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에서 엿본 그들의 야망

거친 대서양을 마주보며 하얀 포말 속에서 나는 그들의 야망을 보고야 말았다

국경선은 인위적이다. 씻기지 않을 인간의 탐욕이 품어내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 선을 넘을 때 우리는 괜스레 설렌다. 호기심 반 그리고 두려움 반… 오래 전 런던에서 밤 버스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넘어갈 때 여권 검사가 없어 기뻐한 적이 있었다. 반면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이웃나라 모잠비크를 가면서 밤 버스로 국경에 도착했을 때는 어떠했던가.

 

01_벨렝에 오면 꼭 맛 봐야 한다는 에그 타르트를…

여명과 더불어 눈 앞에 펼쳐진 주변의 처참한 모습을 본 여행객들 눈에 가득한 두려움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려는 이민국 관리의 술수에 몸서리를 친 적이 있었지.

스페인 세비야 (Sevilla)에서 며칠을 보낸 나는 밤 버스를 이용해 포르투갈로 국경을 넘었다. 밤 사이부터 동이 틀 무렵 리스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으니 안전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첫 일정으로 리스본 서쪽의 교외에 있는 벨렝 (Belem)을 찾아갔다. 리스본 시내에서 벨렝까지 가는 두 개의 차량이 붙은 트램 안은 많은 관광객들로 북새통이었다.

다음 정거장에서는 승객을 더 태우지도 못할 정도로 만석이었고 속도 또한 느렸다. 급기야는 운행 중 덜거덕거리기를 몇 번 하더니 고장까지 일으켜 더 이상 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계속 안에서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내려 걸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차 마침 한국인 두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재빠르게 우버택시를 앱으로 불러 나는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벨렝 관광까지 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은 이런 때 쓰는가 보다.

우선 우리는 이곳 벨렝에서 꼭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에그 타르트 (egg tart)’를 만드는 1837년에 문을 연 원조 가게인 ‘파스테이스 드 벨렝 (Pasteis de Belem)’을 찾았다.

 

02_에그 타르트 만드는 원조비법 아는 사람은 단 세 명뿐

Image result for pasteis de belem순서를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긴 줄이 가게 안 뿐만 아니라 밖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사업을 한다는 입담 좋은 청년은 미리 공부해온 내용을 우리에게 설명하기에 바빴다.

그 옛날 벨렝에 있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사들이 입는 옷에 풀을 먹일 때 달걀 흰자만을 사용했는데 나머지 노른자를 활용하기 위해 에그 타르트를 만들기 시작했다나 뭐라나…. 노른자를 이용한 계란 팩을 해서 꿀 피부를 만들 이유가 없었던 수도사들에게는 간식거리도 해결할 겸 현실적인 꽤 괜찮은 방법이었겠다.

작가 공지영이 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쓴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을 보면 하루 다섯 차례나 열리는 기도 못지 않게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이 수도원의 세계라고 한다. 짐작컨대 수도원 안에는 축사뿐만 아니라 양계장까지 있어 계란의 생산이 많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세계 유일한 맛을 지닌 에그 타르트 만드는 원조비법을 아는 사람은 현재 정확히 세 명인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유명한 간식의 품질에 흠이 갈 것을 우려해 그들은 절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리스본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곳 가게를 방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에그 타르트는 맥주와 궁합이 맞는다면서 생기발랄한 두 청년들은 그 바쁜 종업원을 붙잡고 주문을 한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타르트와 시너몬 롤 (cinnamon roll)이 넘어가면서 혀와 목줄에서 감치는 이중 맛을 느끼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행의 긴장과 흥분이 가라앉고 평화로움과 안락함이 서서히 밀려든다. 음식이 인간의 감성에 미치는 영향을 또 한번 경험한다.

 

03_세계의 중심으로 누린 영화 기리기 위해 세운 대항해 발견기념비

가게 앞 정거장에서 다시 트램을 타고 벨렝지구에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은 ‘벨렝탑 (Belem Tower)’과 ‘제로니모스 수도원 (Jeronimos Monastery)’ 그리고 ‘대항해 발견기념비 (Monument to the Discoveries)’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기념비는 15-16세기 대항해 시대로 인해 유럽 변방의 나라에서 향후 500년 동안 세계의 중심으로 누린 영화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 앞 광장에 세계지도를 그려 자신들이 식민지화한 나라들에는 연도와 함께 배를 그려 넣었고 무역을 한 나라들에는 연도만을 표기해놓았다.

일본에는 1541년에 물물교환을 했다는 표시가 있는데 이 접촉을 통해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얻게 되었으니 일본은 역시 주도면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조총을 앞세워 임진년에 조선의 평화로운 강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또한 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노예로 일본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럽에까지 팔려가는 비극이 초래된다. 타국에서 조국의 뼈아픈 역사를 대면하면 그 아픈 파장의 영역이 더 넓어진다. 먹먹한 가슴으로 지도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바람을 쐴 겸 기념비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바로 눈 앞에 ‘타구스 강 (River Tagus)’이 보인다. 이 강은 스페인 옛 수도인 톨레도 (Toledo) 지역에서 발원하여 이곳 포르투갈 리스본을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 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며칠 후 나는 톨레도에서 타호 강을 다시 만났다.

 

04_벨렝탑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원정 기념하기 위해 건립

기념비 동쪽과 서쪽에는 대항해시대를 선구적으로 이끈 엔히크 (Henrique) 왕자를 비롯하여 많은 탐험가들의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다. 유럽에서 인도까지의 항로를 발견한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알바르스 카블랄 (Pedro Alvares Cabral), 최초로 세계일주를 하면서 남미 남쪽 끝에 있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해협을 통과한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아프리카 희망봉을 처음으로 항해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Bartolomeu Dias) 등.

세계의 정치, 경제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를 감히 바꾼 많은 탐험가들이 좁다면 좁은 이 나라에서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모험적인 그리고 도전적인 정신을 적극 장려한 정치가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기념비에서 불과 5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벨렝탑이 있는데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갯벌 위에 서 있는 것을 보니 원래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에 건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색창연하지만 동시에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리스본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이기에 구불구불한 언덕 주위로는 골목이나 계단들이 얼기설기 미로처럼 이어진다. 이런 곳에 구식이지만 제대로 역할을 해내는 트램이 다닌다.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트램이 연상되지만 도로의 폭은 이곳이 훨씬 좁다.

골목에는 형형색색의 집들과 가게들이 빼곡하다. 포르투갈의 민요인 ‘파두 (fado)’ 가락이 식당에서 흘러나온다. 또한 커다란 벽에 파두의 가락이 형상화되어 있다. 온 시내가 한눈이 들어오는 ‘알파마 (Alfama)’ 언덕에 올라가니 저 아래 집들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붉은색이 저 멀리 하늘의 푸른색을 그리워하여 서로의 심장이 포개져 있다. 이곳 언덕에 쪼그려 앉아 지나가는 세계인종들을 오랫동안 감상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05_포르투갈 왕족들은 녹음 우거진 신트라에 거대한 궁전들을

리스본의 서북쪽에는 산맥의 비탈 면에 형성되어 중세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신트라 (Sintra)가 있다. 작은 도시다. 포르투갈 왕족들은 녹음이 우거진 신트라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거대한 궁전들을 산 꼭대기에 지어 더운 여름철에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시드니의 여름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초창기 이민자들이 서쪽에 있는 블루 마운틴 (Blue Mountains)에 별장을 짓고 생활을 했던 것과 흡사하다. 리스본에서 신트라까지 기차가 있어 당일로 신트라에 다녀오는 것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신트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땅 끝이자 대서양이 시작되는 ‘호카 곶 (Cape Roca)’을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신트라가 얼마나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는지는 일단 신트라 역을 내리면 실감한다. 역에서부터 각 성으로 가는 버스가 초만원이다. 주변의 경치도 즐길 겸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7세기 무렵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이 지었다는 ‘무어인들의 성 (The Moors Castle)’을 만난다.

북한산의 백운대를 오를 때 흔히 보는 화강암의 큰 바위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지어진 성을 따라 오르다 보면 꼭 서울 성곽길을 걷는 기분이다. 그러나 역시 성의 건축양식은 서로 다르다. 해발고도 500 미터 정도의 산중턱으로 올라갈수록 가까이는 신트라가, 멀리는 리스본이 차례로 내 발 아래 바짝 엎드린다. 저 멀리 대서양의 파도 대열에서 잠시 이탈하여 이곳까지 방문을 한 바람에 땀을 들인다.

더 둘러볼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마침 성 입구에 도착한 버스를 잡아타고 한 가문의 여름별장인 ‘퀸타다 레갈레이라 (Quinta da Regaleira)’로 향했다. 이 별장의 주인인 ‘몬테이루 (Monteiro)’는 식민지인 브라질에서 커피 무역업으로 큰 돈을 벌어 부모로부터 이미 물려받은 재산을 더 크게 부풀리고 또 돈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것 같다.

 

06_9개의 과정 거친다는 지옥, 속죄, 천국의 과정 음미하면서

19세기 후반 당시 포르투갈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들을 초청하여 축구장 5개 크기의 면적에 온갖 특이한 건축물과 호수 그리고 정원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미로 같은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신석기 시대의 무덤 입구 같은 돌로 된 문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땅 속에 지어진 9층탑이다. 입구 바로 안이 탑 꼭대기인 셈인데 이곳에서 바닥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무작정 내려가면 안 된다. 9개의 과정을 거친다는 지옥, 속죄 그리고 천국의 과정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내려가야 한단다.

계단은 나선형이다. ‘모든 길은 우리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이 탑을 설계했다고 한다. 바닥에 내려와 까마득한 위를 쳐다보면 내 자신이 순간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을 느낀다.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어두운 미로를 따라 가면서 속죄의 연장선으로 마음을 비워야 밝은 빛을 보는 밖 (천국)으로 나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다시 태어나라는 메시지를 백만장자였던 몬테이루는 직접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까?

갑자기 시장기가 밀려든다. 마음을 너무 비웠나(?) 자문하면서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항상 성나 있는 대서양의 파도와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절벽마을인 ‘아제냐스 두 마 (Agenhas do Mar)’에 가기 위해서다.

이곳까지 가는 버스는 동네 구석을 다 돌면서 좁은 길로 가는데 꼭 우리네 시골 버스를 타고 읍내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절벽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의 지붕 색깔은 농염하고 본능적이다. 이 색깔이 예술가들을 부추겨왔나 보다. 절벽 마을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등장한다. 버스가 멈춘 소박한 정류장에도 이 마을이 박혀있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공예품인 ‘아줄레주 (Azulejo)’라는 장식용 타일에 말이다.

 

 

07_향신료의 전쟁 거치며 포르투갈인 후각과 미각은 일찍부터…

그리스 남부 섬 이름을 빗대어 이 마을을 ‘포르투갈의 산토리니’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두 지역의 지붕 색깔은 전혀 상반된다. 절벽 아래에 제법 운치가 있는 식당이 있다. 이곳에서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주린 배를 쥐고 온 셈이었다. 생선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먹음직스런 치즈, 올리브와 콩으로 된 스낵을 실컷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계산은 추가요금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 그럼….

이곳 절벽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호카 곶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신트라에서 바닷가 쪽으로 오는 길이 북쪽의 절벽마을로 가는 길과 남쪽의 호카 곶으로 가는 길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일단 이 두 갈래 길까지 버스로 와서 호카 곶으로 향하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이곳에 도착하면 일단 십자가가 얹혀진 커다란 기념비가 눈에 띈다. 엄밀히 말하면 한참 후에 눈에 들어온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감히 눈을 뜰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해안 절벽 쪽으로 난 산책길을 걸으면서 옷깃을 여민 후에야 전경도 눈에 들어온다. 몸은 계속 휘청거린다.

과거 뉴질랜드 북섬의 ‘통가리로 크로싱 (Tongariro Crossing)’을 한겨울에 걷는데 이와 비슷한 강도의 바람을 경험한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다른 한쪽 언덕에는 깜찍한 색깔을 한 등대가 서 있다. 성난 대서양의 파도와 바람에 맞서면서 포르투갈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 그들의 개척 기질을 느껴본다.

한때 유럽의 땅끝마을에서 대서양과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까지 잇는 선봉대가 되어 해양제국을 건설한 나라 포르투갈…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향신료의 전쟁 (spice war)을 거치면서 포르투갈인들의 후각과 미각은 일찍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식민지배를 한 말라카와 스리랑카에서 수탈된 설탕과 계피가 들어와 싼 값에 서민들까지 맛의 향유 (享有)를 누렸다. 살아나기 시작한 미각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변화시켜 이들의 야망을 더 불타게 하지 않았을까? 거친 대서양을 마주보며 파도가 일구는 하얀 포말 속에서 그들의 야망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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