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버린 하루

눈이 내린다. 정원의 나뭇가지에 하얀 눈이 소복하다. 블루마운틴에서 지인이 보내온 영상에 렌즈 가득 하얀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눈 구경을 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까마득하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늦은 봄이거나 여름 또는 가을이었다. 봄꽃도 눈꽃도 기억에서 멀었다.

 

호주에서는 겨울에 눈 내리는 풍경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가야지… 어서 그 곳으로 가야겠다.’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블루마운틴의 찬바람에 대비해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오직 눈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집 근처 기차역으로 서둘러 가는데 발걸음은 더디고 목덜미로 내리쬐는 햇볕은 뜨겁다.

 

역으로 들어서는데 쓰고 있던 안경이 스르르 떨어진다. 연결 부분의 나사가 빠졌던 모양이다. 공연히 마음 한 자락이 불편해진다. 파라마타에서 카툼바행 기차를 갈아타고 자리에 앉았다. 기차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이들과 함께 탄 가족들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두툼한 장갑을 낀 모습은 벌써부터 눈사람을 만들 기대에 부풀어 있는 듯하다.

 

파라마타에서 출발한 기차가 블루마운틴 산자락에 닿아 스프링우드를 지나는데도 창밖은 여전히 봄볕처럼 환하다. 유칼립투스의 잎사귀들조차 오늘따라 더 푸르게 반짝인다. 이대로 가면 정말 눈을 볼 수 있을까 걱정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한다. 날씨가 더워 눈이 녹았다 해도 흔적이라도 조금은 남아 있겠지. 그 많던 눈이 다 사라져 버리기야 했겠어.

 

카툼바는 산악지역이니까 그곳에 가면 기후가 여기와는 다를 거라고 애써 불안한 마음을 눌러보지만 창밖으로 고정된 내 시선은 움직일 줄 모른다. 기차가 리우라 역을 지날 즈음 응달진 풀숲 한편에 남아 있던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지! 진짜 눈이 오긴 온 거지. 카툼바에 가면 좀 더 근사한 설경을 볼 수 있겠지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기차가 카툼바역에 멈추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바람이 품속으로 파고든다. 얼른 지퍼를 올려 옷을 여미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어디에도 눈은 보이지 않는다. 에코 포인트로 가면 구경을 할 수 있겠지. 기차에서 내린 다른 사람들도 발걸음이 바빠 보인다.

 

분명 오늘 아침 그가 올린 사진과 영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날씨가 따뜻하기로 그새 다 사라지고 만 것인가. 촉촉하게 눈이 내리던 그 정원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거리에도 눈이 가득하여 조심조심 걷는 풍경은 신기루였던 것인가. 에코 포인트로 향하여 걸어가다 보니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빤한 길이라 헤매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길 한가운데서 막막해졌다.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을 켰다. 그녀가 일러주는 대로 걷다가 어느 공터 앞에 휴지가 널린 듯 희끗희끗하게 남아 있는 눈 조각이 보인다. 손으로 만져보니 분명 눈이다. 손바닥엔 눈물 같은 물 한 방울 남았다.

 

에코 포인트엔 사람들로 가득하다. 눈은 자취도 없고, 찬바람 몰아치는 블루마운틴의 정경을 사진에 담느라 바쁘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손에 쥔 핸드폰을 떨어뜨릴 거 같다. 눈 구경은 못 해도 여기까지 왔으니 세 자매 바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버렸다. 서둘러 나서느라 배터리 충전을 확인 못 하고 그나마 내비게이션을 켜느라 소비한 탓이다. 푸르게 펼쳐진 블루마운틴 자락을 마음에만 담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어느 집 앞에 발이 멈췄다. 둥글고 큰 눈사람이 이제는 다 녹아서 긴 치마를 입은 모양으로 서 있다. ‘아직 내 모습 괜찮지 않니?’ 하고 말을 하는 것 같다. 눈이 오긴 왔었구나. 순간 뺨으로 물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올려다보니 어둑해지는 하늘에서 찬바람 사이로 싸락눈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너무도 가는 먼지 같은 눈이 날린다. 다시 눈을 빚기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 보다.

 

돌아오는 내내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눈 소식을 조금만 더 미리 알았더라면, 아침 일찍 출발했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기다려주지 않고 떠난 애인을 좇아 헤매다 나의 하루가 다 녹아버렸다.

 

김미경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수필집: 배틀한 맛을 위하여·berala-ajoom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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