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와 ‘양처’ 사이

원래 타고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산에서의 지난한 피난살이에, 서울로 와서는 빼어난 아이디어와 기술력 하나만으로 사업을 한답시고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

게다가 사람 잘 믿고 남한테 퍼주는(?) 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남편을 믿고 혼자서 생활을 꾸려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자금을 대고 들어온 동업자가 회사 돈을 몽땅 챙겨 달아나고 나면 혼자서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공동대표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어머니는 어지간한 남자는 꼼짝도 못할 정도로 억세고 괄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여대 청소, 남의 집 살이, 보따리장사, 식당 일…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효자’ 소리를 듣고 ‘범생이’ 타이틀을(?) 놓지 않았던 저였지만 어머니는 저한테까지도 필요 이상으로 엄격했습니다. 가끔은 제가 ‘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어머니가 어린 저의 눈에도 참 많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생활력 강한 어머니가 일면 존경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생겼습니다. 세대 차가 존재하고 개인의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딸 같은 며느리’는 역시 불가능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 세대들은 ‘며느리에게는 무조건 세게, 강하게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원칙(?)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저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스물셋의 철없는 나이에 어쩌다 저한테 홀딱 빠져(?) 2대독자와 홀시어머니가 타고 있는 무시무시한(?) 배에 합류한 아내는 그로부터 21년 동안 이런저런 고생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2004년 어머니가 시드니에서 병환이 짙어져 돌아가시기 전 한 달여 동안은 아내가 대소변을 모두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토록 모질게만 아내를 대하던 어머니도 그때는 줄곧 ‘에미야!’만을 외치셨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리 아들이지만 어머니의 대소변 받아내는 일은 맡길 수 없고 심지어 그 같은 모습을 봐서도 안 된다며 아내는 한사코 제 등을 떠밀어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편 먼저! 아내가 결혼 후 지금까지 지켜온 흔들림 없는 원칙입니다. 무슨 일이든 아내는 저를 가장 중요시하고 아이들이 아닌 저를 중심으로 모든 일들을 진행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좋은 게 생겨도 아이들보다는 언제나 제가 먼저였습니다.

그 몸 고생, 마음 고생을 하면서도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아내는 항상 제 곁에만 들러붙어(?) 있으려 했습니다. ‘껌딱지’라는 별명은 그때부터 생겼던 듯싶습니다. “넌 저 방에 꿀단지라도 묻어놨니?” 아내가 어머니와 함께 할 일들을 얼른 마치고 제가 있는 방으로 건너오려 하면 이렇게 핀잔을 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착하고 마음 여리기로는 이 세상 최고일 것 같은 아내는 언제나 어진 어머니 ‘현모(賢母)’보다는 착한 아내 ‘양처(良妻)’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엄마를 보며 자라서 엄마가 된 또 한 사람… 딸아이도 엄마를 쏙 빼 닮았습니다. 적어도 지 남편을 1등으로 챙기는 일에는….

지난 주말, Mother’s Day를 맞아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여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지 엄마를 닮아 남들한테는 털털하지 못한 딸아이는 그날도 지 남편한테 착 달라붙어 온갖 애교를(?)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딸아이를 향해 우리도 모르게 내뱉은 말은 ‘미친년…’이었습니다. 그 옛날 지 엄마가 친정식구들한테서 수도 없이 들었을 법한 그 소리를 이제는 지가 고스란히 듣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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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hot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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