, 몇 몇은 동시에 폰을 열어 통화를 시작한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바쁘게 자리를 옮겨가며 비디오 콜에 열중하고 있는 유럽풍의 남자, 화면에는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언듯 언듯 비친다. 감이 안 좋은지 파든? 파든? 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또렷이 들린다. 폰을 공중에 대고 전화가 터지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던 그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의 눈동자에서 누런 땅에서 풀을 뜯고 있던 양들의 생명력을 본다. 가족을 멀리 두고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이곳까지 찾아 든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이 땅에서 버티는 가장 커다란 생명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기도 했다. 순간, 크고 작게 버텨온 내 지난 세월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순조롭게 버티고 있는 이 순간도 지나가고 있다. 저녁을 먹고 거리를 산책한다. 라이트닝 리지는 캥거루 떼가 먹을 것을 찾아 마을을 활보하는 곳이다. 그들은 사람도 차도 두려워하지를 않는다. 오는 내내 길가에 수도 없이 죽어있던 캥거루 시체가 비로소 이해된다. 앞 정원이 캥거루 똥으로 뒤덮인 어느 집 앞에서 사진기를 꺼낸다.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한 녀석의 눈동자 속에서 카메라 앵글이 흔들린다. 캥거루는 식물들이 말라 먹거리가 죽어가고 있는 내륙의 땅에서 가장 치열하게 버티는 생명체였다.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바람이 다시 차지기 시작한다. 단비가 찬비가 되고 있는 저녁 무렵, 나는 내륙 여행 좋았냐는 지인들의 질문을 떠올린다. 한 번도 좋다는 말로 대답을 하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아직도 찾질 못했다. 분명히 좋았는데 좋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자꾸 마음을 누르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내륙의 붉은 땅에도 단비가 내리려나. * If you know Bourke, You know Australia. 헨리 로슨

 

유금란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Previous article동작과 연결되는 명사나 일 나타내는 ‘~たあとで (…한 후에 …한 다음에)’
Next article김진우씨, 2018 커피 컵테이스터스 세계챔피언 등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