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나의 분신이고 사랑… 그것을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에 훨훨 남겨 놓는 것
‘아쉬울 게 없어라~’ 하며 부르는 이 찬송가는 죽은 사람 앞에서 산 사람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아쉬울 게 없어야 하는데 그들은 모두가 아쉽습니다. 눈빛과 목소리에 쓰여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노래는 크게 부르면 부를수록 점점 더 아쉬워 눈물이 납니다.
01_그 아쉬움을 없애거나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상실감, 허무… 이런 것 때문에 아쉬운데 아쉬울 게 없다고 서로서로 마음을 다잡고 위로하고 있지요. 믿음을 떠나 인간세상에서 이런 모습은 매우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동물의 세상에는 이런 거 없습니다. 아쉽거나 말거나, 자기만 잘 먹다 가면 그만입니다.
죽는 순간 인간은 모두 아쉽습니다. 아쉬움으로 따진다면, 부자가 거지보다 더 큰 상실감을 맞이할 겁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았을 테니까요. 거지들은 아쉬울 게 별로 없습니다. 지긋지긋한 세상 빨리 끝나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 아쉬움을 없애거나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언젠가 저는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닥쳐서는 다 똑같이 되고, 그건 살아있을 때 정신이 말짱할 때, 매일 조금씩 해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나누는 것’ 즉 ‘나눔’입니다.
좋은 말로는 나눠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나눠놓는 것’입니다. 남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나’를 나눠놓는 것이지요. 하나를 나누면 둘이 됩니다. 둘을 나누면 셋이 되고… 아픔을 나누면 덜 아프게 되고, 사랑을 나누면 더 많은 사랑이 주위를 감돕니다.
02_내가 분배되고 내 생각이 분배되고 내 사랑이, 내 정이…
그 ‘나눔’이 무엇이든, 나눔 속에는 크든 작든 나의 마음과 영혼이 들어 있지요. 물질 그 자체가 아니고 그것에 담긴 보다 추상적인 ‘무엇’을 의미합니다.
내가 분배되고 내 생각이 분배되고 내 사랑이 그리고 내 정이 분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나의 것’과 ‘나의 체취’가 점점 넘쳐나 있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아쉬움은 점차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을 때도 자기 스스로를 흡족하고 든든하게 만듭니다. 자식이나 제자를 많이 두는 일, 책이나 자서전을 남기는 일도 비슷한 논리입니다.
제가 힘들었을 때 용기를 내서 한 회장님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회장님,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터이니 일을 좀 주십시오. 돈은 조금만 줘도 상관없습니다.”
03_문인은 밥을 먹고 살지 않아… 글을 먹고 사는 것
그러자 회장님은 “니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냐? 기술이 있냐 뭐가 있냐?” 하며 문전에서 박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는 별 기술도 없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그 자책감과 창피함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저는 집밖 출입도 잘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우연히 그 회장님을 만났는데 제게 자서전을 문의하게 됩니다. “얼마면 되겠냐?” 제가 대답했습니다. “회장님은 돈이 많으니 5만불은 주셔야 합니다.”
“왜 그렇게 비싸냐?”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회장님, 회장님이 돈을 버실 때 저는 글을 썼습니다. 이제 회장님이 글을 쓰려면 돈을 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회장님이 돈 버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습니까? 돈은 회장님이 전문이니 또 버시면 되지 않습니까?”
문인은 밥을 먹고 살지 않습니다. 글을 먹고 삽니다. 밥이 없어서 죽지 않습니다. 글이 없어서 죽습니다. 글은 나의 분신이고 사랑입니다. 나는 지금 그것을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에 훨훨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아쉬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글 / 마이클 박 (글벗세움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