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렸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로 제대로 인식한 후, 제자들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180도 바뀌었다. 그들은 지난 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려는 각오로 목숨 걸고 주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들이 스승으로 모시며 동고 동락했던, 갈릴리 변방, 나사렛이란 조그마한 시골 동네 출신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심을 힘있게 전했다.

 

01_완전한 인간

사도행전이 바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일은 비단 2천년 전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통해, 수많은 곳에서, 수없이 일어날 것이다.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로 인식되고 믿어지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성령님은 어제도 일하셨고, 오늘도 일하시고, 내일도 동일하게 일하시는 분이시다.

변화 중에 가장 어려운 변화가 ‘사람의 변화’이다. 그러나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로 믿어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삶이 변한다. 언행이 변한다. 삶의 목표와 가치 기준이 변한다. 매일 매일 삶의 우선순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정해진다.

그리스도이신 인간 예수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흥미를 가진 자들은 그분께 올인 (all in)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인이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매력이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려면 ‘죽음과 부활’이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지 않는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예수님조차도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하셨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

‘십자가 죽음’이란 그 극한 고통의 순간을 맞으며 더 목청껏 울부짖는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바크타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마 27:46).

독자제현이여, 우리의 죄를 위해 친히 죽음과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들리는가? 이 마지막 일곱 마디를 남기시고 인간이신 예수께서 죽으셨다.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죽음의 고통을 겪으시며 예수님은 본인이 ‘완전한 인간’임을 재차 확인하셨다.

 

02_통회의 기록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나의 기적을 빗대서 암시적으로 말씀하셨다. 요나의 스토리는 4복음서에 3번 나온다 (마 12:39-41; 16:4; 눅 11:29-30). 주목할 것은 마태복음에 2번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요나의 표적을 예수께서 2번의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말씀하셨는지, 아니면 실제로 1번 말씀하셨는데, 마태복음 저자가 강조하기 위해 2번 반복해서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숨은 의도를 이해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듯하다. 제자들도 전혀 몰랐다.

“요나가 밤낮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the son of [the] person)도 밤낮 3일 동안 땅 속 깊은 곳에 머물 것이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이 ‘인자’ (사람의 아들)가 예수 자신을 지칭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물론 다니엘서를 비롯해서 예언서에 능통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마태복음의 저자는 성령의 강한 감동하심으로 이 말씀을 기억했다. 스승인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숨은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안타깝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회개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이 말씀을 기록했을 것이다.

스승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분의 심정이 얼마나 암담하고 참담했을 지를 생각하니, 자신의 복음서에 이 일화를 한 번 언급하는 것으론 너무나 부족해서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다.

 

03_절망의 귀향길

모든 사람들은 – 제자들조차도 – 예수의 죽음을 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없이 슬퍼했다. 절망했다. 망연자실했다.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죽음보다, 친구로서의 예수의 죽음보다, 그들을 더욱 깊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 것이 있다.

인간 예수가 혹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실낱 같은 희망과 어렴풋한 믿음이 예수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4장 21절은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 (예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바랬습니다. 하지만 이 일 (예수의 죽음)이 일어난 지가 3일째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잃어버렸다. 이제 그들은 누구를 따라야 하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하며, 누구를 인생의 멘토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삶에 대한 소망과 용기,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예수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각기 본연의 일터나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명심하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글 / 권오영 (철학박사· 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한국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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