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한국에서… 봄을 만나다!

밤새 이어진 달빛은 철빛과 함께 찬란한 아침 해의 빛을 만들어내고…

‘원더 (Wonder 2017년 작품)’는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였다. 안면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어기 (Auggie)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누나가 선물한 헬멧을 쓰고 다니길 선호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보다는 할로윈을 더 좋아한다. 엄마와 함께 홈스쿨링을 하다 드디어 얼굴을 드러내놓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친구들과의 우정과 갈등 그 뒤에서 마음의 응원을 아끼지 않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국 행 비행기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나는 주위 승객들 몰래 꺼억꺼억 울었다.

 

01_4월의 두 번째 주말에 만난 한국은 봄앓이 중?!

4월의 두 번째 주말에 만난 한국은 봄앓이를 하고 있었다. 해방과 전쟁에 걸쳐 우리 민족의 정치와 사회에서 파생된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제주 4.3 항쟁은 불과 4년 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와 함께 하늘도 울고 있었다.

봄비치곤 제법 굵었다. 그러면서 봄비는 이내 꽃비로 탈바꿈하였다. 시인에게는 영감의 원천이겠지만 70년대 유신의 겨울을 이어가기 위해 사법살인에 의해 생목숨을 뺏긴 가족들 눈에 비친 봄의 꽃비는 마냥 낭만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주와 포항을 향해 내려가는 차창으로 꽃비를 바라보는 내 시각은 착잡했다.

지진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경주에도 봄은 이미 와 있었다. 나쁜 질병이나 잡귀들이 집 안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로 대문 안이나 밖에 심어진 엄나무의 가시 끝에서도 봄은 웃고 있었다.

웅크러진 내 마음도 더불어 풀어진다. 바로 이 시기를 맞추어 순을 피워내야 하는 엄나무는 다른 데 신경 쓸 여유 없이 바쁘다. 개두릅이라는 이 순을 따자마자 뜨거운 물에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과정을 준비한 정 깊은 친구의 우정에 감동한다.

이 집 대문을 나서면 불과 50여 미터의 길 건너편에 신라 초기의 무덤 4기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황남동 고분군이 빤히 보인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생생한 현장인 셈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라서일까, 친구의 차분한 삶에서는 깊이가 느껴진다.

 

02_복원 된 월정교, 내 눈에는 너무 호사스러웠던…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남천을 따라 최근 복원된 월정교로 향했다. 남천 둔덕에는 유채꽃이 만발이었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참인 신라 궁궐이 있었던 초승달 모양의 터지인 월성에서 군신들이 걸어와 이곳 월정교를 지나 도당산에 올라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했다고 한다.

복원이 된 월정교가 과연 당시의 모습과 얼마나 흡사한지는 모르지만 내 눈에는 너무 호사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수년 전 이란의 이스파한 (Isfahan)에서 본 페르시아 제국 당시 만들어진 다리가 연상되니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당시의 외국 문물의 영향이 신라에까지 미치지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허물어진 월성의 빈터에 방초만 푸르른 성 안에는 조선시대의 얼음창고인 석빙고가 남아 있다. 빈터가 황량하기는 백제의 명공인 아비지가 만든 구층목탑이 몽골군의 방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황룡사지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남아있는 지름 1미터 정도의 초석들과 중앙에 있는 심초석으로 이 목탑의 거대한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무신시대 동안 최씨 정권의 독재가 약화시킨 고려시대의 국력으로 인해 오늘날 후손들의 가슴 한 켠에는 아쉬움과 허무함 그리고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역사는 패자에게 관용이나 용서 없이 철저하게 응징할 뿐이다.

 

03_가난한 일본인들의 인생역전 기회의 땅, 구룡포항

화염으로 타버린 목탑 마냥 힘없이 휑한 마음으로 경주에서 포항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형산강 덕분에 백성들을 규휼하던 곡물창고인 ‘창진’으로 역사를 시작한 포항은 원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다와 가깝다 해서 해도동, 대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죽도동, 그리고 방품림의 역할을 한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송도동 등 지명에서 보듯이 말이다.

더 나아가 형산강을 기점으로 하도동과 상도동으로 나뉘었고 상도동에서 양동마을을 지나면 경주로 연결이 된다. 강 주변의 땅도 비옥해 부추뿐만 아니라 뿌리가 붉은색을 띠는 ‘포항초’라 불리우는 겨울시금치가 잘 자란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라는 섬에서 나는 섬초와 경남 남해에서 재배되는 남해초와 비견되는데 이 겨울 시금치 모두가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잎이 두껍고 향이 진하다. 요리가 된 포항초는 경상도말로 ‘들큰한’ 깊은 단맛을 낸다. 이 형산강의 지류가 죽도시장 앞을 지나 동해에 닿으면서 포항운하가 형성되어 오늘날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또한 구룡포항은 풍부한 어족자원으로 인해 그 당시 가난한 일본인들이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1900년 초 일본 세토내해의 오카야마현과 가가와현에 살던 사람들이 어업권으로 발생한 잦은 분쟁을 이기지 못하여 대마도를 거쳐 구룡포로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04_구룡포 전통시장 가장 허름한 식당에서 만난 모리국수

그들은 수산업으로 많은 부를 축척했으며 전성기인 1930년대에는 280여 가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일본인 학생들만을 위한 학교가 따로 있었다는데 그 학교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해양문화관인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이 들어섰다. 과메기는 원래 청어를 말려 만들었지만 청어가 귀해진 지금은 꽁치로 대신하여 만드는데 물회와 더불어 포항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 되었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 가면 온전한 일본 가옥이 몇 채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하시모토 젠기치’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목조가옥이 가장 잘 보존이 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당시 생활모습을 다양한 전시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점심은 구룡포 전통시장에 가서 가장 허름한 식당을 찾아갔다. 모리국수를 먹기 위함이었다. 여러 가지 생선들을 ‘한꺼번에 넣어 (모리라는 뜻이고 모두의 방언)’ 고춧가루와 함께 맛을 내는데 콩나물과 국수를 넣어 먹는다.

해물이 들어간 칼국수 형태인데 무뚝뚝한 젊은 여주인장의 말투와는 영 다르게 맛은 나이 먹은 아주머니가 자식들 먹이려고 한 듯 겉치레 없이 깔끔한 솜씨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다른 식당들과는 다르게 ‘장치’라는 생선만을 넣어 만든다고 하면서 자신만의 요리법에 자신감을 드러낸다.

 

05_송시열, 정약용 유배지 장기읍성은 인재양성소?!

국수 한 사발에 힘을 얻어 다음 행선지인 장기읍성으로 갔다. 장기읍은 지금도 교통이 다소 불편한 오지이다. 과거에는 유배지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여진족과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쌓은 장기읍성은 높은 지대에 있어 산성인 동시에 읍성이었고 성에서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방어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읍성 안에는 주민들의 검소한 주택과 향교가 있다. 따가운 햇빛 아래 아기똥풀이 지천이다. 치자 그리고 황백과 함께 노란색으로 천연 염색하는데 제격이다. 이미 복원이 된 읍성의 동문에 가면 배일대가 있다. 이곳에서 장기현감은 새해 해맞이를 하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다고 한다. 또한 배일대에서 바라보는 일출 광경은 조선 10경 중 하나인 ‘장기일출’로 손꼽힌다.

17세기 후반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을 정하는 문제가 당파싸움과 맞물려 우암 송시열은 거제도로 귀양지를 옮겨가기 전까지 약 4년을 장기에서 머물렀다. 그러면서 생활고에 찌든 읍성민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 세기가 흐른 후에는 종교문제로 귀양을 가야 했던 다산 정약용도 이곳에서 약 반년을 머물렀다. 그 역시 백성들에게 글 보시를 하는데 이런 씨앗이 결실을 맺어 오늘날 장기 출신으로 걸출한 인물들이 보인다. 이강덕 현 포항시장과 박명재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학계와 주요관직에 여러 명이 있다.

 

06_호미곶은 토끼꼬리 아닌 범꼬리

읍성을 내려와 면사무소에 가면 척화비가 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임을 만년자손에게 경고하노라’라는 대원군의 빛 바랜 한자 문구가 세월의 때를 뒤집어 쓰고 있다.

곧이어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에 들어선다. 해양 문화관광 도시답게 총 204키로의 해안도로가 조성이 되어 있어 자전거 또는 도보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해와 파도를 벗삼아 함께 걷는다 해서 지어진 ‘해파랑길’은 동해의 청정바다를 끼고 영일만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범꼬리 모양인 호미곶은 비록 일본인에 의해 한때나마 토끼꼬리로 비하되기도 했지만 한민족해맞이 축제를 매년 이곳에서 할 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신성시되는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장기곶 등대라고도 불리는 호미곳 등대는 비롯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육지에 있는 왼손, 바다에 있는 오른손인 상생의 손을 보면서 상생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시대의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해본다. 영일만 지역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연오랑이 하루는 해초를 따기 위해 바다에 나와 바위에 앉아 있는데 바위가 움직여 일본까지 흘러갔다.

 

07_지진 만난 포항, 미래로 향하는 열정만은 여전히…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일본인들이 연오랑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한편, 집에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나온 세오녀도 바위에 앉아 있는데 바위가 움직여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이를 또 신기하게 여긴 일본인들이 왕에게 보고를 하고 세오녀를 데리고 오면서 부부는 극적인 상봉를 하였다.

그때부터 신라의 하늘에 있던 해와 달의 빛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알아보니 빛의 정기를 가진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연유라고 하자 신라왕은 신하를 일본에 보내 그들이 다시 신라로 돌아오도록 간청을 한다. 그러나 이 부부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대신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면서 하늘에 제사 지낼 것을 부탁한다.

시키는 대로 하자 신라의 해와 달에 빛이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포항시는 현재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을 조성 중이다. 이 빛이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이 된 포항제철의 산업화와 박태준 같은 걸출한 기업인을 만들어냈을까?

향후 4차산업시대에는 어떤 산업이 이 빛의 연속성을 이어갈 것인가는 중차대한 국가대사인 셈이다. 최근 포항은 지진이라는 복병을 만나 잠시 주춤했지만 미래로 향하는 열정만은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포항에서 영덕까지 최근에 철도가 생겼다. 딱 3개의 역을 거치면서 34분만에 돌파한다. 월포역과 장사역은 동해바다가 보이지만 강구역은 볼 게 없다. 이 철도 노선이 바닷가를 끼고 설계 된 것이 아니라서 관광 목적으로 기차를 타면 금세 실망한다.

 

08_주위에는 만개한 진달래가 타지에서 온 방문객을 맞고…

더구나 디젤로 운행이 되어 기차 내부로까지 매연 냄새가 진동을 한다. 영덕에서 포항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남아 나는 영덕역 뒤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235미터짜리 고불봉에 올랐다. 영덕군내와 바다로 연결되는 오십천이 한눈에 보이는데 주위에는 만개한 진달래가 타지에서 온 방문객을 맞는다.

영덕 팔경 중 하나인 고불봉은 영덕블루로드 트랙이 통과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포항으로 돌아오자 나는 바로 죽도시장으로 향했다. 동해안에서 제일 규모가 큰 이 시장에는 대게, 홍게, 해삼, 전복, 멍게, 고등어, 방어 그리고 고래고기까지 온갖 해산물들이 즐비하다. 처음 맛을 본 고래고기는 내 입안에서 새로운 미각을 창작해낸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매처럼 동해해역을 노닐다 그물에 걸려 푸드덕거렸을 밍크고래를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음미해본다. 돌아가는 길이 아쉬워 명란젓을 사 들고 숙소로 향했다. 영일대 해수욕장이 코앞이다.

올해로 50년 생일을 맞은 포항제철의 위용이 저 멀리서 불야성을 이룬다. 밤새 이어진 달빛은 포스코의 철빛과 함께 찬란한 아침 해의 빛을 만들어 영일대 뒷마당으로 일출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봄볕이 여물어가는 포항은 성취라는 것에 여전히 목말라하고 있는 찬란한 빛의 고장이었다.

 

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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