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우리 인생 받쳐주는 기초이며, 감춰진 보물, 빛나는 태양, 깨끗게 하는 샘물…

“가장 요긴한 것은 모든 상황, 모든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존 스토트. 수년 전 타계한 손꼽히는 대학자요, 저술가인 존 스토트의 고백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는 모든 이에게 충분하며 또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떡과 포도주와 생명수가 되시어 먹여주시고, 의로움의 옷이 되어 입혀주시며, 의원이 되어 고쳐주시고, 상담자가 되어 조언해주시기 때문이다.

 

01_가장 요긴한 것

그분은 통치하는 왕이며, 가르치는 선지자요, 속죄하는 제사장이며, 보호하는 남편이요, 공급하는 아버지요, 위로하는 형제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우리 인생을 받쳐주는 기초이며, 살리는 뿌리요, 감추어진 보물이요, 빛나는 태양이요, 깨끗게 하는 샘물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에서 요긴한, ‘그리스도’ (메시아)란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성경 저자는 누구일까?

대답은 놀랍게도 생전에 가장 많은 시간을 그분과 함께 보낸 제자들이 아닌, ‘바울’이다. 바울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고, 그가 가장 선호하는 말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는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바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을 만큼 엄청난 존재였다. 바울이 그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인생을 걸 정도로 그리스도는 위대한 존재였다.

그리스도는 한 평범한 인간, 바울의 삶을 완전히 비범하게 바꿔놓았다. 그리스도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은 바울은 복음 전파하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았으며,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이 후대 크리스천들에게 위대한 전도자로, 위대한 사도로 존경받는 것은 바울보다 더 위대하고, 더 큰 존재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비교. 마 12:41-43, “보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자가 여기 있다”).

 

02_홀대 당하는 그리스도?

그런데 이상하다. 이 엄청난 존재인 ‘그리스도’가 4복음서 저자들에게는 홀대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모두가 잘 알다시피, 4 복음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성경이다.

‘그리스도’ (Christ)는 예수님의 성 (surname) 혹은 호칭 (title)처럼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예수님께는 너무나 중요한 단어이다. 예수님께 만약 ‘그리스도’란 타이틀이 붙여지지 않았다면, 그 분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지금의 예수님,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구세주인 예수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클라이맥스인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을 완수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란 타이틀 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는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반드시 함께 언급되어야 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왜 4복음서 저자들은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의도적일까? 아니면 오류 였을까? 대답은 오류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4 복음서 저자들은 일어난 사건 (fact)을 사실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은 ‘그리스도’란 말은 자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한 번도 당신의 입으로 당신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 온 이스라엘 민족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바로 그 ‘메시아’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03_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기에 (정확히는 평범 이하), 누구도 그분을 특별한 존재로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모습이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과 일치한다.  성경은 메시아는 사람들의 환심을 살만한 어떤 것도 외모에서 풍기지 않는다고 예언하고 있다.  평균 이하의 덜 생기고 부족한 외모의 소유자를 누가 신경 쓰겠는가?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2).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수도 없이 많이 읽었지만, 설마 이 말씀이 그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는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일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알아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그들을 오랜 정치적인 억압과 눌림에서 해방시킬, 로마 황제보다 더 큰 파워를 소유한 신(deity)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속에 묘사된 인물은 힘이 전혀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나약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 말씀이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그들의 기대치에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형편없는 존재에게 누가 관심을 두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보다는 외모를 통해 사람을 평가한다. 누구나 다 눈을 가지고 있지만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늘 소수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글 / 권오영 (철학박사· 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한국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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