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 김남윤 어머니 정말남 여사

“사람 마음가짐이 음악에서 나오므로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내유외강형 어머니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항상 남에게 퍼주고 나눠주는 일을 좋아하신 어머니

한 명의 예술가 뒤에는 평생 그를 위해 헌신해온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오늘날의 내가 있기까지 내 삶의 텃밭을 정성 들여 가꿔주신 내 어머니를 그 대상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흔히 좋은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천복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 그 복을 풍성하게 받아온 사람이라 자부해도 좋을 것 같다.

어머니는 전남 광주 사람이다. 어머니는 개명을 해서 정경선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원하셨지만 본명은 정말남이다.

어머니의 연세 올해로 여든 일곱. 어느 기자가 신문에 “김남윤의 음악회 뒤에는 항상 조용히 음악을 듣는 연세 많은 할머니가 계신다”고 쓴 적이 있는데, 나는 그분이 어머니라는걸 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나는 요즘 들어 부쩍 속이 상한다. 항상 강하신 분인줄 알고 살아왔는데,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너무 약해지고 가벼워지셨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인정 많은 어머니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마음 좋고 눈물 많던 어머니 때문에 어렸을 때 우리는 식구끼리 밥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항상 ‘남에게 퍼주고 나눠주는 일’을 좋아하셨다. 그렇게 매사에 두루뭉실하실 것 같은 어머니는 그러나 자식 교육에 대해서만은 지엄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셨다.

어머니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머니는 고향 광주에서 수피아여고를 다니셨다. 수피아여고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 졸업할 때 꼭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교칙이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시지만 여고 재학시에는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끝까지 세례를 받지 않고 그 학교를 졸업한 유일한 학생이 됐다.

 

전쟁통에도 피아노 치게 한 극성스런 모정

어머니는 슬하에 4남매를 두셨고 나는 그중 막내이다. 내 위의 형제와는 아홉 살 터울이 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막내딸이 유달리 귀여움을 받을 거라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쏟아 부어 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에 감읍하면서도 어머니가 참 무섭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머니에게는 거역 못할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에는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막강한 카리스마, 지도력이 행사되고 있어 어머니의 말씀에 우리 형제자매들은 꼼짝없이 순종해야 했다.

언젠가 오빠에게서 들은 얘기다. 둘째 언니는 피아노를 쳤는데, 서울예고 1회 졸업생에 서울음대를 나왔다. 6.25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릇 챙기고 이불 보따리부터 싸는데 어머니는 그 난리통에도 언니의 피아노를 싣고 피난을 갔다고 한다.

어머니는 피난지에 가서도 둘째 언니에게 새벽부터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새벽부터 총소리가 나고 불도 없어서 캄캄한데도 어머니는 피아노 연습을 하라고 언니를 채근했다.

피아노가 창고처럼 생긴 곳에 있어 언니는 촛불을 켜들고 연습을 하러 다니곤 했는데, 어떤 때는 촛불에 어른거리는 자기 그림자에 놀라 울면서 다녔다고 한다.

언니 오빠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무섭고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어쩌랴! 어머니의 그런 극성 때문에 음악인으로서의 내 인생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을.

나는 바이얼린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조기 교육이 중시되는 음악계에서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서야 손에 활을 쥐기 시작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가 대구에서 근무하실 때 나는 언니를 따라 실내악 연주회에 갔다. 그런데 연주하는 여러 악기 중에서 바이얼린 연주가 유독 내 눈을 끌었다.

그 자리에서 바이얼린이라는 악기에 매료된 나는 아버지가 서울 출장가실 때 바이얼린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첫 콩쿨서 ‘기대밖의 2등’ 입상한 막내딸

부모님은 내가 바이얼린에 몹시 매료돼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아버지는 당장 바이얼린을 사다 주셨고, 나는 밤낮 없이 바이얼린에 매달렸다.

당시 나는 몸이 참 약한 아이였다. 어머니가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신 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몰라도 몸이 너무 약해 바이얼린을 전공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음악을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고 나는 열성적으로 바이얼린을 파고 들었다.

기초는 서울음대에 다니는 언니 친구에게서 배웠고 그 다음에는 언니의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선생님은 나를 재주 있는 애로 봐 주셨고, 1년 정도 배운 후 나는 ‘이화 경향 콩쿨’에 나가게 됐다.

그때 정경화씨도 한 학년 위로 같은 콩쿨에 출전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창피할 정도로 아무 생각 없는 없는 연주를 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정경화씨의 연주는 남달랐고, 사람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사람들의 기대대로 그 대회에서 정경화씨는 특상을 탔다. 그런데 내가 그 뒤를 이어 2등을 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여기서부터 바이얼리니스트로의 나의 운명은 시작됐다. 그때부터 내 음악 인생은 선생님을 통해 음악을 배우면서, 어머니라는 훌륭한 조련사 밑에서 숙달된 음악인으로의 틀을 형성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음악 전공자가 아닌데도 나름대로 음악에 대한 감각이 있으셨다. 우선 어머니는 딸인 나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다.

 

아버지를 매일 저녁 극장으로 내몰고

부모들은 누구든 자식의 미래에 대해 꿈과 기대를 건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자식이 무엇을 잘 하며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를 발견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재능을 파악하고 그 재능 계발에 당신들의 인생을 바쳐 열과 혼을 쏟아주신 부모님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나의 바이얼린 연습과 관련, 아버지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이다. “네 덕분에 국제극장에서 영화 숱하게 봤다!” 처음에 나는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 했다.

바이얼린을 시작한 이후로 날이면 날마다 쉬지 않고 연습을 하다보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이라 해도 어린 나이에 오직 바이얼린만을 위해 어린이다운 생활을 포기하고 연습에만 몰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습을 힘들어 하며 내가 꾀부리는 날들이 꽤 늘게 됐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매일 방과후 내 연습시간을 철저히 점검하셔서 내가 연습량을 채워야 나를 놓아주시곤 했다.

그런데 연습에 열중하다가 아버지가 퇴근해 들어오시면 내가 아버지를 믿고 어리광을 부리며 연습을 하지 않자 어머니는 “조금만 더 놀다 들어오시라”며 퇴근해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밖으로 내모셨던 것이다.

당시 나는 덕수초등학교에 다녔고 우리집은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있었다. 집에서 쫓겨나오신(?) 아버지는 늘 가까이에 있는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보셨다는데, 극장에 가는 횟수가 잦다보니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때로는 주무시기도 하면서 내 바이얼린 연습을 위해 그렇게 시간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두 분의 배려에 목이 메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새삼 고맙고 죄송스럽다.

 

김포공항에 홍수 나겠다!

나는 열 여덟살 때 유학을 갔다. 내 유학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은 중3때부터였다. 나는 이화여중 3학년 때 ‘동아음악콩쿨’에서 1위로 입상을 하면서 한국 바이얼린의 기대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내가 콩쿨에서 1등을 하자 나를 유학 보내야 한다며 채근하셨다. 이때 우리집에는 이미 두 명의 유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언니 오빠는 진작에 떠나보낸 유학을 부모님은 내가 막내라는 이유로 망설이셨다.

결국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서야 유학을 떠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어머니가 너무 우셔서 사람들이 “김포공항에 홍수 나겠다”며 달래셨다고 한다.

내가 유학을 떠난 후 어머니는 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교복 입은 모습만 보고도 우셨다니 어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을 어이 다 갚을 수 있을까 싶다.

유학을 가서 부모님의 그늘에서 처음으로 벗어났을 때 나에게 찾아 왔던 건 해방감보다는 두려움이었다.

유학생활이란 외롭고 고독한 것이다. 긴 유학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나에게 우선적인 과제는 부모님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무서움, 그 심리적인 상황을 잘 극복하는 일이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렇게 큰 것이었다.

맹자의 ‘인생삼락’에 보면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50을 넘긴 이 나이에 아버지는 안 계신다 해도 어머니 한 분이라도 이 세상에 살아 계시다는 것이 나는 그저 송구하게 감사할 따름이다.

 

줄리어드까지 찾아온 말린 누룽지

줄리어드 유학시절, 어머니는 내가 식사를 소홀히 할까 봐 말린 누룽지를 모아 배편으로 보내주시곤 했는데 나는 그걸 조금씩 꺼내 물에다 끓여 먹었다.

줄리어드는 세계 최고의 명문답게 완벽한 연습실을 갖춘 학교였다. 그러나 연습실이 거의 1백개나 된다고 하지만 연습을 필요로 하는 학생은 연습실 수보다 훨씬 많았다.

게다가 연습을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한 번 들어가면 하루 종일 내놓지를 않아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서로가 연습실을 먼저 차지하려고 줄달음치곤 했다.

이런 상황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누룽지는 바쁠 때 무엇보다 훌륭한 요기거리가 됐다.

그러나 내가 유학시절을 그렇게 음악에 매달려 각박하게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명랑한 성격의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당시 나는 뉴욕 한인유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사람들과 잘 부대끼는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은 내 요리 솜씨도 좋아했다. 아마 내게도 맛의 고향 전주에서도 음식 솜씨가 좋다는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었나 보다.

나는 노력 끝에 줄리어드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바이얼린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갈라미언 교수의 수제자가 되었다.

아울러 미국에 있는 동안 워싱턴메리웨더포스트콩쿨 입상(69년), 줄리어드차이코프스키콩쿨 우승(71년), LA청년음악가재단 ‘커리어그란트상’ 수상(71년)에 이어 74년에는 스위스티보바가국제콩쿨에서 영광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 티보바가국제콩쿨은 내가 입상하기 전까지 8년 동안 1위 입상자를 내지 않을 만큼 엄격한 심사로 유명한 콩쿨이었다.

그때까지 한국 음악도의 국제 콩쿨 우승은 열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였기에 나의 우승은 국내 음악계의 쾌거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일들은 당시 미국에 유학한 한국 학생들의 긍지를 높여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줄리어드 안에서도 한국 학생들의 실력을 인정받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미국에서 내가 설 자리를 점차 확립해 가고 있을 무렵, 경희대에서 강력한 제의가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그러나 막내를 곁에 두고 싶어하시는 이미 연로해지신 부모님의 간절한 권유를 더 이상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귀국을 결심했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생활의 약?!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나는 모든 게 잘 돼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효도를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갈등과 아쉬움을 가지고 귀국했던 게 사실이다. 아울러 내가 한국에서 대학을 안 나왔기 때문에 잘 적응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상당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또 내게는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기쁨이 있었기에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내가 한국 음악계에 뿌리를 내린지도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애정 어린 평가만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간성이 크게 손상 당하지 않은 것은, 내 삶이 역경에 처했을 때마다 어머니가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키는 버팀목이 돼주셨던 까닭이다.

어머니는 “항상 정직하게 살아라. 사람의 마음가짐이 음악에서 나오므로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이런 내용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많은 잔소리를(?) 하셨다. ‘잔소리가 약’이라며 같은 말씀을 백 번, 이백 번씩 되풀이하셨다.

어머니는 또 “자기 전에 반드시 내일 옷을 챙겨놓고 자야 한다. 외출할 때는 나가기 전에 먼저 거울을 보고 뒤에 스타킹 줄이 제대로 맞았는지를 확인해 보고 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셨는데(당시의 스타킹은 뒤에 줄이 있었다), 살다 보니 내가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요즘도 잠자기 전에 내일 입을 옷을 반드시 준비해놓고 자는 습관이 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어느덧 어머니의 가르침이 내 교육철학으로 자리하고 있는걸 느낀다. 어머니 말씀이 맞다. 내 생활에서 약이 되는 삶은 모두 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통해서 온 것들이다.

 

딸에게 ‘싸구려 바이얼린’ 사준 어머니

어머니의 생활태도는 아주 검소하셨다. 어머니는 당신이 화장실을 사용하실 때는 불도 켜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샐러리맨인 아버지 아래서 자식 셋을 유학 보내셨던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친구들 어머니에 비해 많이 늙은 어머니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친구들 어머니는 양장에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들고 다니는데 시계도 없이 한복만 입고 다니는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양장은 돈이 많이 드는데 비해 한복은 시장에 가 옷감을 떠서 만들어 입으면 돈이 별로 들지 않아 어머니는 늘 한복만 입으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낀 돈을 어머니는 자식 교육시키는 일에 쓰셨다. 내가 자라서 어머니께 시계를 사드릴만한 나이가 되니까 눈이 어두워져 시계가 쓸모가 없다고 하신다.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아껴서 자식을 공부시켰건만 어머니는 나에 관해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 하나를 안고 계신다.

줄리어드차이코프스키콩쿨에서 내가 1등을 했을 때였다. 당시 스니코프스키라는 스위스 남자가 반주를 했는데 수상직후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싸구려 바이얼린으로 그렇게 훌륭한 연주를 합니까?”

어머니는 그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여든을 훨씬 넘긴 지금도 그 낯선 외국인의 이름과 그가 한 말을 잊지 못하신다.

은행원인 남편은 그래도 살만큼 돈을 벌어왔고 자신은 자식교육을 잘 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림을 꾸려왔건만, 딸의 재능을 제대로 빛내주는 부모가 못되고 딸에게 싸구려 바이얼린이나 켜게 하는 무능한 부모가 돼버린 현실 앞에서 당신들은 얼마나 씁쓸하셨을 것인가!

딸의 1등상 수상보다 그 말을 먼저 기억하시는 어머니, 그날의 기억을 절대로 잊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며 미안해 하신다.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신 어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내게 미안해 하실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어머니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나는 어머니가 너무너무 좋다. 지금은 너끈히 혼자 있어도 될 나이에 이르렀고 주위 사람들이 알아주는 음악가가 됐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내게 필요한 분이시다. 아니 영원히 필요하신 분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그렇게 강하고 무섭게 작용하셨던 어머니가 이제 너무나 작고 가벼워지셨다. 많이 연로하셔서 오빠 집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7-8년 전에는 내 연주회 맨 앞자리 객석에서 앉아 듣곤 하시더니 이제는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감상하신다. 그리고 연주회가 끝나면 무대 뒤에 살짝 왔다가 먼저 조용히 나가신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는 “잘했다”고 격려해주시고 집에서는 따끔하게 지적하시는걸 잊지 않으신다. 이 나이에도 들을 수 있는 어머니의 잔소리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하게 내 가슴에 와 닿는다.

자꾸만 쇠약해가시는 어머니. 어느 인생에나 적용되는 대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으리라. 어머니가 더 약해지시기 전에 온천에 모시고 가 그동안 못다한 모녀간의 얘기들을 밤이 지새도록 나눠보고 싶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그럴 짬이 허용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야속하기만 하다.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있는 당신의 막내딸에 비해 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 자식을 키우는 모든 어머니는 기도하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어머니는 생각하신 것일까?

여고때 세례 받는 것을 끝내 거부하셨던 어머니는 이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셨다. 어머니는 오늘도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연주가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한 아이의 좋은 어머니로 지금처럼 열심히 사는 딸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쉬지 않으실 것이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가 된 지금, 어머니가 나에게 베풀어 주신 것과 같은 마음으로 내 자식을 키우려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키우실 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내 인생이 어머니라고 하는 거목을 만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찬란한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항상 가슴에 담아두고서 어머니 앞에서 제대로 표현을 못한 말이 있다. “어머니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인정을 베풀어라

어머니는 늘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좋아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어렸을 때 식구끼리 밥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에게 “늘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1. 진실된 믿음 없이 거짓으로 행동하지 말라

모든 면에 있어 항상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진실된 행동을 해야 한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든 겉치레로 행하지 말고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행동을 보여줄 것을 강조하셨다.

 

  1. 자식의 재능을 파악할 줄 아는 부모가 되라

다른 사람들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자식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역할중 하나이다. 자식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대로 키워줄 수 있어야 현명한 부모라 할 수 있다.

 

  1. 항상 정직하게 살아라

자신의 음악에 있어서, 주위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정직이 최우선이다. 모든 일에 있어 정직하면 누구에게든 무슨 일에든 통하는 법이다.

 

  1. 내일 할 일을 미리 준비하라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자기 전에 반드시 내일 옷을 챙겨놓고 자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처음부터 허둥대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때문에 지금도 나는 내일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자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1. 검소한 생활을 하라

샐러리맨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자식 셋을 유학시킬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매우 검소한 어머니의 생활습관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화장실을 사용하실 때는 결코 불을 켜 본적이 없으시다. 작은 절약부터 우리에게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이다.

 

  1. 말보다는 행동을 먼저 하라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도, 자식들을 위한 행동도 말이 앞서기보다는 먼저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이다.

스스로가 앞장서서 직접 실천해 보이는 것이 말로 여러 번 강조하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효과적이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인내심을 길러라

음악을 하다 보면 너무 힘이 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생긴다. 하지만 그 고비마다 ‘인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자신을 돌이켜보는 기회를 갖는 게 중요하다.

 

  1. 연습을 가장 중요시 하라

나 역시 이른바 ‘신동’은 아니었다. 또 외국 학생들에 비해 여러모로 경험도 적고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갈라미언 스승 밑에서 꾸준한 연습을 했다.

 

  1. 느낌을 가져라

연주하는 곡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도록 노력하라. 느낌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인간적인 연주를 하라

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인간미가 담긴 인간적인 연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감흥을 전달한다.

 

  1. 꼼꼼히 체크하라

리허설이나 연습 모두 꼼꼼히 체크하라. 철저한 자기 검증을 거치고 극적 포인트와 전체적인 분위기를 찾아내야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

 

  1. 연주를 즐겨라

모든 것들을 기계처럼 곧이 곧 대로 맞출 필요는 없다. 정확한 연주가 꼭 좋은 연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즐기면서 연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1. 최선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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