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나의 이야기

코로나 19 여파로 정부가 외출 5km를 넘지 못하게 이동제한을 해 꼼짝 못하고 갇혀 지냈다. 시드니북클럽 (Sydney Book Club)에 소속되어 있는 나는 이 기회를 호기로 삼아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3권으로 쓰여진 토스토예프스키 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한달 동안 완독할 수 있었고 의욕대로 그에 따른 회원들의 독후감 동영상을 만들다 보니 눈이 너무 혹사를 했는가? 시야가 가물가물하고 눈이 침침하다. 시력을 체크하고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한 편의 시나 글을 대할 때 받는 서정,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을 만날 때 나는 동영상 만들 충동감에 빠진다. 때론 나의 메시지를 동영상에 담아 유튜브에 띄우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동들이 눈에 무리를 가했나 보다. 처음 지인의 시 한 편이 음악을 곁들여 제작된 동영상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나는 독서나 컴퓨터에서 벗어나 눈과 머리를 식힐 겸 봄비가 내리는 정원에 자주 나갔다. 겨울 잔해가 가는 봄비에 말갛게 씻겨 내리고 텃밭엔 열무, 배추, 상추, 쑥갓, 돗나물, 쪽파, 부추, 들깨, 고추, 호박 등이 초록빛 얼굴로 반기었다.

 

봄비는 은정 (恩情)을 내리는 조서 (詔書)와 같고,

여름비는 죄를 사면해주는 사서 (赦書)와 같고,

가을비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만가 (輓歌)와 같다.

 

만물이 소생하는 비는 임금이 은혜를 베풀어 내리는 조서 (詔書)와 같다고 하는, 유몽영 (幽夢影 장조 지음)에 나오는 시 구절이 새롭게 다가온다.

정원으로 나설 때마다 밭에 더불어 나오는 풀을 호미로 솎아주고 흙 비료 (Mushroom Compost)도 풍성하게 주니 봄비를 맞은 그들이 잘도 큰다. 염증을 억제하고 강력한 항산화산소 발생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여 산책길에 수과를 훑어와 잔디밭에 흩뿌린 민들레도 봄 잔치에 끼어들었다.

텃밭엔 쇠비름 나물도 덩달아 얼굴을 내밀고 아주까리나무가 듬성듬성 싹이 터 자란다. 작년에 어린 잎을 따서 나물을 해먹고 한 그루 남겨놓았더니 맺힌 씨앗이 잔디 밭에 떨어져 또 싹을 틔운 것이다.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갈무리 차원으로, 남과 나누고도 여유가 넘치는 김치는 만두를, 미나리나 부추는 버섯과 해물을 섞어 전을, 쑥은 쑥빵이나 쑥떡을 해먹었다. 어린 쑥은 쑥차를 만들었다. 간암에도 좋다고 하는 민들레는 김치를 만들어 간암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이웃과 나누었다. 비파나무 한 그루가 집안에 있으면 만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는 비파 잎으로는 비파차를 만들고….

흙의 정기와 햇빛과 빗물을 받아 자라는 이 모든 생명들이 참으로 귀하고 고맙다. 좁쌀보다도 작디작은 씨앗이 움터 나날이 크게 자라는 생명들의 자연 현상이 새삼 신비하고 경이롭다. ‘땅은 정직하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이 말을 수시로 되뇌인다. 농부들이 가을 추수 때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하는 것이 이러한 마음일까?

‘성실함은 하늘의 근본이요. 예를 다하고 공경함은 사람의 근본이다. 하늘은 하늘대로 자기의 성실함을 다하고, 땅은 땅 대로 자기의 성실함을 다하며, 사람은 사람으로서 자기의 성실함을 다하고 짐승과 초목 등 만물은 만물대로 자기의 성실함을 다하니 하늘의 이치에 맞음이요.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예와 공경을 다하고, 짐승과 초목 등 만물이 서로 예와 공경을 다하니 서로 화합하고 평화로움이다. 하나의 생명을 기름에 성(誠)과 경(敬)을 다하니 생명이 사랑과 자비를 먹고 생기를 얻어 자라니라.’

옛 성현이 들려준 이치와 도리를 씨앗 속에서 깨어나 자라는 생명들을 보고 진실로 이해하게 된다.

우리집 테라스에서 멀리 보이는 로즈 (Rhodes)에 최신식 높은 아파트가 편리와 문명을 자랑하며 우뚝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을 키우며 나도 한 때에 편리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아파트를 선호하여 산 적이 있다, 그러나 요즘 텃밭에 꽂힌 마음은 초가집이라도 텃밭이 딸린 집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단순한 생활을 추구한다고나 할까?

일찍 일어나는 아침 형인 나는 여명이 트지 않은 어두움 속에서 어서 빨리 머리맡 들창이 훤해지기를 기다린다. 오늘은 밑이 든 알타리무를 뽑아 김치를 할 요량에서다. 햇빛이 따스하게 퍼지는 잔디밭에 나앉아 알타리무를 다듬고 시래기 감도 고른다. ‘짹짹’ 새벽을 깨우는 새들이 허공을 나르며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 초록빛으로 빛나는 나무들, 꽃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환희로 평화스러움에 잠긴다. 팬데믹은 나의 생활과 리듬을 바꾸어 놓았고 바뀐 생활과 리듬은 나의 생활가치관을 바꾸어놓았다.

바야흐로 시드니엔 따스한 봄이 지나 여름이 찾아 드는데 전 세계를 꽁꽁 얼어붙게 한 팬데믹은 언제나 풀리려나.

 

글/ 최옥자 (글무늬문학사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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