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인 국수호 어머니 유규례 여사

끈질긴 내 생명력의 원천 – 어머니는 기름진 땅, 강인한 대지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적극적 의미의 땅, 생명의 원천

내 어머니 유규례 여사가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실 즈음 한 기자가 나에게 어머니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질문해왔다.

그때 나는 간단히, 그러나 힘주어 ‘기름진 땅’, ‘황토’, ‘강인한 대지’라고 답했다. 이 ‘땅’에는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단순히 양분을 그대로 빨아 새 생명에 전달하는 소극적인 땅이 아니다. 차가운 겨울 내내 에너지를 저장해 두었다가 새 봄이 도래했을 때 간직했던 힘을 어린 생명에게 불어 넣어주는, 적극적인 의미의 땅이다.

모든 새 생명이 지닌 힘의 원천으로의 역할도 할 수 있는 땅이다. 이 땅을 빌어 태어난 생명은 세상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할 힘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 대물림 할 수 있는 여분의 힘까지 지니게 된다.

나는 생활력이 남달리 강했던 어머니의 토양으로부터 삶의 텃밭을 일구었다. 또 우리 춤의 진가를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한 모티브를 끊임 없이 분양 받아, 35년 동안 춤과의 ‘가연’을 맺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지천명(知天命)을 갓 넘긴 춤꾼이다. 앞으로도 도전해야 할 곳이 많기에 발걸음은 조급한 게 사실이지만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

내 몸 안에 살아있는 자연과 신앙, 역사의 섭리와 진실, 여기에 순응하는 인간들의 살고 죽는 얘기를 춤으로 표현하려는 의지이다.

이를 잘 해낼 수 있게 하는 정신력의 원천 역시 어머니이다. 때때로 이 힘은 다양한 작품 창작에 영향을 미친다.

옛 신라인들의 춤을 찾아 헤맬 때도, 백제의 숨결을 찾아내는 데도 언제나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대작들의 첫 걸음은 언제나 어머니와 같은 품성으로 사물을 보는 데서 시작했고, 마지막 발 디딤은 내 몸 속에 있는 ‘춤의 신’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막을 내리곤 했다.

이처럼 내 춤 세계에 깊이 자리매김한 어머니. 그 얼굴을 떠올리노라면 고향 황토 위를 뛰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매사에 경우 밝았던 어머니

전주에서 50리 떨어진 내 고향 완주군 비봉면 이전리는 전체적으로 풍광이 빼어난, 전형적인 우리네 농촌이었다.

매년 4월이 다가오면 산과 숲, 농토에 가득한 기운이 자연의 봄과 사람의 봄을 이어주었다. 벚꽃이 함박눈처럼 내리는 동구 밖은 잠시 잠깐씩 혼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던 ‘조물주의 공연장’으로 불리우기에 충분한, 그런 멋진 곳이었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어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점 뿐. 그러나 그러한 천혜의 조건은 오히려 나의 감성을 살찌우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 당시 병원은 고사하고 약국조차 없었던 마을에서는 환자가 생기면 제일 먼저 신당을 찾게 마련이었다. 마침 우리 옆집에는 용하기로 소문난 무녀의 신당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 주문과 춤, 무속적인 치료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곤 했다.

이 모습은 네 살 박이 어린 내 눈에도 자뭇 진지해 보여 뇌리에 깊이 남았던지 주술에 따라 흔들리는 신장대와 움푹 꺼진 구들장 등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 앞에 선하다.

국립무용단 시절 공연했던 무용극 ‘무녀도’는 그때의 느낌을 복원한 작품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나는 국내 무용계에서 실력 있는 남성 춤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 중에는 외가에 관한 내용도 많다. 외할머니는 동전이나 쌀알로 여섯 남매의 길흉화복과 신수를 점칠 정도로 영적인 감각을 지니신 분이었다.

그 능력은 직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가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정도였지만, 외할머니의 뛰어난 예지력과 냉철한 판단력은 어머니를 통해 나에게 전달 될 만큼 강하고 힘을 지녔다. 어머니는 이러한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다정다감하기 보다는 ‘매사에 경우가 밝은 사람’으로 통했다.

 

수줍은 새댁에서 억척스런 아낙네로

조금이라도 경우에 어긋난 행동을 보면 어머니는 그것이 자식이든 남이든 간에 그 자리에서 바른 말을 하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듯했다.

때론 경우가 없는 사람을 향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직언’, ‘정신이 번쩍 나는 욕설’을 퍼붓곤 하셨는데 그 속에는 깊은 정이 들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집에서 키우던 개가 쥐약을 먹고 죽으면 먼 산을 보며 우시기도 했고, 고행중인 스님이 얇은 옷을 입고 다니는 걸 보시면 자진해서 옷을 지어드릴 정도로 인정이 넘치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각박했다. 고향에서 민선 면장을 세 번이나 지낼 정도로 덕망이 높으셨던 아버지는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돕느라 월급을 제대로 집에 가져온 적이 없는 분이셨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셨던 아버지는 이렇다 할 재산도 없었다. 그런데다가 조금 남아 있는 쌀이라도 주민들에게 나눠줘야 마음이 편하다고 하실 만큼 착한 분이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선행 탓에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출산과 육아 외에 가족들의 생계를 늘 걱정하는 가장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셔야 했다.

그러나 결혼 초에는 달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새댁이셨다. 일제 시대 면사무소 옆에 지어진 고급 사택에서 닭을 키우며 집안 일에 솔솔 재미를 느끼는 평범한 여인이셨다.

그러나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아버지가 실직을 하셨고 가세도 급격히 기울었다. 이때 누구보다 어머니의 고충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신 분은 일찍이 아버지를 키우고 학비를 대주셨던 큰아버지셨다. 그 분이 보내주신 쌀이 아니었다면 우리 식구들은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돈벌이 나선 어머니, 집안살림 도맡은 장남

하지만 큰아버지에게 의존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머니는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집을 나섰고 그 몫은 장남인 내게 돌아왔다. 겨울철 땔감 준비며 집안 텃밭 가꾸기, 짐승들의 먹이 챙기기, 식사 준비 등 나의 하루는 또래 친구들보다 몇 배 고됐다.

한 번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에게 어머니가 “내가 너를 딸처럼 부려먹었다”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었다. 그만큼 집안 일이 많았다.

다행인 것은 뒷동산의 숲이 울창했다는 점이었다. 나무를 아래로 굴리면 집 앞마당에 떨어지기 때문에 나무를 해서 지고와야 하는 불편은 덜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나무들을 모아서 나와 함께 완주 5일장이나 부근 옹기 가마에 땔감으로 파셨다. 그때 나무 값 대신 받아온 전통 옹기를 어머니는 몇 십 년간 고이 간직해두셨다가 나와 동생들이 결혼할 때 선물로 주기도 하셨다.

그러나 나무 구하기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네 명의 동생 돌보기였다. 어머니가 동생들을 출산할 때 곁에서 도왔던 것도 나였고 산후조리도 내가 도맡아 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비우신 어머니 대신 나는 동생들에게 밥을 먹이고 몸을 씻기는 등 집안 일을 해야만 했다.

책상에 앉아 마음껏 공부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 분명했다. 하지만 등교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셋째 동생을 업고 학교에 가곤 했는데, 아이들 놀림감이 되어 돌아오기 일쑤였다. 동생은 수업 시간에도 정신 없이 울어댔고,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았다.

지금은 일회용 기저귀가 나와 편리하지만 그때는 모두 천 기저귀를 쓸 때라 집에 돌아올 무렵이 되면 내 등은 언제나 동생의 오줌으로 절어 있었다.

 

“저 놈 크면 판검사 시켜야겠다!”

하교 길에 혹은 동생들의 옷을 빨다가 옆집에서 벌어진 굿판을 구경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했다.

동생은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다가 자다가 하기를 반복하다 지쳐 잠이 들었지만, 나는 좀처럼 굿판에서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신들린 듯 움직이는 무녀의 춤사위에는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춤들을 나는 머릿속에 꼭꼭 담아 두었다가 학교에 가서 그대로 흉내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의 아리랑 풍금 반주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고, 학생들의 응원가에 맞춰 즉흥적인 춤도 추었다. 그 모습이 꽤나 괜찮았던지 동급생들은 물론 선생님들로부터도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평생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춤은 어려운 가정 형편을 구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취미활동에 불과했다.

당시 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던 덕에 아버지는 “저 놈이 크면 판사나 검사 시켜야겠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하셨다. 나 역시 판검사가 되어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믿고 있었다.

운명이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은 전주서중에 입학했을 때였다. 나는 중학생이 되자마자 교내 밴드부에 가입했다. 그때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였던 나에게 북을 연주한다는 것은 무척 신나는 경험이었다.

매년 고향에서 열린 명절 행사에 등장하던 사물들과 전혀 다른 악기들의 음색은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멋져했다. 밴드부에서 3년간 활동하는 동안 나는 박자 감각과 서양악의 리듬감을 몸에 익혔다.

 

판검사 돼야 할 아들은 농악부에서…

부모님은 내가 공부 외에 밴드부 활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지만 크게 만류하지 않으셨다. 학교 성적이나 나의 생활태도들이 모두 모범적이었기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던 것이었다.

나는 이리 남성고에 입학해서는 농악부에 들어갔다. 농악은 전주서중 밴드부에서 공부했던 양악과 판이하게 달랐지만, 고향에서 익히 들었던 것이라 새록새록 정겹게 느껴져 밤을 새워 사물을 공부하는 날이 많아졌다.

농번기 때마다 들녘으로 나가 농민과 함께 모심기를 하거나 풍년의 기쁨을 나누고 나면 꽉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지는 듯 시원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굵은 주름살을 가진 노인의 어깨춤이나 젊은 아낙들의 노동가요, 풍년을 기원하는 농민들의 분위기, 그리고 비옥한 땅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처럼 푸근하기까지 했다.

공부는 자연 뒷전이 됐고 집에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그동안 쌓아온 농악부의 기량을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토지개량조합장을 맡은 아버지와 동생들 뒷바라지, 농촌 일 등으로 몹시 바빴지만 틈을 내 공연을 보러 오셨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설장구를 메고 친구들과 혼신의 힘을 다했다. 공연 후 어머니는 “그렇게 많이 움직이면 팔다리가 몹시 아플텐데…” 하시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위로해 주셨다.

이렇게 한국 가락에 흠뻑 취해있을 즈음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 한 분을 만났다. 김천흥 선생님의 선배이시자 전주농고 농촌예술반 강사이신 정형인 선생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게 된 것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얼마 후 나의 진로는 바뀌었다. 남성고에서 판검사가 되는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정형인 선생님이 계신 전주농고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농악과 우리 춤을 배우겠다는, 일생 일대의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거셌다. 판검사가 되리라 기대했던 장남이 농악을 하겠다는 것은 분명 두 분께 ‘청천 하늘에 날벼락’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당돌한 결정이 맘에 들지 않으셨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없겠느냐?”는 단 한 마디만을 물으셨다.

내 결심은 확고했다. “춤이 아니면 그 어느 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다. 다음 날부터 어머니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며 차츰 내 편이 되어주셨다. 내 눈빛을 보니 아무리 말려도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설득하신 분도 어머니셨다. “자기 소질과 희망대로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나는 전주농고 농촌예술반의 일원이 되어 전국을 무대로 공연을 다녔다. 그동안 정형인 선생님께 삼현승무, 검무, 남무를 배웠고 설장고도 내 수족처럼 익혔다.

오전에는 토목과에서 땅에 대한 거리 감각을 익혔고 방과후에는 농촌예술반에 남아 풍물과 춤을 배우는 시간이 거듭되었다. 공연은 늘 성황리에 끝났고 농민들의 찬사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또 한 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벌이셨던 사업의 실패로 집안이 다시 몰락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돼지 기르기, 하숙치기 등으로 생활비를 마련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춤 때문에 잊고 있었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주신 두 가지 보약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집을 도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즈음, 뜻밖에도 큰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어머니는 가족들 끼니보다 나의 대학 진학을 걱정하시며 큰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셨다.

“집안 형편 때문에 3년이나 공부해온 무용을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눈물 어린 호소였다.

드디어 67년, 어머니와 큰아버지 덕분에 나는 서라벌예대 (지금의 중앙대 예술대) 무용과에 진학했다. 만약 그때 어머니의 간청이 아니었다면, 큰아버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어려운 과정을 거쳐 입학한 학교이니만큼 나는 1학년 때부터 무용연습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새벽 4시부터 박금술무용학원에서 청소를 하며 춤본을 다듬었고 송 범, 박금술, 이매방 선생님을 찾아 다니며 한국 춤의 유형을 배워나갔다. 이 시절 배운 승무와 살풀이, 무당춤, 봉산탈춤 등은 굶주린 사람의 한 끼 식사와 같이 값진 경험이 되었다.

전주에 계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늘 분주하셔서 좀처럼 서울에 올라오시는 일이 없으셨다. 나 역시 집에 있는 기간은 무용연습 시간을 쪼개 내려가는 3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내려갈 때마다 늘 기다리신 듯 옹기 깊숙이 모아두었던 돈을 꺼내 보약을 짓고 사골국을 끓여 주셨다. “춤을 추려면 뼈가 튼튼해야 한다”며 1년에 두 번씩 무용연구소로 보약을 배달시키기도 하셨는데 이것만으로도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간혹 동생들 편에 무용학원으로 보내진 어머니의 정성은 다른 동료들도 부러워할만한 것이었다. 밤 한말, 대추 한말을 각각 삶아 1년 동안 키운 개와 함께 삶아 만든 보약 그리고 선생님들 몫으로 보내오신 토속 김치와 청국장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구수하다.

이러한 어머니의 뒷바라지 덕분에 나는 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전북 농악지도 대통령상을 받고 대학 졸업 후 국립무용단 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추던 춤 마저 추고 오라!”

하루 10시간씩 고된 훈련과정을 참아내는 나를 본 동료 단원들은 인내의 뿌리가 어머니의 근면한 생활태도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춤을 시작한 이후 내가 실전에서 세운 몇 가지 원칙은 이러한 바탕 하에 수립된 것이다.

나는 제일 먼저 “좋은 무용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심 하에 다른 어느 무용가들도 하지 못하던 우리 춤 자료보존과 국내외 홍보활동에 정성을 기울였다.

때문에 내가 공연한 작품들은 대부분 기획에서부터 리허설, 사진, 비디오 등의 보도자료와 안무보가 작성한 무용일지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우리 춤을 세계에 알리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25년간 세계 1백여개국을 순회하면서 한국 춤을 선보였다.

85년 ‘풍물소리․춤’을 가지고 15명의 단원들과 카라카스 공연을 갔을 때는 전혀 타 단체의 보조금 없이 자비로만 경비를 충당했다. 이러한 내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아 88년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서 국립무용단의 하얀 초상과 KBS와 헝가리 합작 무용극 노스토이를 안무, 예술총감독을 맡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지난 81년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셨을 당시 나는 대전에서 ‘마의태자’를 공연 중에 있었다. 어머니께 비보를 전해 듣고 나는 공연을 중단하고라도 임종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추던 춤 마저 추고 오라”며 한사코 만류하셨다.

결국 나는 3일 후 공연을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예술가의 어머니’로서 보여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귀감이 되었지만,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한 나로서는 춤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채찍질이 되었다.

이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만 자식이 하는 일을 믿고 묵묵히 후원해주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자식을 나도 낳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의 연세는 벌써 일흔 넷. 비록 내게 주어진 많은 일 때문에 자주 뵙지 못하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어머니가 계신 전주를 향하고 있다.

무용을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춤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라며 아직까지 김치를 담궈 서울로 보내시는 어머니.

내 안에 숨쉬는 ‘춤의 신’이 허락하는 한 나는 아직 발을 딛지 못한 춤의 세계, 어머니의 변함 없는 사랑이 숨쉬는 ‘땅’에 닿을 수 있는 춤의 연구에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다.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건강이 최고다

어머니는 “아무리 좋은 춤이라도 힘이 없으면 보기 안 좋다”며 바쁘신 와중에도 보약이며 김치, 청국장 등을 무용연습실로 보내주셨다.

일흔을 넘기신 지금도 어머니는 서울과 부산에 사는 나와 동생들에게 직접 김치를 담가다 주신다. 평생 일하시느라 아플 사이가 없으셨던 어머니의 건강비결은 바로 부지런함이다.

 

  1. 경우 바른 사람이 돼라

어머니는 사람의 처지가 높아지든 낮아지든 초지일관 경우 밝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고 늘 말씀하셨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우리 집안이었지만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나와 다른 동생들은 언제 어디서든 경우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있다.

 

  1.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

본격적으로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는 집보다 춤 선생님들의 집이나 무용연습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때 어머니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크든 작든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무슨 일이든 오랫동안 제대로 할 수가 없다.

 

  1. 남에게 구걸하지 말라

일단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면 세상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어지는 법. 어머니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구걸만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1. 버는 것 보다 덜 써라

이는 곧 절약정신을 강조한 가르침이었다. 가난은 자랑이 아니고 밑천 없는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절약이 곧 밑천’이라는 생각으로 씀씀이를 조절하라는 말씀이셨다.

 

  1. 남을 해하지 말라

남에게 해를 주변 반드시 나에게도 몇 배의 해가 미친다는 가르침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남에게 복을 주면 그만큼 복이 돌아온다고 믿고 지금껏 그렇게 살고 계시다.

 

  1.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

내 생각처럼 안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어머니는 내게 “계획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거기에 머물러 포기할 것이 아니라 적당한 때를 다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세상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길러라

내가 처음 무용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향후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춤을 추지 않고는 세상을 살지 못하겠기에 춤을 선택했다.

지금은 21세기 최대의 부가가치산업으로 손꼽힐 정도로 중요성이 높아졌고 나는 몇 안 되는 남성 무용수중 한 명이 되었다.

 

  1.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라

일상생활이야말로 춤의 가장 큰 교과서이다. 무용실이 아니더라도 동작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하라. 무엇을 하든 무용과 연관된 생각만 하다 보면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각계 각층 사람들의 애환을 관찰하여 춤으로 옮기는 기초작업은 바로 그들의 일상을 잘 관찰하는 데 있다.

 

  1. 우리 것에 대해 연구하라

과거의 역사를 모르고는 미래로 전진할 수 없다. 무용 1세대들이 어떤 춤을 추었고 현재 누구에게 전수되었는지 연구하라.

그리고 기존의 전통 무용들을 어떻게 잘 체계화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아라.

 

  1. 다양한 장르를 공부하라

우리 춤의 역사, 춤과 노래의 연관성 등 공부할 것은 너무 많다. 특히 한국의 악기는 가급적 모두 배워라.

단순히 춤의 배경음악이 아니라 춤을 생성시키고 키워내는데도 영향을 준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훨씬 효율적이다.

 

  1. 자기 의지를 길러라

춤을 추다 보면 아무래도 기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가끔 힘에 부쳐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무용수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체적 아픔은 반드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의지만 있다면 이 세상에 넘지 못할 산은 없다. 정신력으로 육체를 다스려라.

 

  1. 타 예술분야의 ‘쟁이’들과 사귀어라

무용은 종합예술에 가깝다. 고도로 세련된 춤사위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소리가 있어야 하고 표현력을 위해서는 연극을 공부해야 한다.

연극, 미술, 영화, 대중가요, 창 등 다양한 분야의 ‘쟁이’들을 사귀라. 자기만의 춤을 키워내는 영양분이 된다.

나의 춤 역시 김효경, 김정옥, 여타의 유명한 연출가와의 작업을 통해 체험하고, 친분을 쌓아가고 생각을 각인하는 과정 속에 성장했다.

그래서 연극을 하는 손진책씨나 음악을 하는 박범훈씨 같은 파트너가 생겼고, 그들이라야만 내 의도가 통했다. 그들이 나의 영감을 현실로 옮겨주지 못했다면 나의 창작무용은 빛을 발할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1. 앞만 보지 말고 생각의 깊이까지 봐라

눈을 사물에 두지 말고 자기 마음속, 상대방의 마음속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춤사위를 그대로 흉내 낼 것이 아니라, 몸 속에 익혀 마음 가는 대로 감정이 꿈틀대는 쪽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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