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장

“편집짠! 이번 호 표지 모데루로 박중훈씨 섭외됐다면서요? 김 짜잔, 멋져요!  박중훈 그 사람, 요즘 여기저기 아주 잘나가는 사람인데 용케 잘 잡았네요!” 기분이 좋았던지 조인규 사장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습니다.

재일교포인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중성지(?) 성격의 ‘마인드 (Mind)’의 성공에 이어 남성지 ‘맨즈라이프 (Men’s Life)’와 여성지 ‘미즈 (MIZ)’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말이 어눌한 탓에 저를 부를 때 ‘편집장 혹은 김 차장’ 대신에 ‘편집짠, 김 짜잔’을 연발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뛰어난 감각을 지닌 무궁무진한 아이디어 뱅크였습니다.

그는 예쁘게 치장하고 한복 또는 정장 차림으로 등장하던 유명 여자탤런트 대신 얼굴도 이상하고(?) 머리까지 뽀글뽀글 볶은 듣보잡(?) 여자모델을 여성지 ‘미즈’의 표지모델로 내세우며 독자들을 향해 ‘당신, 끼 있어?’라고 도발을 했습니다. 외계인(?)을 닮은 외모에 머리까지 올백으로 넘긴 남자모델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네거리에 세워 ‘남자에게도 생활이 있다!’며 남성지 ‘맨즈라이프’의 창간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보다 앞서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던 ‘마인드’의 경우 명동 한복판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는 용감한(?) 누군가가 와서 먹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인터뷰를 진행한다거나 길을 지나다 갑자기 쓰러지면서 주변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등의 이른바 몰래카메라를 그는 1980년대 중반에 이미 도입했습니다. 당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생리대의 흡수도와 안전도를 따지는 실험을 공개적으로 진행해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조인규 사장을 통해 제가 갖고 있지 못했던 부분들을 그득그득(?) 채운 얼마 후에 만난 사람이 자타공인 당대 최고의 여성지회사 ‘여원’을 운영하는 김재원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여원, 신부, 직장인, 젊은엄마, 차차차, 소설문학 등 여섯 개의 잡지를 발행하며 각종 단행본 출판사업까지… 가히 철옹성 같은 여성지 왕국, 출판 왕국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른 채 취재하고 글 쓰는 일에만 매달려서인지 ‘기자 출신이 사업을 하면 100퍼센트 망한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었지만 그는 이 같은 편견을 가뿐히 뛰어넘었던 사람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훗날 성공한 사장이 되기 위해 광고영업 및 마케팅 분야를 자원해 일정기간 동안 그 세계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사장 주재 회의에 들어가는 부장, 차장들은 항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뛰어난 실력과 앞선 감각으로 몰아치는 사장 앞에서 ‘악!’ 소리 한번 제대로 못 내고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자네는… 출세가 너무 빨랐어…” 저와의 첫만남에서 김재원 사장이 던졌던 이 한 마디가 저에게는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어쨌거나 다른 회사에서 ‘부장대우’ 타이틀을 달고 있던 사람을 스카우트 해오면서 그는 이름조차 생소한 ‘차장대리’라는 직함을 줬습니다.

숨도 안(?)쉬고 부지런히 달려왔던 그 동안의 시간들…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의 자부심도 갖고 살아왔던 터였기에 마음 한 켠으로는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입사 8개월 만에 ‘차장대우’를 달고 다시 7개월 후 ‘차장’ 타이틀을 달면서 완전히 꼬리를 떼고 나자 또 다른 모습으로 훌쩍 성장해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김재원 사장은 저의 그런 모습을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은 어찌됐든 저도 ‘코리아타운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가끔씩은 ‘나는 우리회사 사람들에게 어떤 사장으로 비쳐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실력 있는 사장, 매사에 솔선수범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장, 연봉도 많이 주고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사장, 조금 찌질하긴 해도 못되지는 않은 사장… 이 모든 것들이 제가 바라는 모습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명제들입니다. 오늘은 혈기왕성했던 시절, 저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두 분 사장들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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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hot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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