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구라는 행성을 정신 없이 흔들어댔다. 흡사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들의 사회는 올드 노멀 사회 인데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다는 호통 같았다.
코로나19는 ‘자가격리’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면서 온라인 강의의 일상화를 암시하고, 부득이 경제활동이 중단되면서 국민들의 최저소득보장을 실험한다. 지구촌 약소국들의 존립 여부를 좌지우지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강대국들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려 사대주의 해체를 예고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세계가 문명사적 전환점 앞에 서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 것이다. 의료와 방역, 경제와 산업, 외교와 문화를 비롯한 전분야에서 확연히 다른 세상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는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올 앞으로의 인문, 사회적인 부분에서의 변화를 예측했다. 그는 “위생적인 생활이 몸에 밸 것이다. 디지털경제가 늘어나 핀테크, 무인점포가 증가할 것이다. 유통은 오프라인에서 빠른 속도로 온라인으로 재편될 것이다. 대형교회는 몰락할 것이고 탈 종교화는 가속할 것이다. 배달사업은 번창하고 식문화는 크게 바뀔 것이다. 자동화는 생활화 되고 경제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기업들은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투자 분산정책이 늘어날 것이다. 대중교통 이용이 감소하고 교통체증도 증가할 것이다. 공연장, 찜질방, 영화관, 노래방, 스포츠, 단체여행 등은 사양길에 들 것이다. 술집보다 골프, 등산 등 야외 스포츠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병태 교수의 예측은 인문사회적인 부분이지만, 넓게는 국가에 대한 성찰과 리더에 대한 새로운 프레임이 암시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종교란 과연 인간에게 어떠한 가치부여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자칫 인간들을 정신적 아노미상태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개연성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코로나19 이후는 국가와 리더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대두될 것이라는 걸 우리는 미리 인지해야 한다.
위기의 리더십에 대한 언론보도와, 리더십 연구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의 시대와 관련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각국의 리더에 대한 분석 글을 쏟아내고 있다. 그 중에서 뉴질랜드 총리 자신다 아던 (Jacinda Ardern)에 대한 분석은 의미심장하다.
“코로나19 위기로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바람직한 소통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에게 정확한 정보와 정부의 대책을 수시로 직접 전했다. 아던 총리는 지난 3월 21일 총리집무실에서 4단계 대책이 포함된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아던 총리의 대국민 메시지는 분명하고 구체적이어서 혼선과 불안을 줄였고, 더불어 국민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을 담고 있다. 매주 페이스북 라이브로 국민과 소통하며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 노력해왔다. 집에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때로는 어린 딸을 재우고 나서 카메라 앞에 앉아 질문에 답하며 위로했다. 자녀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물표면에 72시간 생존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식이다.
아던 총리는 페이스북을 활용한 소통에 능할 뿐 아니라 지난해 이슬람사원 총기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초기부터 국민에게 함께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주위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이런 공감과 배려의 리더십은 진솔하고 숨김없는 투명한 국정운영과 맞물려 4월초 조사에서 아던 총리에 대한 지지율을 88%까지 끌어올렸다.”
정치적 판단으로 국민을 이끌던 시대는 코로나19 이후 확실하게 끝남을 넌지시 전달하는 동시에, 뉴 노멀 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에 대한 주문이 아던 총리에 대한 평가 속에 담겨 있다.
아던 총리야 말로 타고난 소통가다. 사회의 변화와, 무시로 찾아오는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신속한 결정과 대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은 소통에 따르는 결과가 돼야 한다.
코로나19는 세상사람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명제를 던졌다. 나를 따르라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제는 함께 가자는 시대가 빠르게 뻗쳐올 것이다. 함께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리더의 향기, 소통이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