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권성덕 어머니 윤영례 여사

없어도 궁색해지지 말라! 속으론 힘들고 지칠지언정 남 앞에선 당당하라 가르친 넉넉한 어머니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연극배우라는 직업도 있나?

나는 연극배우이다. 그저 연극이 좋아 연극을 하다 보니 연극이 나의 직업이 됐고, 연극 중에서도 연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나한테도 ‘연극배우’라는 딱지가 붙어 다닌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가정 통신란에 아버지 직업을 ‘연극배우’라고 적어 냈더니 “연극배우가 어떻게 직업이 되느냐?”고 담임선생님이 웃으시더란다.

사실 연극배우는 돈이 꼬이기 (?) 힘든 직업이다. 특별한 명예가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장가가기도 어렵다.

지금은 그래도 연극배우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진 셈이다. 내가 처음 연극을 하겠다고 부모님에게 털어놓았을 때만 해도 연극배우는 그저 ‘딴따라’일 뿐이었다.

전남 영산포읍 대기리가 나의 고향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세살 때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어렸을 때부터 나는 끼가 다분했던 모양이다.

한 일곱 살이나 됐을까, 동네에서 농악놀이를 하면 어린 녀석이 덩실덩실 춤을 곧잘 추더란다. 그걸 보고는 작은 아버지가 고깔과 소고를 만들고 할머니가 옷을 만들어 입혀 농악대 속으로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 어린 것이 농악대 맨 끝에서 여간 신명 나게 어깨춤을 추고 소고를 쳐대는 게 아니었다.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잘 추는지 동네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고 심지어 다른 동네에 원정까지 보냈다고 한다.

그 짓은 열 두살까지 계속됐다. 어쩌면 나의 어머니 윤영례 여사는 그때부터 아들이 ‘딴따라’의 길로 들어서리란 걸 이미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는 크리스마스 성극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동방박사 역을 맡은 나는 “아주 잘한다. 소질이 꽤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문득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마음 먹은 것, 최선을 다하라!”

5남매 중 맏이인 나는 중학 2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고 취직을 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읍내 시계포를 거쳐 서비스 공장, 세탁소, 미군부대 앞 구두닦이, 병원 소독일 등 갖가지 일을 해봤다.

고등학교 야간부에 들어가서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소독 일을 하면서 싸르트르, 까뮈 등 실존주의 소설을 탐닉했다. 어머니는 그동안 내가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셨기 때문에 대학 갈 일은 걱정이 없었다.

차마 처음부터 ‘딴따라’를 하겠다고 얘기할 수 없었던 나는 대학에 들어갈 때 사고를(?) 쳤다. 부모님에게는 국문학과에 지원했노라 속이고 사실은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던 것이다.

그때가 61년, 중앙대에 연극영화과가 신설됐던 해였다. 나는 연극영화과에 2등으로 합격을 했다. 연극과 영화 전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돈이 덜 들 것 같은 연극을 택하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던 것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돈이나 안정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연극을 하겠다는 말에 그저 “이왕 마음 먹은 것, 최선을 다해서 잘 해보라”는 한 마디로 대신했던 어머니.

당시만 해도 사회의 시각이 결코 곱지 못했던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는 아들이 오죽 야속하셨을까만은 어머니는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셨다.

오히려 “넉넉지 못한 집안살림이 마음에 걸릴 뿐”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당신의 욕심을 내세우기 보다는 묵묵히 아들이 선택한 길을 밀어주셨다.

하지만 나는 결국 대학을 졸업하지는 못했다. 2학년 2학기가 되자 더 이상 등록금을 댈 형편이 못 됐던 것이다.

 

세관으로 모실까요, 파출소로 모실까요?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 둬야 했지만 학교생활에 미련이 남은 나는 2년 동안을 학교 도서관에서 책과 함께 살았다. 그 뒤에도 한동안 나는 지금의 명동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내가 처음 정식으로 섰던 무대는 에드워드 올비 원작의 ‘동물원 이야기’라는 작품이었다. 연극학과가 있는 중앙대, 한양대, 동국대 졸업생들이 만든 극단 ‘가교’의 첫 공연이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명배우 추송웅씨와 명동의 ‘까페디아브르’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 당시는 ‘살롱 드라마’라고 해서 까페 무대에서 연극을 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나는 그 작품에서 50대 출판사 지배인 피터 역을 맡았는데 꽤 호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신문 기사에도 “새로운 배우가 나왔는데 가식 없는 연기를 한다”고 언급 됐다. 마침내 65년에는 연극협회 이진순 이사장을 모시고 그 분의 제자들과 함께 극단 ‘광장’을 창단했다.

50년, “막노동이라도 하겠다”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이 서울로 이사와 정착한 곳이 용산동 2가 해방촌이었다.

내가 학교를 중단하고 극단 가교, 극단 광장을 거쳐 결혼할 때까지 연극에 대한 열정만 있고 수입이 없던 시절, 어머니는 나를 대신해 남대문시장에서 ‘양키 물건’을 파셨다. 5.16이 나고서는 그나마도 여의치 않아 어머니는 벽돌을 지어 나르신 적도 있었다.

한동안은 미군 PX에서 불법으로 흘러나온 양주를 배달하는 일도 하셨다. 온몸에 양주병을 차고 치마와 두루마기를 겉으로 둘러서 목적지까지 나르는 일이었다. 양쪽 다리에 각각 4개씩, 허리에 4개 등 총 12병을 온몸으로 지고 나른 셈이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그 당시 코로나 택시를 타면 차가 한쪽으로 기우는 정도였다. 한 번은 이를 눈치챈 택시 기사가 “세관으로 모실까요, 파출소로 모실까요?”라고 넌지시 쏘아붙여 어머니를 당황스럽게 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시어머니 혼자 저렇게 고생시킬 수 없다”며 내 아내까지 그 일에 따라 나서기도 했다.

 

어머니는 평생 용돈 조달자

그 이후로도 어머니는 이 못난 자식 탓에 안 해보신 일이 없고 안 해보신 장사가 없었다. 남대문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기까지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원망이나 타박은 커녕 아침에 내가 나갈 때면 으레 주머니에 차비와 용돈을 찔러 넣어 주시곤 했다.

연극이 춥고 배고픈 직업이란 걸 잘 알고 계셨기에 어머니는 줄곧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불편한 기색 없이 아침마다 차비와 용돈을 주시며 “힘들겠지만 열심히 하라”며 따뜻한 미소를 잊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평생 동안 연극한답시고 돈 한 푼 못 벌어오고 매일 당신에게서 야금야금 타쓰기만 하는 아들의 뒷치닥 거리를 불평 한마디 없이 해오셨다. 나는 동아연극상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고 연극배우로서 어느 정도의 이름을 얻은 후에도 아침마다 어머니에게 차비를 타 쓰는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한 남자의 아내로, 5남매의 어머니로 생활하시면서 조금도 힘든 내색을 안 하시던 어머니는 “남 하는 것만큼 나도 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하지만 누가 생각해도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내가 장남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절로 고개를 든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특히 나에게는 더더욱 최선을 다하셨다.

“이젠 제대로 된 직장 잡아 돈 좀 벌어오라”고 구박하실만도 한데 어머니는 그런 비슷한 티조차 내지 않으셨다.

그런 것은 언제나 내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와 나는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는 편이다. 수틀리면 집사람은 나에게 “딴따라니 별 수 없는 인생이다”라며 마구 퍼부어 댄다.

 

아예 배우를 그만둬버릴까?

“당신이 돈을 벌어오느냐? 그렇다고 명예가 있느냐? 아니, 명예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 명예가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 않느냐? 결혼은 뭣 때문에 했고 자식은 뭐 하러 낳았느냐?…”

나는 그냥 꿀먹은 벙어리가 돼버린다. 아내의 그같은 공격이(?) 절대 마음에 없는 소리인줄 알면서도 죄책감에 자격지심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한 번은 ‘정말 그럴듯한 직장’에 취직을 했다. 최은희씨가 운영하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전임강사로 연극개론과 연기실습을 가르치면서 1학년 담임을 맡았다.

난생 처음 액수는 작지만 봉급다운 봉급을 받았다. 아침마다 어머니한테 차비를 타지 않아도 되니 정말 살맛이 났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아예 연극배우를 그만 둬버릴까?”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하지만 ‘수전노’로 내가 동아연극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자 그런 생각은 일시에 가셔버렸다. 며칠 후에는 국립극단 단원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국립극단 배우는 얼마 안되지만 월급도 받을 수 있으니 일반극단을 전전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낫겠다 싶어 얼른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나의 기나긴 국립극단 생활이 시작됐다. 하긴 국립극단 단장까지 했으니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는 다 올라갔던 셈이다.

나는 상도 적지 않게 받았다. 70년에 한국연극영화상 신인상을 받았고, 75년 한국연극영화상 주연상을 비롯해 동아연극상 주연상 두 번, 서울비평가그룹상에 한국연극예술상, 예총 문화한국예술상 공로상까지 한 일곱 번쯤 받았나 보다.

내 인생의 가장 기뻤던 순간들이다. 돈하고 거리가 먼 연극생활에 그래도 인정을 받고 있다는 보람을 느낀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고생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

물론 그 순간에 나보다 더 기뻐하셨던 분이 계시다.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그동안의 고생들이 모두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고 하셨다.

지금은 작고하신 이진순 선생님과 이근삼 선생님은 나한테는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특히 이진순선생님은 나를 가장 잘 알아주는 분이셨고 내 연극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셨다.

“배우는 항상 마음을 빈 항아리처럼 준비하고, 그 속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연극은 끊임없는 시도요, 모험이다. 최고의 표현을 위해서는 광부가 광맥을 좇는 마음으로 쉼 없이 찾아가야 한다. 한 마디로 공부하는 배우가 돼야 한다. 아울러 요즘 젊은 연출가들, 너무 공부를 안 하는데 연출도 지속적인 공부가 따라줘야 한다. 극단이 많이 생기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연극을 만들기만 하면 뭣하겠는가? 우리가 못하고 안 하는 것을 젊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선생님 서재에서 듣던 이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이진순 선생님은 평생을 연극을 위한 도전으로 일관하신 분이다. 그리고 내 연극 인생에는 없어서는 안 될 귀인이셨다.

극단 ‘광장’이 창단 5년째를 맞던 해에 선생님은 나를 놓고 모험을 시도하셨다. 듀렌마트의 ‘로물루스대제’의 타이틀롤로 나를 내세우신 것이었다.

그때 나는 피나는 노력을 했고 덕분에 70년 한국연극영화상 신인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나를 인정하신 선생님은 다음해에 모리엘의 ‘수전노’를 연출하셨는데 내게 ‘아르빠공’ 역을 주셨다.

그 역으로 내가 그 해 동아연극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자 선생님은 나를 극단 ‘광장’ 단원으로 잡아두지 않으시고 이듬해 국립극단 단원으로 보내주셨다. 그 덕에 그나마 평안했던 24년간의 국립극단 단원 시절이 나한테 열렸던 것이다.

 

없어도 궁색해지지 말라

선생님은 성격 탓으로 적도 많았지만 무척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나중엔 말이 없이도 나는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고 선생님도 아마 그러셨던 것 같다.

선생님은 작품 중에 어렵고 까다로운 역은 대개 “성덕이 네가 하라우!” 하는 경우가 많으셨다. 어떤 이는 나에게 ‘Made in 이진순 배우’라고도 한다.

내가 연극을 하면서 늘 가슴에 담고 있었던 말은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완벽하게 소화하자”는 것이었다. 단역을 잘해야 조연을 소화할 수 있고, 조연을 훌륭히 해내야 비로소 주연으로 빛을 발할 수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배우는 항상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책 한 권이라도 읽고 여행이라도 한 번 갔다 오면 그 얻은 바를 내 연기 속에 용해시키고자 노력했다.

일곱 살 때쯤이었을까? 그 해 달이 유난히 밝던 여름날 밤 뽕나무가 있는 우리 시골집 장독대 옆에서 어머니가 멱을 감고 계시다가 “성덕아, 등 좀 밀어라”하시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어머니의 나신은 너무나 희고 부드러웠다.

그 후 상당히 성장했을 때까지도 어머니는 나를 자주 부르셨는데, 등을 밀어드리지 않았을 때에도 물소리에 잠이 깨면 나는 모기장 속에서 열려진 뒷방문을 통해 어머니의 나신을 보곤 했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항상 인자하고 풍요로운 인상을 유지하셨다. 그 정도 고생 하셨으면 세파에 찌들 법도 한데 어머니의 얼굴에선 궁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난한 생활, 쪼들리는 살림도 어머니의 당당한 모습을 바꿀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한테 “없어도 궁색해지지 말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속으론 힘들고 지칠지언정 남 앞에선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라는 말씀이셨다.

물론 돈 못 벌어오는 아들이라도 기죽일만한 말씀은 해보신 적이 없다. 내가 그나마 연극인으로 이만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건 어머니 덕분이다.

 

남 눈치 볼줄 모르는 성품, 마음속엔 가족에 대한 정 그득

물론 나의 아내도 내 연극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다. 지금도 아내는 남대문시장 구석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던 가게를 하고 있다. 아내도 어머니처럼 평생 고생만 한 사람이다.

아내는 스물 일곱살에 선으로 나를 만났다. 처음 만남에서 “직업이 뭐냐?”는 물음에 학생 때 KBS-TV 학생극에 한번 출연한 것을 빌미로 그냥 “KBS에 근무한다”고 해버렸다.

하지만 나중에 그쪽에서 확인해보니 “그런 사람은 청소부 명단에도 없더라”는 것. 하지만 어쩌랴, 결혼식을 불과 3일 앞두고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장인어른은 이후 나를 숫제 ‘길거리 약장수’ 쯤으로 치부하신다.

결혼 후에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며 여전히 어미니에게서 차비를 타 쓰는 신세로 지냈다. 70년, 내가 국립극단 단원이 되어 본격적인 직업 배우의 길로 들어서고 겨우 살림이 펴질만 하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첫 월급 타면 꼭 술 한잔 받아드리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아버지는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가셨다. 장성한 맏이한테서 제대로 된 술대접 한 번 못 받아보시고 가신 아버지.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서럽게 울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는데, 술에 취하신 날이면 곧잘 “절까지 가서 시주할 것 없다. 불쌍한 사람 밥 한끼 사주는 게 큰 시주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이셨지만 사는 지혜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또 “밖에 나가면 비빔밥은 사먹지 말고 꼭 백반을 사먹어라”고 하셨다. 안 그래도 없는 사람은 먹는 모습이 상스러운데 이것저것 한데 섞어서 볼이 터지도록 집어넣고 씹는 모습이 흉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술과 함께이다. 그만큼 술을 즐기셨다. 고집도 있고 성격도 괄괄하고 남 눈치 볼 줄도 모르는 성품이셨지만 마음 속으로는 항상 가족에 대한 정이 그득하셨다.

 

어머니의 눈물 닦을 수 있는 사람은 아들뿐

아내와 어머니의 사이는 매우 좋은 편이다.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애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고부 사이에 따스한 정이 흐른다. 어머니는 아내를 늘 안쓰러워 하신다. 시집와서 고생이 너무 심했다는 것이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모든 것을 포용하셨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셨다. 언제나 음성이 밝고 분명했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늘 뭔가를 하셨다. 그렇게 무던하신 양반의 어디에서 그토록 질긴 생활력이 나오시는가 싶다.

지금 어머니는 머나먼 이국땅 아르헨티나에서 동생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시다. 명색이 장남인 내가 모셔야 하건만 궁색한 내 형편 때문에 그 먼 나라의 동생에게 가 계신 것이다.

그래 놓고는 몇 해전에서야 겨우 한 번 어머니에게 갔다 왔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서울행 비행기를 탈 때 우리 부부를 촉촉히 젖은 눈으로 전송해 주시던 어머니.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평생 용돈을 드리기는 커녕 매일 용돈을 타서 써야 했다. 안 해본 고생이 없으신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얼른 이곳으로 다시 모셔와야할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무리 기분이 좋을 때라도 이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젊은 시절 돈도 못 벌어오는 주제에 나는 유난히 술을 즐겼다. 통행금지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마음 고생을 더하셨다. 이런 것도 지금에 와서는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닦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를 울게 한 아들뿐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언젠가는 이 아들이 그동안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지울 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문득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느끼면 그저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납니다. 못난 자식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주신 어머니. 내 곁에서 늘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건 바로 어머니가 제게 주신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제게 주신 사랑만큼 행복하게 해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이젠 제가 어머니 곁에 머무를 게요. 어머니, 그 훈훈한 미소를 잃지 마세요.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영원히.”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없어도 매사에 당당하게 살아라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서 용돈을 타서 써야 했다. 아침에 내가 나갈 때면 어머니는 으레 내 주머니에 차비와 용돈을 찔러 넣어 주시곤 했다.

연극이 춥고 배고픈 직업이란 걸 잘 알고 계셨기에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힘들겠지만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하라”며 따뜻한 미소를 잊지 않으셨다.

 

  1.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하지 말라

장남이 남들이 흔히 말하는 ‘딴따라’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조금의 후회도 없이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할 때 비참해지게 되는 것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1.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나는 연극을 하면서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완벽하게 소화하자”는 말을 늘 가슴에 담고 있었다. 단역을 잘해야 조연을 소화할 수 있고, 조연을 훌륭히 해내야 비로소 주연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법이다. 어머니도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을 향한 디딤돌이 된다”고 강조하셨다.

 

  1. 욕심을 버리고 항상 크고 넓게 생각하라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항상 인자하고 풍요로운 인상을 유지하셨다. 그 정도 고생 하셨으면 세파에 찌들 법도 한데 어머니의 얼굴에선 궁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욕심을 버리고 항상 크고 넓게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1. 남 돕는 일에 인색하지 말라

워낙 없는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눠 먹는 마음을 잃지 않으셨다. 우리에게도 “배고파 쓰러져가는 사람을 보면서 내 배만 채워서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가르치셨다.

 

  1. 부지런한 습관을 잃지 말라

어머니는 돈 못 버는 나를 대신해 남대문시장에서 ‘양키 물건’장사를 하셨다. 한때는 벽돌을 지어 나르신 적도 있었고, 미군 PX에서 불법으로 흘러나온 양주를 배달하는 일도 하셨다. 무슨 일이든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구차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으셨던 것이다.

 

  1.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가난한 생활, 쪼들리는 살림에서도 어머니는 결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도 “없어도 궁색해지지 말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속으론 힘들지언정 남에게 피해주는 일 없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라는 말씀이셨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공부하라

배우는 창조자이다. 때문에 배우는 누구보다도 똑똑해져야 한다. 배우가 바보, 무식쟁이어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많이 공부하고 여건이 된다면 외국 유학도 갔다 오도록 하라.

 

  1.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결코 없다. 젊은 배우들이 주인공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모든 성공은 작은 일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 자신만의 체취를 가져라

대사를 외우는 꼭두각시가 돼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자연인으로서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일지라도 무대에 서면 그 사람만이 갖는 독특한 체취가 물씬 풍겨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1. 먼저 인간이 되어라

아무리 유능한 배우라 할지라도 배우 이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멋진 배우가 될 사람은 먼저 고상한 인격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그 인격은 공부와 노력과 인내에서 얻어질 것이다.

 

  1. 자연스러운 표현 기술을 습득하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배우도 더러 있겠지만 피나는 노력의 연마 없이는 창조적인 배우가 될 수 없다. “훈련 없는 배우는 훈련 없는 군인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1.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가져라

연극배우가 되려면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동양인, 서양인은 물론 거지, 왕, 사장, 노인, 청년, 아버지, 아들, 창녀, 공주, 학생 등 어떤 역이라도 척척 소화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연극배우에게는 우리말을 정확히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절대적이다.

 

  1. 정확한 안목을 가져라

 

Previous article음악인 김남윤 어머니 정말남 여사
Next article무용인 국수호 어머니 유규례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